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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 대한 시각
(2) 그리스도교에 대한 시각 ① 비판 증산은 직접 예수교당에 찾아가서 여러 의례(儀禮)와 교리(敎理)를 보고 듣고 난 후 “족히 취할 것이 없다.”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신명박대(神明薄待)가 심하다는 진단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신앙으로서 하느님 이외의 신격을 모두 부정하고 배척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면 제 조상신이나 제 나라의 민족신을 모두 부정하게 된다. 유대 민족의 신명들 이외에 모든 민족과 나라의 신명들에 대해서는 우상숭배라는 딱지를 붙여 일체 배척한다.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매우 편협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며, 그것은 제 조상과 제 나라의 민족신을 버리고 유대민족의 수호신과 유대인의 혈통과 가계(家系)에 편입되려는 신앙을 결과한다. 결국 남의 조상신을 모시고 자기의 조상신을 배척하는 외곬의 신앙태도를 신명박대라고 표현한 것이다. 신명을 박대해서는 장차 성공할 수 없으며( – “이 시대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하는 자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신명대접을 잘한 조선에 성공의 운수가 열릴 것이라는 것이 증산의 주장이다. 실제로 예수교인은 증산과 관련된 인물들과의 교류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물들로만 그려진다. ② 수용 “西有大聖人曰, 西學. 東有大聖人曰, 東學, 都是敎民化民…”『玄武經』 여기에서 증산은 서학을 서쪽에 있던 大聖人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종교로 평가하고 있다. 동학과 마찬가지로 성인의 가르침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증산은 그리스도교를 진리의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종교 체계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절대자는 그 호칭만 다를 뿐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예컨대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예수교도는 예수의 재강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또한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구원의 종교’라고 이해했음을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증산의 그리스도교 수용은 성서를 불태운 것과 마테오 리치 신부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성서를 불태운 것은 그리스도교가 신명을 박대하기에 족히 취할 것이 없는 것이라 하여 배척의 태도로 볼 수 있으나, 증산에 의해 신비스럽게 사용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증산은 자신이 행한 천지공사에서 많은 종이와 책을 불사르는 종교적 행위를 누차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불사른 행위는 불태움의 의미 곧 ‘훼손시킨다, 없앤다’는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교가 천지공사에 흡수되어 진정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 볼 수 있다. 독립적으로는 불완전했던 그리스도교를 천지공사라는 종교적 행위, 곧 주술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문명 건설을 위한 일에 참여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증산이 칭찬한 인물로서 증산교인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믿어진다. “매양 옛 사람을 評論하실 때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를 칭찬하시니라” “天師 가라사대 이마두(마테오 리치 신부)는 現 해원시대에 神明界의 주벽이 되며,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니라.”고 한 증산의 명령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믿어진다. 첫째, 마테오 리치 신부는 증산의 출세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마테오 리치가 주축이 된 신명들의 간절한 호소로 인해 증산이 지상에 出世하게 된 것이다. 둘째, 증산이 세상을 널리 살펴본 행위인 천하대순(天下大巡)에 유일한 동행자로 선임된 인물이다. 셋째, 마테오 리치에 의해 하늘과 땅의 경계가 틔워짐으로 인해 그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가능케 하고, 인간계와 신계의 경계를 없앤 최초의 인물’이며 ‘현대문명의 아버지’이다. 넷째, 증산에 의해 상제봉조라는 혈(穴)이름을 가진 광주 무등산에 영혼이 모셔지는 의식을 거침으로써, 上帝인 증산을 위해 계속 봉사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일개 서양인 선교사의 입장이 아니라, 후천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종정(宗正) 곧 대표로써 선임되었고, 나아가 증산교 교리 체계에서 증산 다음가는 위치로까지 격상되어 있다. 증산은 그의 공로에 대해 “이마두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그러나 그 공덕을 은연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징보다 그리스도교 수용에서 특별한 점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강림(降臨)하였다는 증산의 설교와 자신이 인류의 모든 질병을 대속(代贖)한다고 주장한 것에 있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의 죄악을 구속(拘束)하고 지상의 평화를 위해 강림하였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상에서 증산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증산교가 유불선과 동학, 민간신앙과 그리스도교를 혼합하여 만든 종교혼합주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 특징이라면 기성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 교의를 받아들이는데 반해, 민간신앙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간신앙이 하류 계층에게 가장 밀접히 내면화된 전통적 신앙체계일 뿐만 아니라, 증산교가 억압된 비엘리트를 중심으로 종교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온 체질화된 민간신앙을 기층(基層)으로 하여 그 위에 타종교의 이념을 복합적으로 성층화(成層化)시키게 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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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민간신앙, 그리스도교적 측면
3) 동학적 측면 동학에 대해서는 동학이 보국안민을 주창하였으나 속으로는 각기 왕후장상을 바랐다고 비판함으로써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였다. 또한 능히 유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학의 경문인 시천주(侍天呪)와 수운가사(水雲歌詞)를 자주 추종자들에게 읽게 하거나 또는 인용함으로써 동학의 여러 경문을 자신의 종교예식에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적 사상체계에서 증산교는 동학의 뒤를 따른다고 하였다.증산교는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동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학과 거의 同時代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4) 선교 및 민간신앙적 측면 仙敎를 비롯한 재래 민간신앙에 대해서는 그 입장을 약간 달리한다. 그는 정감록을 수차에 걸쳐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지공사의 의식에 있어서 주술과 부적을 사용하며 여러 신명에게 축원하는 등 각종 주술적 행위를 하는 동시에 수련공부로써 인간이 신명과 동화하여 신통묘술을 행할 수 있으며 장생불사하는 후천선경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여 선교의 도술조화를 긍정적인 태도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주역(周易)과 해인(海印)과 묘(墓)의 발음(發陰)을 인정하였으며 고사와 굿을 행하였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리고 그는 先․後天이 교역하는 운도에 의하여 개벽의 공사를 보며, 이에 따라 조선을 세계의 종주국으로 하는 신정부가 열린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개벽의 공사를 지운(地運)에 맞추어 보았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神道를 중심으로 하여 ‘신묘불측한 도술조화’를 한다고 하여 재래 민간신앙을 거의 모두 자신의 종교와 관련시켰다. 따라서 증산의 해원은 무속에서 말하는 살풀이, 액풀이, 한풀이 등을 한자말로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무당은 보통 한 가족의 조상신을 대상으로 하여 원한을 품은 조상신을 달래 소재구복(消災求福)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증산은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정치적․문화적․전쟁의 영웅들, 즉 수운, 전봉준, 주희, 마테오 리치, 관우 같은 영들을 주로 상대하여 천지공사를 통해 유토피아적 후천세계를 열려고 한 것이다. 해원사상에 있어 증산의 특이한 점은 해원과 보은(報恩)을 연결시킨 것이다. 무당의 굿은 대체로 원령들을 달래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증산의 경우는 일단 그에 의해 해원이 된 영은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증산이 하는 천지공사 등의 작업을 도와주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증산교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神明인 마테오 리치는 증산에 의하면 동양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는 일이 실패로 되고 더 나아가 타향에서 죽었기 때문에 큰 한을 품고 죽었다고 하는데, 증산이 그를 해원시키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영계의 조화정부(統一神團)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증산의 일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증산의 우주관과 그 우주의 주역인 신명들에 대한 견해는 巫俗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특히 증산교의 신관은 무속의 신관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명부십왕(冥府十王)․황천신(黃泉神)․칠성사자(七星使者)․삼신(三神)․지신(地神)․산왕(山王)․용왕(龍王)․이십사절후장(二十四 節候裝) 등의 용어나 문명신(文明神)․조선신명(朝鮮神明)․서양신명(西洋神明) 등의 개념은 바로 무속적 신관의 표현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모든 것에는 神이나 신명이 깃들어 있다는 관점과,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명계에서 미리 계획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무속의 신명관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무속에서는 인간이 신명보다 다소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증산의 신관에서는 인간이 신보다 우위에 있으며, 신명은 단지 조력자에 그친다는 것과, 무속에서의 신들은 대부분 가상적인 존재인데 비해 증산교에서 지칭하는 신들은 대부분 실제로 이 세상에 현존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5) 그리스도교적 측면 증산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예식을 본 후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西敎는 신명박대(神明薄待)가 심하므로 능히 성공치 못하리라”고 하며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마테오 리치를 칭찬하고 자기를 구천상제로 강세한 구세주로 자칭함으로써 기독교의 再臨主思想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하에서 서양과 그리스도교에 관한 증산의 시각을 각기 살펴본다. (1) 서양에 대한 시각 증산은 서양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대결을 지양하여 새로운 가르침으로 포용하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을 비를 내리게 하는 원천이며, 강력한 힘을 지닌 장소로 생각하고, 그들이 발명한 文明利器가 앞으로의 인류생활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긍정한다. 그러나 증산은 동양의 정신우위론에 입각하여 마테오 리치, 진묵대사라는 두 문화영웅을 통해 현실적인 서양문명의 우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전도활동과 불교승려인 진묵의 설화를 서양문명에 대한 종교적 설명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동양에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뒤에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로 인해 동양과 서양, 하늘과 땅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되었다. 이에 지하신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묘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현대의 문명이라.”(大巡典經 5:12)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좋은 세상을 꾸미려 하다가… 봉곡의 질투로 인해 죽은 뒤에 원을 품고 동양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건너가서 문화계발에 역사하였나니…(大巡典經 5-13) 여기에서 증산은 동양이 서양문화의 근원임을 역설하고 있다. 즉 서양은 동양 신명들의 도움으로 발전되었다고 보며, 기본적으로 천상 문명을 본받은 세계로 믿어진다. 현실적으로 발전한 서양문명은 실은 동양의 문명신과 도통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증산교인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또한 증산은 서양 문명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문명은 물질과 사리에만 밝아 교만과 잔폭(殘暴)을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써 모든 죄악을 거리낌없이 범행하니, 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三界가 혼란하여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도수를 어기는지라,…”(大巡典經 5:12) 따라서 전세계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고 해결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증산은 이것이 서양문명의 한계라고 보았다. 마테오 리치 신부와 진묵대사는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증산에게 구원을 호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양문명의 한계성에 대해 그는 동양과 서양이 맡은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양은 기예(技藝)의 역할을 맡았고, 동양은 조화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서양은 물질문명을 발전시키고, 동양은 조화로써 물질문명의 한계를 통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화로써 더 건전하고 건강한 문명으로 비약케 하는 것이 동양의 역할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증산은 서양세력을 물리쳐야할 세력으로 보고 있다. 동양이 서양의 나쁜 점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종교적 행동으로 서양을 물리침으로써 서양에 물드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러일(露日)전쟁을 붙여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치리라.”(大巡典經 4-9)라고 말했으며, 동남풍을 불게 만들어 일본이 승리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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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전통혼합적 측면 – 유교, 불교
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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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Ⅳ. 평가 1. 甑山敎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이다. 증산은 양반 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로 인해 학업마저 포기하고 머슴살이, 산판꾼 등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불일치로 인한 실조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실조의식은 그의 유력생활을 통해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에서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도 함께 성숙되었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은 국가 정체의 위기를 느낄 만큼 혼란한 상태였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의 위협과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암투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관리들의 민중수탈로 인해 일반 민중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신음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정체의 위기와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이 실패함으로써, 동학으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던 민중의 자아의식은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해 오히려 더 방황에로 접어들게 되었다. 관의 동학교도에 대한 색출과 처형은 삶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목격한 증산은 혼란한 시대에서 방향을 상실한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동학의 실패를 보고는 민중구제의 방법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현세적인 방법, 무력을 통한 방법으로는 성공치 못할 것으로 알고 종교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성종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화석화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동․서양의 교류로 인해 세계가 넓어짐으로써 이제는 어느 하나의 종교로는 안되고, 각 종교와 문화의 진액을 뽑아 하나로 뭉쳐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명을 주재하는 도술로써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불․선과 동학, 기독교, 민간신앙 등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大願寺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 조선사회의 제반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분석과 그 이전의 종교적 경험의 기초 위에서 극단의 종교적 경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이 구천의 上帝로써 이 세상의 혼란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온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내부의 심리내용을 외계로 투사(投射)시키는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심리적 과정은 E. Sapir의 말처럼 혼란한 사회에서 그것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존재 곧 증산 자신의 무력성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조건짓고 규제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궁극적이고 신성한 초월자를 경험하고 그 초월자와 자신을 의심없이 비합리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심리적 과정은 세계재건의 환상으로 전환된다. 불만스러웠던 과거는 멸망하고 새로운 유토피아가 전개된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는 그 세계를 향한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는 생각은 ‘과거의 열등과 우울과 불만에 차 있던 나’를 ‘앞으로 위대한 사명을 지닌 보람찬 존재인 나’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그는 경제적․신분적 불일치로 인한 좌절의식과 실조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노미적 상황에 빠진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得道를 하였다고 하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증산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심한 좌절의식에 빠져 있던 동학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증산의 카리스마를 통하여 동학혁명에서 성취하지 못한 사회구조의 개혁과 자신들의 욕구충족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추종자들의 욕구체계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이었던 것이다. 증산은 이러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한편, 그 욕구들을 하나의 민중사상(民衆思想)으로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종교사상(宗敎思想)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동학혁명을 통해 민중들이 실현하고자 하였던 平等, 平和, 民族主體의 欲求 등을 平等思想, 平和思想, 民族主體思想으로 체계화시켰고, 이것을 東學에서와 같이 직접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에 의해 실현시키려고 하기보다는 人存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이라고 하는 宗敎思想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볼 때 증산사상의 핵심사상인 人尊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 등은 증산의 새롭고 독특한 사상이라기 보다는 당시 일반 민중의 욕구를 종교적으로 體系化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증산교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 宗敎의 모습을 띤 大衆的인 解放運動이라 할 수 있다. 즉 後三國 時代의 견훤과 궁예의 彌勒革命 思想, 高麗末의 彌勒信仰 運動과 朝鮮時代 여환과 장길산의 彌勒革命 運動 등과 유사하나, 단지 다르다면 물리적 차원을 떠나 非世俗的인 次元인 宗敎的인 性格으로 轉換시켰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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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의 특성
5) 儀禮의 特性 (1) 한국 고유 제천의례의 전승이다. 증산교의 중심사상이 우리 민중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의례의 기본정신 종류 방법 등이 거의 민간 신앙 의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신앙의 대상이 상제로서의 증산으로 바꾸어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의례순서에서 位牌봉안 진설 분향 참신 고유 헌작 등으로 이어지는 순서나, 제천 의례 전후에 심신제계 음복 등이 과거 민간신앙에서 행해지던 洞祭나 山神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2) 致誠이 바로 신앙과 수도행위가 된다. 致誠때 행해지는 기도 주문 등이 바로 수도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3)致誠이 곧 포교방법이다. 치성에 한 번 참석하는 것 자체가 入道가 된다. 또 교파에 따라서는 새로 입도하는 사람도 바로 人道致誠이라는 의식을 거쳐 신자가 되고 있다. 의례에 있어 증산은 유교의 禮와 선령에 대한 제사를 강조했지만 祭禮陳設法은 묵은 하늘이 잘못 정한 것이라고 비판하였고, 喪服制度도 거지 죽은 귀신이 만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大巡典經 3:143) 대신 증산은 의례의 절차나 올리는 음식이나 禮服등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의례를 올리는 사람의 정성을 강조했다.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은 깨끗하고 맛있는 것이 좋은 것이지 그 놓여 있는 위치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증산교인들은 매일 淸水를 모시고 배례한 다음 주문을 외우는 일이 하늘(하느님), 구체적으로는 증산에 대한 의례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원시반본하는 증산교의 근본정신에 따라 전통을 중시함으로써 형식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절차가 까다롭고 많으며, 의식의 종류도 상당히 많아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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