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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보관물: 신학자료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2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 님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 복귀섭리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13)에 반석은 곧 그리스오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에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14), 출애굽기 7장 1절15)),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16)),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17)) 회개함으로써 소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어떻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18)),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19)).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20)),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21)). 모세가 반석을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22)).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까지 이어져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찌기 저들이 광야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 육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23)).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24)).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26))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27)).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28)),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29)).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미리 보이신 것이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믿음의 기대
ㄹ.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ㄱ.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ㄴ.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셧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빋드록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ㄱ)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잇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1))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2))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3)).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오르는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5), 민수기 27장 12~14절6)).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7)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8)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9)),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10)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차 오실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11)),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태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성막을 위한 기대
(2) 성막을 위한 기대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맞기 위하여서도 성막을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하여서 이 두 기대를 세울 수 있었던가 ? 모세가 성막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금식기도로서 ‘40일 사탄분립기간’을 뜻맞게 세우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막이상을 세워 나아가는 모세에게 믿음으로써 순종굴복하면, 성막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지고,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막이라 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성판과 법궤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ㄱ.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인간은 6일만에 창조된 말씀의 실체이다(요한복음 1장 3절1)). 따라서 이와같이 창조되었다가 타락된 인간을 복귀하시기 위한 재창조의 말슴을 주시려는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는, 사탄의 침범을 당한 창조기간의 6수를 성별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6일 동안 여호수아의 영광의 구름으로 시내산을 덮으심으로써 성별하신 후, 제7일내에 그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다(출애굽기 24장 16절2)). 모세는 이때부터 40주야를 금식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4장 18절3)). 그것은 이미 위에서 상세히 논한 바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건너 후,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은, 저들이 일시적으로 모세를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만,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을 세우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지나서 성막을 세울 때까지, 그를 믿고 모시고 순종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금식기도를 하는 기간에,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섬겼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4절4) ).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하여 세워야 했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말씀의 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그것을 찾아야 할 이 기간에 있어서만은, 하나님도 그들의 행동을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자마자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두 석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다(출애굽기 32장 19절5)). 그리하여 이것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두 석판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같이 후아담과 후해와로서 보귀될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깨뜨렸다는 것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만약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를 중심하고 행해진 이스라엘의 이와같은 불신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순종케 하심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섭리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는 섭리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2차 또는 3차까지 연자오디어 나아갔던 것이다. ㄴ.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석판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르비듬에서 석판의 뿌리 되는 반석의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 있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7장 6절6)), 모세가 석판을 깨뜨린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석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오면, 처음 석판에 써주시었던 것과같은 말씀을 다시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7)). 그러나 여기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찾아 세워,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고서는, 석판을 중심한 성막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40주야를 금식한 후에 십계명의 말씀을 기록한 제2차 석판과 성막이상을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4장 28절8)). 한번 깨뜨린 석판을 40주야의 금식기도로써 복귀하였다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저를 믿는 성도들이 40일 사탄분립기대로써 그를 맞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면, 그 기대 위에 재림하셔서 구원섭리를 다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제2차로 석판을 중심한 성막이상을 복귀하던 ‘40일 사탄분립기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니, 때는 제2년 정월 초하루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0장 17절9)). 이리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성막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그들이 성막을 짓는 것만으로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변치않고 이 성막을 자기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제2년 2월 20일,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였다(민수기 10장 11~12절10)).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신으로 흘러 모세를 원망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시어 불로써 진 끝을 사르기도 하셨다(민수기 11장 1절11)).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도 깨듣지 못하고 통곡하며, 만나외에는 생선도 외도 수박도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애급땅을 그리워하였다(민수기 11장 4~6절12)).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우고 나아가야 할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게 되어,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는 다시 제3차로의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ㄷ.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미족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한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모세의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 성막은 여전히 모세를 중심한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르비듬에서 성막의 중심인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의 샘물을 마신(출애굽기 17장 6절13)) 터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우고, 성막을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주신 것이 40일 정탕기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로부터 족장 한 사람씩을 모든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민수기 13장 1절14)) 40일 동안을 정탐하게 하셨다(민수기 13장 25절15)). 그러나 정탐에서 돌아온 12명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그 땅의 주민은 강하고 성읍이 견고할 뿐 아니라(민수기 13장 28절16)), 그 땅은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키가 커서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수기 13장 32~33절17))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그 성과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새로이 한 장관을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18)).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19)).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장 11절20))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한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민수기 14장 31~34절21))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ㄷ.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1)).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2)).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3)).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4)).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5)).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6)). 이것을 본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7)).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8)).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9)).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10)). (1) 성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에로 들어왔따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11))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12))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성막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헤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13))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를, 성소는 유형 실체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14)),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에 있어서 잇그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15))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의, 작게는 성막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16)).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17))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물속에 장사지내고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와 이적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심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은 천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 – 실체기대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와 육축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욌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22)),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23)), 그 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24)),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기적과 10재앙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25)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시었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땅에서 희생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26))라는 말로써 바로를 속여 3일 동안 자유를 얻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소요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27)). 이왁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28), 민수기 33장 3절29)).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30)).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드르이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31)).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32)),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33), 시편 2장 9절34))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35)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을 떠난지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36)).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37)),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38)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39)). 고린도전서 10장 4절40)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41))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도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지만, 반석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와 성막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42)).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마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