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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구원관 제시
(3) 그리스도교의 救援觀 提示 증산교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혼만을 구원하는 종교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당신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영광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 중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지닌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26)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닮은 존재, 곧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이다. 인간은 진선미(眞善美)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기에 진리를 알고 선한 것을 사랑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사랑의 내적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27-8)는 말씀처럼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셨다. 인간은 原初的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있었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존재인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 곧 섭리(攝理)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느님처럼 되려 함으로써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을 등지게 되었다. 인간의 완전성은 완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하나, 그러한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생명을 등지게 되었다.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게 됨으로써 피조계의 유한성에 예속되었고, 그리하여 죽음에로 치닫게 된 것이다. 원래 하느님안에서 자연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었으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그러한 조화도 깨어지게 되었다. 죄악과 심각한 불평등 그리고 다툼과 재난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연은 온갖 엉겅퀴를 내고 동물마저 인간을 해치려 들었다. 인간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생명이신 하느님을 등지게 됨으로써 근원적인 죽음에로 이르게 되어 인간은 죽음앞에 허무한 존재,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죄악과 고통속에서 허덕이다가 죽음에 걸려 넘어져 버리는 우리네 삶은 하느님을 등진 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죄와 죄로 인한 파멸의 결과를 두고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친히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당신을 낮추시고 참으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셨다. 그리고는 부활하셨다. 그 분은 참 인간으로 오시어 참 인간으로서 고통받으시고 죽으시고 그리하여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결과인 죽음을 물리쳐 주셨다. 원래 인간이 하느님과 누리던 친교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는 하느님만이 사해주실 수 있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을 상대로 범한 것이기에 인간적 차원에서는 갚을 수 없다. 오직 하느님편에서만이 없애주실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 없습니다.”(사도 4,12) 인간의 구원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죽음앞에 사라져 버리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존재임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던 것처럼 인간은 부활하여 하느님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존재, 거룩하신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결국은 무덤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의미없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시의 상태, 곧 원죄 이전의 상태보다 더 영광을 받게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활찬송(Exsulltet)에서는 첫 인간이었던 아담의 죄를 두고 “오 복된 탓이여!”라고 노래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이 인간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가는 문’이 되었다. 영혼만이 아니라 靈肉의 완전한 인간이 새로운 삶에로 불리게 되었다. 하느님을 밝히 알게 되어 至福直觀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따라 ‘변화된 모습으로, 영적인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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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관 – 현세중심적 성격
(2) 現世的 性格 증산교의 구원관에서 나타나는 현세중심적인 성격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증산교는 민족의 공통적 종교심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언급없이는 증산교의 구원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전통적 종교적 심성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에서 드러나듯이 현세중심적이다. 이 현세중심적인 성격은 전통적인 신관과 저승관에 기인한다. 민간신앙에서의 여러 신들은 나름대로 각각의 영역안에서만 활동하며 인간을 도울 수는 있지만, 인간을 구원에로 이끄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자로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관심은 현세의 삶에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민담(民譚)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저승은 죽으면 누구든지 가야만 하는 막연한 곳으로서, 이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저승의 모습은 이승의 모습이 그대로 전이(轉移)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하는 성격을 전혀 가지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이 세상 속에, 적어도 이 세상 저쪽 어딘가에는 부(富)나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한 꿈이 실현되는 별천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세상과 별개(別個)의, 다른 차원의 저승에서가 아니라 현세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모든 꿈이 이루어져 영원히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재생설화나 변신설화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은 현세의 삶에 집착하였고, 더 나아가 인간 삶을 절대시하였다. 따라서 현세의 삶으로 오래도록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대표적으로 현세의 삶을 영원히 연장시키는 것으로서의 신선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초월’과 ‘영원’에의 희망이 ‘현세 안에서’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인간중심 사상과 현실적인 가치만을 절대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은 신이나 다른 동물들마저 인간을 부러워하는 가장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를 넘어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신을 부릴 수 있다고 하는 차원에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신이 인간을 돕거나 인간이 신을 부린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현세적인 복의 추구에로 집중되어 있다. 실제로 巫俗은 인간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며, 궁극적으로 재앙(災殃)을 피하고 복을 받음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채우려는 시도이다. 욕구중에서도 물질생활의 생계유지나 병의 완치, 풍부한 재산을 가지려고 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재수굿이나 우환굿, 사령굿 등 모두가 현세의 삶을 충만히 살고자 하는 원의(願意)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이다. 특히 원한을 가진 사령(死靈)이 저승으로 잘 가기를 기원하는 ‘씻김굿’에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원혼(寃魂)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그만 끼치고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도와 주는 신이 되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죽은 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산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의 전통적인 종교적 심성은 현세중심적, 나아가 현세집착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장수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할 것이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현세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내세(來世)에 대한 관념, 즉 저승이 있기는 하지만 저승에서의 삶이 그러한 염원을 해결하여 주는 새로운 세상이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행복한 삶에로 이끄는 구원자로서의 절대신’의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세중심적인 성격은 신라시대에 풍미(風靡)했던 미륵신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미륵신앙은 원래의 불교사상과는 다른 한국적 불교사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은 원래 죽은 혼령을 저승에서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신라의 불교는 미륵이 이 세상에 下降하여 현세의 인간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미륵은 하잘것 없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미륵을 저 세상에 놓아두지 않고 이 세상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증산은 이러한 민족 在來의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하여, 해원을 통한 천지공사의 결과로써 후천선경,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후천세계의 낙원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 神明들에 관하여 수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만 이 神明들은 여전히 현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연극의 주역은 역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고 그 보조역을 하는 것이 신명들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증산의 지상낙원은 인존시대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인간중심적이다. 현세중심적이다. 현세에 사는 억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전부이다. 신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천지공사라는 것은 증산 자신의 실조의식(失調意識)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당시의 혼란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장길산의 미륵운동(彌勒運動)이나 東學과 같은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모순된 사회현실, 구조적 문제 등을 개혁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없었기에 종교적인 방법으로의 전환으로 자신의 실조의식을 해결하려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증산교의 구원은 현세에서 평등하고 억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 아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않고 행복을 누리는 것일 뿐이다. 大巡典經 5:16에서는 후천개벽 이후 지상에 낙원이 도래(到來)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가 되면 지상에서 사는 인간이 不老․不死와 자유욕구대로 하여도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인간, 과거․현재․미래를 꿰뚫어 보는 知慧人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동물성의 제한을 받고 있고, 의식과 무의식이 갈라져 있으며, 인간사회에 항상 그림자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후천세계에서 인간이 모두 육체를 벗어 던지고 천사(天使)처럼 탈바꿈을 하지 않은 한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척(慼)짓지 않고 원한을 풀면서 살면 지상천국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地上天國이 오기 전에 죽은 인간에 대한 문제도 의문점을 제공하고 있다. 죽어 신명이 되어 신명계에 올라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가, 때로는 신안이 열린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기도 하다가, 지상 선경이 이루어지면 그 땅에 사는 인간에게 기생(寄生)하여 살아간다는 것일 수도 있다. 神明과 人間이 同樂하는 것이 선경이라고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그 중심은 죽은 인간의 혼인 신명보다는 인간에게 있다. 후천은 인간이 하늘보다 땅보다 존엄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증산이 이야기하는 인간 구원은 인간의 안정되고 완성된 구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을 만드신 절대자와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그리고 안정되게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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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증산교- 구원관
4) 救援觀 (1) 몇 가지 의문점 증산은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는 신명들의 원한 때문이며, 이 신명들의 원한을 해소시켜줄 때 인간의 고통은 끝난다고 했다. 증산은 이렇게 인간의 죽은 원령인 신명의 원한을 해소시켜 주는 것을 인간구원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죽으면 더 이상 인간세상에 관여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또한 최초의 恨인 단주의 한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모든 원한이 풀리게 된다면, 단주가 최초의 인간이라는 언급도 근거가 미약하거니와, 단주 이전의 인간의 한은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근본적으로, 천지공사를 통한 인간 구원의 핵심이라는 해원의 방법이 주술적 성격을 넘지 못하고 있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주술에는 동종 주술(同種 呪術) 혹은 모방 주술(模倣呪術)과 감염 주술(感染呪術)이 있다. 동종 주술이나 모방 주술의 원리는 ‘유사(類似)는 유사를 낳는다’ 혹은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닮는다’라는 것이며, 감염 주술의 원리는 ‘한 번 서로 접촉한 것은 실제로 그 접촉이 떨어진 후에도 여전히 계속 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同種呪術(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 like produce like)은 옛날에 원시인들이 흔히 적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찌르거나 해치는 행위를 하고는 적의 상이 괴로워하면 그 상의 당사자도 괴로워하고, 그 상이 파괴되면 당사자도 죽는다는 신앙에서 적의 상을 해치거나 깨뜨림으로써 그 적을 괴멸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감염주술(感染呪術)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손․발톱을 손에 넣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 머리카락이나 손·발톱의 주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어느 곳에서도 작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만한다. 예컨대 고대의 어떤 정치가는 만일에 사람을 상해하고 미안하게 느껴지면 상해를 입힌 손에 침을 뱉아야 한다고 하고, 그렇게 하면 부상자의 고통이 그 자리에서 덜어질 것이라고 했다. 동종 주술의 영어 표현은 ‘association of ideas by similarity’이고, 감염 주술은 ‘association of ideas by contiguity’이다. 여기서 ‘관념 연합(association of ideas)’라고 한 것은 어떤 결과의 원인을 원시인들 나름대로 찾은 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원시인의 관념 연합은 오늘 날 문명인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된 관념 연합’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원시인들이 엉뚱하게 그 원인을 선교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전염병의 진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잘못된 관념 연합인 것이다. 어떵 병이 났을 때 그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던 원시인들은 그 병과 상관관계가 있음직한 가설을 설립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적인 인과율의 발견이 주술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주술적인 행위는 강한 동경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 발로된 것으로서, 유사한 행위를 함으로써 실제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증산의 천지공사의 수행방식도 같은 맥락에 있다. 종이에 글을 써서 태우는 등의 그의 행위는 자신의 실조의식에서의 탈출과 모순에 빠진 사회자체를 변혁시켜야 겠다는 열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천지의 도수를 뜯어고치는 上帝가 그 권위에 버금가는 행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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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증산교 -세계관, 신관, 인간관
3.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증산교 1) 世界觀 증산교의 세계관은 김 일부의 정역(正易)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잘못된 천지도수 때문에 원한이 생겨났다는 우주론적 분석은 증산이 3년간 전국을 유력할 때 만난 김일부의 정역이론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민간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교의였던 원한의식을 일단 증산이 우주를 혼란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으로 재해석했지만 이 세계의 근본문제를 무속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론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김일부의 우주론적 해석을 채택했을 수도 있다.1) 어쨌든 증산의 세계관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나 우주 창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증산은 단지 존재하던 우주의 주재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선천과 후천, 신계와 인간계로 나뉘어진 세계에서 구천상제로서 있었다는 것뿐이다. 증산 역시 결국은 하나의 피조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증산도(甑山道-증산교계의 한 교파)의 주장에 의하면 주재자 역시 음양의 조화에서 생겨났고, 이미 있던 우주는 증산이라는 주인을 만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가 단순히 그냥 생겨날 수는 없다. 원인없이 결과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陰陽이라는 질서에 의해 우주와 인간이 생겨났다면, 그 질서를 만든 존재가 있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만물은 하느님의 창조에 기인한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완성에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2) 神觀 증산은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요, 미륵불이며, 옥황상제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 강조를 위한 것이다. 자신과 절대자와의 동일시로 말미암아 자신이 절대자라고 생각하게 된 종교적 체험을 당시 혼란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민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납득시키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주장이 가장 권위있는 말,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마지막 말로 받아 들이도록 하기 위해 당시 민중들에게 알려진 여러 호칭을 자신에게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되어 지상에서의 역할에 따라 위계질서를 가지고, 인간과 계속해서 관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죽은 인간은 피조물이지 증산교에서처럼 죽은 후에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祖上은 祖上神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공적을 쌓은 인간이라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조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자기 탓없이 하느님을 믿지 않은 사람도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인간 본성에 따라 성실하게 삶을 영위하였으면 구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주장과는 달리 신계에서도 계급이 있다고 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 신명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주재(主宰)하고, 인간을 도와 함께 일을 이루어 나간다고 하지만, 인간이 도통공부를 하여 신안(神眼)이 열리면 신명을 부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신은 인간없이는 아무일도 못하는 존재, 인간에 기생하는 존재,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 전래 민간신앙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결국 증산교에 있어 신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증산교는 인간의 사령(死靈)을 신으로 생각하고, 그 신을 섬기거나 부리며 주술을 행하는 다신론적 귀신종교, 무격(巫覡) 종교라고 할 수 있다. 3) 人間觀 먼저 증산교에는 인간본질에 대한 해석이 없다. 단지 지금 말세를 맞이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간, 특히 민중을 구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인간은 신명에게 종속되는 존재였으나, 후천시대에는 인간이 신보다 더 존엄하고 귀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후천에는 인간이 신보다 높은 인존시대가 열린다고 했다. 선천에서는 謀事在人하고 成事在天한다고 했으나, 후천에서는 謀事在天하고 成事在人한다는 것이다. 이 인존사상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로 볼 때 인간이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신에게 의지하여 보았으나 실패하였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에도 의존하여 보았지만 결국 동학혁명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을 신보다도 높은 존재로 보아야만 참다운 평등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증산의 종교적 사상의 결과이다. 그러나 증산교의 인존사상은 한국인의 현세중심적인 사고에서 연역된 결과이다. 인간을 구원해 줄 뚜렷한 신, 절대신에 대한 관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했고, 동시에 현세에 사는 인간이 귀하고 존엄하다는 사상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증산은 현세에서도 신안이 열리면 신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는 신도 문제이지만,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피조된 존재로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지, 신보다 높은 존재가 아니다. 여기에서 증산교의 신관 자체도 당연히 문제시 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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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흥종교의 종합주의적 연장
6) 韓國 新興宗敎의 傳統的인 綜合主義의 延長 그러나 이와 같은 종교적 혼합주의 경향은 단지 증산교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다. 증산교는 한국 신흥종교의 전통적인 종합주의의 연장인 것이다. 신흥종교는 일반적으로 혼란한 시대나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기성종교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새로운 이념체제, 새로운 신앙체계로써 위협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흥종교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기성종교의 요소를 혼합하여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 형성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총체적인 아노미 상태에서는 새로운 종합적 이념의 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창시자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함은 물론이다. 창시자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모인 추종자들은 창시자의 카리스마를 통해 그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새로운 의미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신흥종교는 時代末的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일어나며, 그 성격은 종교혼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신흥종교의 대부분은 유불선 三敎에다 민간신앙과 기독교가 혼재(混在)되어 있으며, 심지어 회교(回敎)의 혼재까지를 목격할 수 있다. 신흥종교의 종합주의가 한 시대의 종말과 때를 맞춘 것이라면 한국적 신흥종교의 종합주의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최치원, 최승우, 최신지 등 신라 末의 지적 엘리트들이 한 시대의 붕괴와 그들이 당한 사회에서의 소외를 겪으면서 불교, 도교, 풍수도참 사상 등을 복합하여간 현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종합주의는 고려시대 말의 미륵신앙운동과 조선시대 여환의 미륵혁명 운동을 거쳐 근대에 들어서서 다시 동학의 유불선 삼교의 종합으로 다시 타오르게 된다. 더욱이 최제우의 가르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이 있음을 생각할 때 유불선 삼교 외에 기독교적인 영향까지를 포함한 한국에 있어서의 종교적 종합주의의 새시대가 동학을 기다려서 형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증산교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증산교의 종합주의는 동학을 넘어서 더 확대된다. 증산은 자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시대에 강림하여서 인류를 구원하는 미륵부처님이며, 우리 민족이 우주의 절대권자로 인식해 왔던 옥황상제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증산의 미륵하세(彌勒下世)의 모티브는 후삼국시대의 견훤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견훤이 신라말의 말법(末法)사상과 사회의 붕괴를 틈타 스스로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자처하였다면, 증산은 근대의 세기말적 종말현상에서 하세화신(下世化身)한 미륵으로 자처하며 후천개벽을 예견하였다.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동일한 초인적 신체(神體)에다 자신들을 귀속시킨 공통점을 갖고 있고, 증산이 미륵을 넘어서서 우주를 주재하는 존재로까지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서 증산교가 신흥종교의 한국적 종합주의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적 신흥종교에와 같이 증산교에서도 참위(讖緯)와 무속신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증산교는 신흥종교의 한국적 종합주의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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