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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2

      Ⅰ. 문예부흥(Renaissance)  중세 사회인들의 본성의 외적인 추구에 의하여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이 제기되었고,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문예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이다.  그러면 그 본성의 외적인 추구는 무엇이었으며, 또 어떻게 되어 인간이 그것을 추구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을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완수함으로써만 완성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또 인간은 자유의지로써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인격의 절대적인 자주성을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 인격의 자주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계시를 받지 않아도, 그의 이지와 이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생활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본성적으로 이지와 이성을 추구하게된다. 인간은 또 자연계를 주관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과학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원리를 찾아 현실생활의 환경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과 현실과 과학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 사회인들은 그 봉건제도에 의한 사회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본성이 억압당하고 있었기 대문에, 그 본성의 외적인 욕망에 의하여 위와 같은 것들을 더욱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같이, 중세인들은 십자군 전쟁이래 동방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헬라사상의 고전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헬라의 고대정신이 바로 인간의 자유와, 인격의 자주성과, 이지와 이성의 존엄성과, 자연을 숭상하고 현실에 치중하며 과학을 세우는 것 등 인간 본성의 이적인 추구에 의한 것이어서, 이것들이 그대로 중세인의 본성적인 욕망에 부합되었으므로,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은 불길 같이 일어나 드디어 인본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서, 재생 또는 부흥이라는 뜻이다. 이 르네상스는 14세기 경부터 헬라사상에 관한 고전 연구의 본산인 이탈리아에서 태동되었었다. 이 인본주의운동은 처음에는 중세인으로 하여금 그리이스의 고대로 돌아가 그 정신을 모방케 하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더 나아가 이 운동은 그 고전문화를 재생하여 중세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또 이것은 비단 문화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혁신운동으로 확대되어, 사실상 근대사회를 이루는 외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본성의 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시대적인 사조였던 인본주의(혹은 인문주의)로 말미암아, 봉건사회 전반에 대한 외적인 혁신운동으로 전개된 현상을 르네상스(문예부흥)라고 부른다.          Ⅱ. 종교개혁  중세사회에 있어서의 교황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교황과 승려의세속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세인들이 인본주의를 부르짖게 됨에 따라,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규범에 반항하게 되었고, 인간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봉건계급제도와 교황권에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또 인간의 이성과 이지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교황에 예속시키는 데서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신앙생활에 반발하게 되었으며, 자연과 현실과 과학을 무시하는 둔세적, 타계적, 금욕적인 신앙태도를 배격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마침내 중세 기독교인들은 교황정치에 반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 사회인들이 그 본성의 외적인 욕망을 추구함에 따라서, 억압되었던 그 본성의 내적인 욕망도 추구하게 되어, 드디어 사도들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기에 열렬했던 초대 기독정신에로의 복고를 부르짖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중세에 있어서의 히브리사상의 복고운동이다. 그리하여 14세기에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신학교수 위클리프(Wycliffe, John 1324~1384)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신앙의 기준을 교황이나 승려에게 둘 것이 아니고 성서 자체에다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교회의 제도나 의식이나 규범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승려의 윤락과 그들의 민중에 대한 착취 및 남용을 통렬히 공박하였다.  이와같이 종교개혁운동은 십자군전쟁에 의하여 교황의 위신이 떨어진 후, 14세기부터 이미 영국에서 움텄고, 15세기 말엽에는 이탈리아에서도 이 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여 주동했던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517년 교황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사원의 건축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죽은 후에 구원을 받는 속죄의 표라고 선전하면서 면죄부를 팔게 되자, 이 폐해에 대한 반대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독일에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운동은 폭발되었다. 그리하여 이 개혁운동의 불길은 점차로 확대되어 프랑스에서는 칼빈,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전되어 갔고, 그것은 영국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되어 신교운동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국제간의 싸움은 백여 년간이나 계속되어 오다가, 마침내 독일을 중심하고 일어났던 30년전쟁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인하여 끝나면서, 신․구 종파의 싸움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그 결과 북구는 게르만민족을 중심한 신교의 승리로 돌아갔고, 남구는 라틴민족을 중심한 구교의 판도로서 나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30년전쟁은 독일을 중심하고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도간에 일어났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에 그치지 않고, 독일제국의 존폐를 결정하는 정치적인 내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강화회의는, 신․구 교파에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는 종교회의인 동시에, 곡일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 제국간의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인 국제회의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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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재강림 시대- 종교 개혁기

         제5장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는 서기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400년간을 말한다.  이 시대의 성격에 관한 대강은 동시성으로 본 메시아 강림준비시대와의 대조에서 이미 논술되었으나, 여기에서 좀 더 상세한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복귀섭리로 보아 이 기간은 종교개혁기,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수기 등 세 기간으로 구분된다.               제1절 종교개혁기(1517~1648)  서기 1517년 독일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때부터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구 종파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의 130년 기간을 종교개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간의 성격은 중세 봉건사회의 소산인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써 형성된다. 하나님이 중세사회를 통하여 이루려 하셨던 섭리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을 때, 이것을 새로운 섭리역사의 방향으로 전환시켜서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나아가는 중추적인 사명을 한 것이 바로 문예부흥(Renaissance)과 종교개혁이었다. 따라서 이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하고는 이 시대에 대한 성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 중세 봉건사회의 소산이라면, 이 사회가 중세 인간들의 본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어서 그것들을 해산하게 하였는가 ?  중세는 봉건제도와 로만 카톨릭의 세속적인 타락으로부터 오는 사회환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억압되어 그 자유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게 된 때였다. 원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종적인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승려들의 간섭과,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그 규범은, 당시 인간들의 신앙생활의 자유를 구속하였고, 그 엄격한 봉건계급제도는 인간의 자주적인 신앙활동을 속박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승려의 승관 매매와 인민에 대한 착취로써, 그들의 생활은 한층 더 사치와 향락으로 흘렀었다.  따라서 교황권은 일반사회의 권력기관과 다름없이 비신앙적인 입장에 서게 되어, 그들은 국민의 신앙생활을 지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되어 중세 봉건시대의 사회환경은 인간이 그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경 가운데 구속되어 있었던 중세인들은, 본성적으로 그 환경을 타파하고 창조본성을 복귀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뚜렷이 내 외 양면의 성향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니, 그의 창조원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에 대한 형상적인 실체대상이므로,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았다. 그리고 그 성상과 형상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내적인 성상과 외적인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생존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와같이 창조된 인간은 본성도 내 외 양면의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에 대한 복귀섭리를 하심에 있어서도, 인간 본성의 양면의 추구에 대응하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래 인간의 외적인 육신을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으로 내적인 영인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기 2장 7절1)), 재창조를 위한 복귀섭리도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복귀해 들어가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이미 후편 제1장에서 논한 바와같이, 타락인간은 외적인 ‘상징헌제’를 한 터전 위에서야 내적인 ‘실체헌제’를 할 수 있었고, 여기에서 성공함으로써만 보다 내적인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지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타락인간을 복귀하심에 있어서도, 구약전 시대에는 헌제에 의하여 ‘종들의 종’의 입장(창세기 9장 25절2))을,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써 종의 입장(레우기 25장 55절3))을,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믿음으로써 양자의 입장(로마서 8장 23절4))을, 성약시대에는 심정으로써 참자녀의 입장을 복귀하는 순서로 해 나오시는 것이다(후편 제2장 제3절 Ⅲ.2). 도 과학에 의하여 먼저 외적인 사회환경을 복귀해가면서, 종교를 세워서 내적인 인간의 심령을 복귀하는 섭리를 해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사와 인간이 창조된 순서를 보더라도 외적인 천사장이 먼저였고 내적인 인간이 나중이었다. 따라서 천사와 타락인간을 복귀함 있어서도, 먼저 외적인 천사세계를 세우시어 역사케 하심으로써, 인간의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실체헌제를 복귀하신 다음, 이어서 영인체를 중심한 내적인 무형세계를 복귀하시는 순서로 섭리해 나오시는 것이다.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내적인 사명을 다해야 했던 교황들을 윤락으로 말미암아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고, 창조본성을 되찾으려는 중세 인간들은, 그 본성의 내 외 양면의 추구에 의하여, 중세적 지도정신을 가인 아벨 두 형의 사상에 대한 복고운동등으로 분립하였던 것이니, 먼저는 가인형인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이요, 다음은 아벨형인 히브리사상의 복고운동이었다. 그리하여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은 신본주의의 부활을 위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면 먼저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의 흐름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교류되어 이 시대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기원전 2,000년대에 에게해의 크레타섬을 중심하고 미노아문명권이 형성되었었다. 이 문명은 그리이스로 흘러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러, 인본주의의 헬라사상(Hellenism)을 지도정신으로 하는 가인형의 헬라문명권을 형성하였고, 한편 이와 거의 동시에 서아시아에서는 신본주의의 히브리사상(Hebraism)을 지도정신으로 하는 아벨형의 히브리문명권을 형성하였으니, 이 때가 바로 통일왕국시대였었다. 당시의 이스라엘왕들이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인민들과 함께 성전을 받듦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체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서 메시아를 맞았다면, 그 때에 히브리 문명권은 헬라문명권으로 흡수하여 하나의 세계적인 문명권을 형성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뜻 가운데 서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바빌론으로 포로 되어 갔다가 돌아온 후, 기원전 333년 그리이스에 속방된 때로부터, 기원전 63년 헬라문명권내에 있었던 로마에 속방되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기간은, 히브리사상이 헬라사상에 지배를 당하는 입장에 처하였던 시대이다.  앞 장에서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봉하여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당시의 로마제국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당시의 로마제국은 예수님을 중심한 메시아왕국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히브리사상은 그대로 헬라사상의 지배 밑에 머물러 있게 되었었다. 서기 313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는, 점차 히브리사상이 헬라사상을 극복하기 시작하여, 서기 70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이스 정교문명권과 서구문명권을 이룩하게 되었었다.  중세사회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던 교황과 국왕들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그 때에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짐으로써, 히브리사상은 헬라사상을 완전히 흡수 융합하여 세계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윤락으로 인하여 히브리사상을 중심한 중세적 지도정신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이에서 하나님은 사탄분립의 성립을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치 아담에게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시기 위하여, 그를 가인과 아벨로 갈라 세우셨던 것과 같이, 이 때에도 그 지도정신을 두 사상으로 다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가인형의 헬라사상 복고운동과 아벨형의 히브리사상 복고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마침내 각각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인본주의를 주도 이념으로 하여 문예부흥이 일어남에 따라서, 헬라사상이 히브리사상을 지배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메시아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 유대민족이 그리이스에 속방됨으로써, 헬라사상이 히브리사상을 지배하던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마치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함으로써만, 아담에게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여, 메시아를 맞기 위한 <실체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가인형인 헬라사상이 아벨형인 히브리사상에 완전히 굴복함으로써, 비로소 중세적 지도정신에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여, 재림 주님을 맞기 위한 <실체기대>가 세계적으로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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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Ⅳ.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우리는 위에서 말한 바(제2절 Ⅰ)에 의하여,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장 17절1)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슬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의 재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가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요한」의 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Ⅴ.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는 위에서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하늘의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견지에서만 성서를 보아왔던 까닭이다.  우리는 인습적인 신앙관념과 구태를 벗어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신령 면으로나 진리 면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세례「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하여서 영계에 있는 세례「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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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불신

 Ⅲ.세례「요한」의 불신  위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이나 전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우러르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따라서 만일 세례「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일찌기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신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들 매를 매기에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 하였다(마태복음 3장 11절1)). 분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ꡔ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ꡕ고 한 세례「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세례「요한」에게 직접 교시하셨고, 세례「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 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장 23절1)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 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지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한 복음 1장 33 – 34절),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앞에 무지하여(마태복음 11장 19절)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장 21절)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  사실상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증거 함으로써, 그의 증거 자로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에 있었던 세례「요한」을 두고서 ꡔ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ꡕ(누가복음 1장 75절1))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1)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세례를 중심하고 다툰 일까지 있었다(요한복음 3장 25절).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1)에, 세례「요한」이 ꡔ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ꡕ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처지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할 때에 그가 쇠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하늘의 역사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요한」은, 특히 옥중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인간 세례「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ꡔ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ꡕ(마태복음 11장 3절)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누가복음 1장 75절1)),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 어린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노정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ꡔ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ꡕ(마태복음 11장 4 – 5절)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태복음 11장 5절) 하신 말씀에는, 세례「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유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무식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 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다니는 천명보다도 먼저 천명을 영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과 교법사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 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ꡔ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ꡕ(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하는 심판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 – 21절)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질문하러 왔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요한」이 본시 가장 위해한 선지자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ꡔ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ꡕ(마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찌기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 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일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  과거에 왔다 간 수 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 하였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 적인 처지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세례「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요한은 (누가복음 1장 75절),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다음 절에는 ꡔ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ꡕ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을 하여 온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자리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ꡔ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ꡕ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ꡔ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ꡕ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다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ꡔ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ꡕ고 하여, 세례「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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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민족의 갈 길

   Ⅱ.「유대」민족의 갈 길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태복음 11장 14절),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요한」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될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빈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생장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마태복음 12장 1 – 8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의 푯대인, 율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5장 17절).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태복음 21장 31절) 주장하셨던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누가복음 7장 37 – 38절).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어 든, 하물며 음행 하는 여인을 돌로 쳐죽여도 말못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에 있어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7장 44 – 50절, 마태복음 26장 7 – 13절).  한편 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고(요한복음 14장 9절),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요한복음 14장 6절),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마태복음 10장 37절, 누가복음 14장 26절).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하였던 것이다(마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세례「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누가복음 1장 13절1)). 그의 부친이 지성소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누가복음 1장 9 – 66절). 분만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면서 수도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위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 그것이 세례「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이 되고 말았기 대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정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엘리야」가 오셨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믿는 처지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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