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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윤리 –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

동양 유교문화권에서는 효를 중시하여 조상제사가 마치 국교와도 같이 준행되었다. 한편 서구 그리스도교는 제사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할 가장 존귀한 예요 미사성제만이 유일한 제사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교회가 동양선교에 어떤 자세로 임해왔고 조상제사에 대해 왜 엄금하다가 관용조치를 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아울러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와 그 현대적 의미를 한국 신학적으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서구교회는 “교회 밖에서는 일체 구원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과 함께 문화적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유교 역시 다른 문화를 경시하고 이질사상에 대한 벽이단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와 유교 조상제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16세기 말엽 중국선교에 임한 예수회의 마테오 릿치는 가능한 한 유교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교와 조화시키려는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취하고 조상제사를 효성의 행위로 이해하여 허용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꼬회 선교사들은 이를 비난하면서 조상제사를 미신적 행위로 간주하여 금하였다. 이 문제는 1백년간의 쟁론끝에 마침내 교황청은 1715년 끌레멘스 11세의 칙서 Ex illa die와 1742년 베네딕또 14세의 Ex quo singulari를 통해 조상제사를 엄금하고, 불복하는 자는 파문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면서 일체의 논란을 금했다.  교황청이 조상제사를 엄금한 이유는 비록 제사의식이 전적으로 악하지 않더라도 당시 중국인의 종교심성으로 보아 이 의식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서구 교회는 조상제가 허례요 이단행위라고 다음과 같은 폐제논리를 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죽은 사람의 혼이 신주나 어떤 물건에 깃들 수 없다. 세째,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간 자는 흠향하러 오지 않을 것이요 지옥에 간 자는 흠향하러 올 수도 없을 것이므로 제사는 쓸데없는 짓이다. 네째,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성제만이 유일한 제사이므로 다른 제사는 없애야 한다.   이러한 교황청의 폐제논리와 제사금령의     에는 그리스도교의 순수성과 통일성에 치중한 선교정책과 유럽인의 우월의식 및 동양문화에 대한 경시 등이 크게 작용했으며, 그 외에는 수도회간의 경쟁의식, 국가간의 알력,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다.  그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토착화에 대한 교회의 재인식, 비그리스도교 민족안에 있는 영적보화들과 그리스도교 은총을 조화 시키려는 신학사조의 대두, 세계무대에서 동양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동양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보다깊은 이해와 통찰, 동양인들의 미신적 종교심성의 감소, 국가에서 명하는 공경의식은 단지 사회적 국민적 의식에 불과하다는 정부당국의 발표 등으로 인해 조상제사 문제는 해빙기를 맞게 된다.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하고, 조상제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 이유는 “비록 전에는 외교의식에 관련되어 있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람들의 풍습과 정신이 변하여 현재에 와서는 한갓 조상들에게 효성을, 국가에 사랑을, 동포에게 예모를 표시함에 불과한 민간적 예식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동양문화에 대한 교황청의 시각의 변화와 선교정책의 변화에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토착화가 교회의 근본자세임을 재확인 하면서 전통문화를 보호 육성하며 문화를 복음화 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통해 전통 조상제사를 복음화하고 현대에 맞는 그리스도교적 제례의식을 만들기 위한 지침안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한국 가톨릭 지도서 준비위원회에서는 상제례 지침을 마련 중에 있다.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정신은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선조에게 보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계속 생시와 같이 섬김으로 효를 실천하는데 있다. 이렇게 드리는 제사는 신령이 흠향하게 되며 아울러 복도 따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제사의 근본정신과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손의 보본추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를 받는 대상보다 드리는 자손이 중심이 되며, 산이의 효심과 성경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유교 조상제사는 보본과 보은의 마음에서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요 신령의 흠향과 강복은 지성의 제사에 수반되는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이 조상제사는 상징적 물건과 언어와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본구조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음을 집중시키고 신령의 임재를 여실하게 하는 준비단계, 둘째, 효성과 사모의 상징적 표현인 제물을 드리면서 흠향을 간청하는 의식, 세째, 신령께서 제사를 흠향하고 강복하는 의식, 네째, 신령께 드리는 의식을 끝내고 친족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유대와 일치를 도모하는 마무리 부분이다.   이 모든 의식은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요, 성경의 실천이며 더 나아가 신령이 흠향하리라는 염원과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유교 제사에서 중심이 되는 신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죽은 사람의 혼이 의지 하도록 마련해 준 의빙처요, 둘째는, 인간의 본성적 조건에서 볼때 죽은 이를 게속 사모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볼수 있는 상이 필요한 데 신주는 바로 죽은이의 신상인 것이다. 그리고 신주의 의미는 의빙처 보다는 신상이 더 근원적이고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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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2

6. 君子素其位而行하고, 不願乎其外하니. 素富貴 行乎富貴하고, 素貧賤 行乎貧賤하니라(14장).    *단어풀이     素(소) : 여기서는 ‘卽’(처하다)의 뜻    *직역    군자는 자기의 위치에 처하여 행하고 자기의 바깥에서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에서 행하고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에서 행한다.    *해설    時中의 개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자기의 처지에 처하여서 자기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군자가 지녀야 할 미덕이다. 그리하여 기쁠 때에 기뻐하고 슬플 때에 슬퍼할 줄 아는 中和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주의 운행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7. 誠者는 天之道也오 誠之者는 人之道也다(20장).    *단어풀이      中(중) : 맞다.      之(지) : (목표에) 이르다.             *직역      정성 그것은 하늘의 道이며 정성에 이르는 그것은 인간의 道이다.     *해설      誠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온전한 성실성이나 정성으로서 인간생활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생을 수반하며 인간이나 사물의 완성으로 인도하고 神의 영역에 까지 스며들어 갈 수 있는 진실성이다. 朱喜는 誠을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곧 하늘의 이치이다. 또한 誠에 이르려는 것은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에 이르려 함이니 사람의 길 또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정성스러운 사람은 힘들이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맞으며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조용히 따름은 道에 맞나니 이는 곧 聖人의 道와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聖人의 德은 하늘의 이치인데 하늘의 이치는 곧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8.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다(22장).    *직역      오직 하늘 아래에 지극한 정성이라야. 그 본성에 능히 다하는 것이니 그 본성에 능히 다함은 즉 인간의 본성을 능히 다함이요 인간의 본성을 능히 다함은 즉 사물의 본성을 능히 다함이다.    *해설      朱喜는 사람이나 사물 모두는 같지만 단 부여된 형성하는 氣가 서로 같지 않아 다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의 본성을 아는 것은 곧 남의 본성을 아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알게 됨을 통해서 나는 천지의 변화와 육성에 참여하게 된다.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와 함께 나는 셋이 됨을 말하려는 것이다.  9.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니 行而世爲天下法하여 言而世爲天下則이라(29장).    *단어풀이     道(도) : 여기서는 법칙을 말함    法(법) : 제도, 行의 본보기    *직역      그러므로 君子는 행위으로서 법칙을 만들고 행위로서 대대로 천하의 제도를 만들며 말씀으로서 대대로 천하의 준칙을 만드니라.    *해설      유가에서는 은둔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를 본령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도 周遊天下라는 불휴의 생애를 살았다. 활동하면 천하의 지도자가 되며 그의 언행은 곧장 법칙이된다는 것이다. 10. 詩曰, 德輕如毛라하니 毛猶宥倫이어니와 上天之載無聲無臭아 至矣니라(33장).    *단어풀이     詩(시) : 詩經을 말함.             倫(륜) : ‘비교하다’라는 의미로 쓰임     無聲無臭는 不賭不聞이의 경지와 같다. 無聲無臭의 無는 절대 無가 아니라 上天의 속성으로서의 無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上天은 首章의 天命과 相應하여 中庸의 결미를 맺는다.     *직역      詩에 이르기를 德은 털같이 가볍다고 하니 털은 오히려 비교할 수는 있지만 하늘 위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느니 지극하니라.    *해설      詩經에 文王의 德도 털같이 가볍다고 했다. 文王의 德이 인간 사회에서는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우주 행정을 시행하는 上天의 德에 비하면 한오라기 털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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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Ⅶ. 본문강독       1. 天命之爲性이고, 率性之爲道이며, 修道之爲敎이다(1장).    *단어풀이     率(솔) : 따르다    *직역    하늘의 명한 것, 그것을 일러 性이라 하고, 性대로 따르는 그것을 일러 道라 하고, 道를 닦는 그것을 일러 敎라 한다. 2. 喜怒哀樂之未發은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은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1장).    *단어풀이     皆(개) : 모두.      達(달) : 통할, 이를    *직역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中이라고 일컽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和라고 일컬으니 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道라는 것이니라.     *해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은 情이요. 그것을 발하지 않은 것이 性이다. 한쪽에 치우치거자 의지하는 것이 없는 것을 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으며 어긋나는 것이 없는 것을 和라고 일컽는다.  3. 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이 久矣니라(3장).    *단어 풀이     至(지) : 지극할, 이를.      鮮(선) : 고울, 적을(少-거의 없다).      久(구) : 오랠.     矣(의) : 단정, 한정의 어조사.    *직역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中庸은 지극하구나, 그러나 능력있는 백성이 적은지 오래니라.    *해설     지나치면 中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고로 오직 中庸의 德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 같이 얻은 바로서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없지만 세상의 가르침이 약해지고 백성이 이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능력있는 자가 드물다.  4.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대, 及其至也하여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니라(12장).    *단어풀이     費(비) : 원래 用과 같은 뜻이나 여기서는 廣(넓다)의 뜻.     焉(언) : 단정 어조사.    *직역    君子의 道는 광대하고도 은밀하다.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가히 알 수 있대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해설    ‘道’라는 것은 그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끝에 가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그러므로 그 사소한 데에 대하여서는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알 수 있지만 그 위대한 데에 가서는 군자라 할 지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은 ‘中庸의 道’가 알아 듣기 힘들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5. 道不遠人이니, 人之爲道而遠人하면, 不可以爲道이니라(13장).    *단어풀이     遠(달) : 형용사일 때는 ‘멀다’의 뜻, 동사일 때는 ‘멀리하다’의 뜻     爲(위) : 여기서는 ‘여기다’, ‘일컫다’의 뜻    *직역    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道를 하여도 (道가) 사람을 멀리하면 이로써 道라고 할 수 없다.    *해설    유교의 道는 人道이다. 따라서 道는 결코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 없으며 인간에서 떨어진 道는 天道이지 人道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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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관하여

제사의 관하여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까지 일년에 열네댓번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 커 온 나로서는 제사에 대해 이렇다 할 반감도 호감도 가지지 않았었고 그저 지내야 할 것으로 따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제사에 대해서 알고 난 후부터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제사에 큰 의의를 두게 되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에 4군데의 제사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나의 제사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제사가 시작하는 시간에 문제가 있다. 아버지 말로써는 하루가 시작하는 제일 이른 시각인 12시를 기해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말 효심과 정성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 시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평소의 직장 생활을 하는 삼촌의 경우 제사에 한 번 참여하고 나면 그 다음날 회사일을 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제관들이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사 시간을 6시에서 9시 사이에 지냄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이다. 제물은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조상이 좋아했던 음식을 가지고 지낸다. 그러나 요즘 와서 제물의 값이 엄청 비싸고 이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이 든다. 또한 제사가 끝나고 친족끼리의 음복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제물을 요즘 입맛에 맞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마련함이 적당하다.   셋째, 제사의 과정 중에 우리 집의 경우는 합문을 하고 약 5분간 엎드려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말로는 이러는 동안에 조상께서 오셔서 밥을 7 숟가락 먹을 동안 그러는 것이라 하시는 데 추효보본의 관점에서는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는 이를 다음에 이어지는 묵념으로 대처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넷째, 우리집의 경우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경우에 축을 읊는 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었다. 따라서 축을 읊을 때는 한문으로 하기보다는 한글로 제사의 대상에 대해 알기 쉽게 읽는다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상을 상기 시키는 데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제사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서술해 보았다. 제사는 평상시 만나 볼 수 없는 친족들과 만남을 중개 해주고 조상에 대한 얘기를 함으로써 그분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제사를 준비함에 있어 그 정성과 효성을 볼 때 결코 금지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나 현대적 의미를 살펴 볼 때 그의 불합리한 점이나 모순점을 고쳐 나간다면 이 시대에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의 전통 문화로써 자리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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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제 5장 백록동규도 *백록동규는 백록동 서원의 규칙이란 뜻이다. [그림설명]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오륜. @切問近思(절문근사, 절실한 것을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함) 이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주된 것은 삼강오륜이다.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博學(박학, 많은 것을 아는 것 5수레는 읽어야 함), 審問(심문, 찾아서 물어야 함), 愼思(신사, 신중하게 사색해야 함), 明辨(명변, 이치에 대한 분명한 변별력이 있어야 함) 篤行(독행,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나는 보건데 聖賢(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하는 뜻은 다 義理(의리, 존재의 문제, 천리와 같음)를 講明(강명, 말해서 밝힘, 즉 도덕으로 만들어 인간을 천지의 수준으로 올림, 이것은 성인이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음)하여 그 몸을 닦은 이수에 미루어 사람에게 까지 미치려 함이고 한갓 博覽(박람), 强記(강기)에 힘써 詞章(사장)으로 이름이나 날리고 祿利(녹리, 녹봉이나 이익)나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학문하는 사람은 이미 이와는 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성현들이 사람을 가리치던 법은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熟讀(숙독), 深思(심사, 깊이 생각함)하여 問辨(문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그 몸을 責(책, 꾸짖다)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하면 規투(규투?), 禁防(금방, 금하여 방지함)을 갖추는 것이야 어찌 남이 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근세에 학교에 구약이 있는데 그 학자0를 待(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또 그 법이 반드시 다 예사람의 뜻이 아니므로 이제 이 학당에는 거것을 실시하지 않고 특히 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大端(대단)을  취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문위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은 서로 함께 강명하고 준수(遵守)하여 몸에 실천하면 생각하는 것과 (思慮) 言行에 있어서 戒謹(계근), 恐懼(공구)1)할 바가 반드시 저 보다도 더 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禁防(금방)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으면 저 이른바 規約(규약)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제군은 잘 생각할 지어다.  제 6장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이장은 제 1장과 연관이 있다. 세계는 보편의 이치인 이일과 개별의 이치인 事理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은 性品과 形氣로 나뉘는 데 사물과 다르게(탁하며 더럽고 낮은 면이 있음) 인간의 形氣는 그자체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높은(粹 淸, 高) 면이 있다. 이를 분류(분간)해서 보면 形氣와 性으로 나누어 진다.  이때 性과 情은 하나로 통섭되어 있다. 임은정씨가 이르기를 이른바 심이 性情을 통한다는 것2)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남을 타서 나고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하는 데서 七情이 나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그 性情을 하나로 통일해서 모여들게 하는 것은 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면 性이되므로 이것은 心의 근본(體)이고 感情이 동해서 통하게 되면 情이 되므로 이것은 心의 운용(用)이다. 장자는 말한 ‘마음은 性情을 통회한다’는 것은 적당하다. 心은 性을 통함으로써 仁義禮智를 性이라 하고(性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인의예지다) 또 仁義之心이란 말도 있게 되는 것이며 心은 情을 통함으로 惻隱, 羞惡, 辭讓, 是非를 情이라하는 것이다(情은 이처럼 4端과 7情이 있는데 여기서는 4端만 말하고 있다). 心이 性을 통하지 못하면(心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가 깨끗하며 맑고 높지 아니할 때 통하지 못한다) 그 미발의 중3)을 이룰 수 없어서 性이 천착4)되기 쉽고 心이 情을 통하지 못하면(心이 情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그 중절(중간의 절도)의 화합을 이룰 수 없어서 情이 방탕해지기 쉽다. 학자는 이것을 알고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性을 기르고(性이 있는 그대로 광을 낼수 있게 하는 것) 그 情을 단속하기만 하면 학문하는 길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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