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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형성과 종교활동
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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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에 이른 강증산
4) 得道 – 入山 修道를 통한 宗敎的 經驗의 極大化 전술하였듯이, 3년여의 유력활동을 통해 많은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습득한 증산은 1900년 가을 本家로 돌아왔다. 이 기간까지 증산은 우리 국가의 난국은 전 세계의 난국이요, 우리 민족의 고통은 전 인류의 고통임을 깨닫고, 특별히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 나라는 세계적인 대변란의 중심지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절망적인 대시련에 처한 이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도통공부(道通工夫)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귀가(歸家) 즉시 송주수련(頌呪修鍊)의 도통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때때로 호둔(虎遁)한다고 하며 밤낮 없이 동리(洞里)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광인으로 여겨 상대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타인으로부터 광인취급을 받게 됨으로써 그는 자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증산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소명의식의 발로로써 형성된 사회구제의 방법이 타인으로부터 경원시 당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겪고, 또 한번 자신의 정체위기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은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숙과정에서 대부분 거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증산은 자신이 아직도 도통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보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어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기 위해 1901년 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願寺)에서 입산수도를 하였다. 대원사에서 기도정념(祈禱正念)으로 求道하기 시작하여 7월 5일1)에 다섯 마리의 용이 불어내는 심한 폭풍우 가운데서 홀연히 광명과 지혜가 열려 천지의 대도를 깨달았다 한다. 증산교측의 주장에 의하면 증산은 천지대도를 깨달아 탐음진치(貪淫瞋痴)를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찰지리(下察地理)하여 중통인의(中通人義)한 도력(道力)을 갖추어 옛 성인들이 오르지 못한 큰 인격을 소유한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大巡典經은 비와 천둥과 번개, 지진과 치병(治病-앉은뱅이를 일으킴), 신명(神明)의 회산(會散) 등을 뜻대로 움직여 천지안의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2) 道를 얻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 증산은 그 해 겨울, 집에서 창문의 종이를 다 뜯어버리고 불을 때지 않은 냉돌방에서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홑옷을 입고 지내며, 무언가 괴상한 글과 그림을 백지에 그려서는 계속해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한다. 증산에 의하면 그것은 천지의 도수(度數)를 뜯어고치는 작업, 곧 천지공사(天地公事)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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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및 득도 전까지
靑年時代와 得道 이전까지 1) 결혼 증산은 21세(辛卯年)에 정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정씨 부인은 절름발이에다 눈은 아래로 보려면 위로 치켜 뜨게 되는 천바래기였다. 강일순은 첫날 밤이 아닌 그 다음날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도 사나워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정생활을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며 가정생활에는 등한시하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자.”고 하자,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있느냐?”하며 더욱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2)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불구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相對的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外地로 장기간 주유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서당 훈장 시절 그는 결혼 후 처가(妻家)에서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도중 1894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이 혁명의 실패를 예견(豫見)하고, 동학혁명군을 따라 남원, 인심, 전주, 청주, 공주 등지로 종군(從軍)하면서 싸움구경만 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이 되면 혁명군은 패하게 된다고 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말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동학혁명을 따라 다니며 동학혁명의 발전상황과 동학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욕구 등을 관찰한 증산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목격하고는 스스로 동학에 대신할 만한 大道를 창도하여 보겠다는 뜻을 이 시기에 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증산의 활동에 대해 大巡典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은 더욱 부패하여 세속은 날로 악화되고 관헌은 오직 태악(泰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란(虛亂)만 숭배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 진력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불안이 온 사회를 덮거늘 天師 개연(慨然)히 광구(廣求)할 뜻을 품어 유․불․선․음양식위(儒․佛․仙․陰陽識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3) 즉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失調解消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체계화된 민중종교가 不在할뿐만 아니라 기성종교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神明에 의한 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天主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주창(主唱)되고 있으나, 사실상 儒敎의 人道的인 것에 그쳐 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제세구민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莁),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神明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道術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達通할 수 있는 道通工夫를 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이미 도인(道人)이라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증산의 종교적 특성은 사회구조의 개혁방법에 대한 추구, 그러한 추구의 방법으로 제시된 종교적 방향에의 모색, 기성종교에 관한 모든 지식의 흡수,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소명의식의 발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4) 3) 유력(遊歷)을 통한 宗敎的 知識의 增大5) 여러 가지 서적을 탐독한 증산은 27세 되던 해에 더욱 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庚子년까지 3년동안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도통했다는 술객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1900년 30세 되던 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6) 유력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반 민중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욕구를 보다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지방으로의 유력은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관계로, 서울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서울은 외국과의 修交 이후 청, 일, 러시아, 미국, 이태리, 독일, 영국, 불란서, 네델란드 등 각국의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로의 건설, 광산의 채굴, 어업권의 확보, 각종 상업에의 종사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등을 포함하여 각국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천주교의 명동성당이 준공되고 改新敎의 교회와 병원 및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아관파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러일전쟁의 발생과 일본의 승리 예언, 한일 합방 및 그 후의 독립 예언, 마테오 리치의 언급 등 서교의 부분적 인용,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긍정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력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이 그의 종교적 성향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3년간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서구종교의 이질성, 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한 국가정체의 위기,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의 실태와 욕구 등을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구질서, 구체제 등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귀향하는 즉시 선령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살라 버린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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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 출생 및 어린시절 1
1. 出生 증산 강일순은 동학의 기운이 크게 무르익던 조선 왕조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년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의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진주이며, 부친 흥주(興周)씨와 모친 권씨(權氏)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9세를 일기로 1909년에 사망하였는데, 성(姓)은 강(姜)이요, 본명은 일순(一淳)이며, 호(号)는 증산(甑山)이다.1) 증산교에서는 그들이 上帝라 지칭하는 증산의 탄생, 곧 강세(降世)를, 증산이 이 세상에 미리 내 보낸 석가․예수․공자를 비롯한 聖者와 哲人들이 미리 알렸다고 한다.2) 증산의 태몽에 관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3) “모친이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1870, 庚午年 9월),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석달만에’ 낳았다.” “그를 낳을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며, 왼손바닥에 별무자(戊) 무늬가 있고 아래 입술안에 붉은 점이 있었다.” 2. 幼小時代 증산은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갖가지 비범한 행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구경했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해에 증산의 부친은 그 아들의 출중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하늘 천(天)자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여 그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하여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혼자서 태을 주문(太乙呪文)을 읽고, 七星經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부친에게 청하여 뒷뜰에다 별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근접을 금하고 하루 건너 암 꿩 한 마리와 견직물 두 자씩을 구해 들이더니… 2개월 후에는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거처했던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5) 이 뒤에 집으로 돌아와 자의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항상 장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 부친의 빚을 갚아 주거나, 모친의 잃어버린 모시 베를 찾아 준 일등의 기록도 多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증산이 열 살이 넘었을 때 하루는 그의 부친이 벼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와 닭의 무리가 벼를 쪼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새들을 쫓았다. 그것을 본 증산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계속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증산의 가정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의 부친이 부채(負債)까지 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빈곤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상류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빈곤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증산을 서당에 보냈고, 증산의 학문적인 소질은 남달리 뛰어나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그는 서당을 통한 수업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4-15세에 학업을 중지한 그는 사방을 주유하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머슴살이도 하였으며,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扶餘谷)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 깊이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6)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의 부친이 경제적인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은 신분적 지위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었고, 그것은 증산에게도 강조되었을 것이다. 머슴살이 및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을 더욱 영향을 깊게 하였으며, 동시에 증산은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그 당시에 극심했던 고부지방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 민중의 현실 및 그들의 욕구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7) 김은지: 증산교2 [02/03-16:33] 안나: 증산교2 [02/0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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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정치, 경제, 종교적 상황)
Ⅰ. 시대적 배경 증산의 성장과 활동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개인적인 환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 창시자로서의 증산의 성장과 활동은 그 시대 상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산이 출생한 1871년부터 그가 종교적 경험을 體系化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한 1902년까지 약 30년간의 시대적 상황을 그가 출생하고 성장한 전라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여기서는 개략적인 언급에 그치고, 증산의 종교적 경험에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은 이후에 언급한다. 1. 정치적 상황 조선의 19세기 전반기에 속하는 1801년 (순조 원년)부터 1863년(고종 원년)까지는 소위 세도정치에 의한 변태적 정치가 시행된 때였다. 이 시기의 정치는 주로 내정의 발전과 개혁보다는 외척이 주축이 된 정치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투쟁에 일관되어 있었다.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정권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과단성있는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그 후에 발생한 국내외적 여러 사건들은 그전보다도 정치적 상황을 더욱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증산이 출생한 1871년부터는 신미양요(1871년), 윤요호 사건(1875년), 병자수호조약(1876년), 미국·러시아·이태리 등 서양 제국에 의한 수교요구(1880년)등이 발생하여 일본과 채결한 병자수호조약 이외에도 미국, 영국, 독일(1882년), 이태리 러시아(1884), 프랑스(1886년), 청(淸-1899)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후 한일합방(1910년)까지는 약 32개의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자 일본을 비롯한 열강 제국의 세력과 문물이 국내에 밀어 닥치게 되고, 특히 권력 엘리트들은 보수 세력과 혁신세력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점차 그 농도를 더해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이라는 부수사건들을 발생시켰다. 또한 1892년부터 양성적(陽性的)으로 나타난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그 후 그들의 이념이 국내 정치 문제에 파급되어 동학혁명(1894년)으로 발전되었다. 증산이 태어난 해가 1871년이므로 증산의 나이 23세때 동학혁명을 맞았다는 것이 된다. 동학혁명은 갑오경장이라는 국내적 개혁과 청일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권력투쟁전(權力鬪爭戰)은 여전하여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은 그 농도가 더해 갔으며, 특히 외국세력에 의지하여 형성된 親淸, 親日, 親露의 신흥정치세력은 저마다의 권력신장에 열중하여 결국 을미사변(1895년)과 아관파천(1896년)이라는 국치적(國恥的) 사건을 발생시켰다. 결국 정치부재(政治不在)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871년부터 약 30년간의 정치적 상황은 국제적 영향과 국내적 권력계급의 갈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동을 가져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은 정책 결정자의 급격한 지위변동을 수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내 정책은 일관성을 상실하였고 국가의 정체위기는 극도에 달하였다. 따라서 서구문화의 이입(移入)을 통해 점차 개화되기 시작한 조선사회는 국내외적인 제 조건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반 민중의 정치적 소외현상은 가속화되었다.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계급의 비대화(肥大化)였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은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며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위에 정치구조상의 혼란에 기인한 관리들의 민중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반 민중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塗炭) 그 자체였다. 그 결과 각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부터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1894년 1월까지 30년동안에 전국에 걸쳐 41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특히 관리들의 수탈이 심한 전라도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동학혁명 직전인 1893년 11월에는 고부, 전주, 익산 등 3군(郡)에서 한꺼번에 발생하였다. 정부의 탄압도 이와 함께 거세어졌는데, 民亂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던 관계로 동학교도들은 관리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탄압이 심한 만큼 민중들의 저항도 거세어졌고, 결국 동학혁명의 기치(旗幟)를 높이 날리게 되었다. 이는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인 대중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민중의 열망과 욕구가 뭉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결국 외국군대의 개입과 동학조직 내의 분열, 무기의 원시성, 중간계급(소재산 소유자, 적당한 교육을 받은 자)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교도들은 재산을 압류당하고 극심한 탄압에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때 동학혁명은 초기에는 잠재되어 있던 일반 민중의 욕구를 극대화시켜 이에 참여할 경우 신정부의 수립과 복지사회의 건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지만, 이것이 실패함으로써 혁명에 가담한 일부 민중은 극대화된 욕구의 충족수단을 상실함하고 심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혁명의 부산물로 나타난 사회적 혼란 및 관군과 日兵, 민포군(民包軍) 등으로부터 받게 된 보복은 그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이 처음으로 발생하였던 전라도 지방이 더욱 심했고, 특히 전봉준이 봉기했던 고부(古阜-증산의 출생지)지방과 그가 군관과 최후의 결전을 했던 태인, 금구(金溝) 등지에서 더욱 심했다. 또한 1895년에는 유교적 전통사상의 단절을 뜻하는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각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의병들은 한때 위력을 떨쳤으나 1896년 국왕의 포고문과 선무작업(宣撫作業)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잔존(殘存)해 있던 의병들이 화적으로 전환되기도 하여 민중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쳤다. 3. 종교적 상황 동학혁명의 실패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혼란은 신흥종교로서의 기대를 모았던 동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와 허탈감을 갖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문호개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구문화는 국내의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1866년 대박해(大迫害) 이후 1878년부터 다소 탄압이 풀린 西學(天主敎)뿐만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온 신교(改新敎)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일반 민중들에게는 기독교 사상이 아직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래(在來)의 종교인 儒敎와 佛敎 및 道敎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지 못했다. 유교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반상차별(班常差別)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고, 불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되고 산으로 은거처를 찾는 등 일반민중에게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도교는 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에는 일반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화된 종교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 사이에 크게 성행한 것은 오히려 조선 초기부터 전해오던 정감록(鄭鑑錄) 사상이었다. 정감록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868년과 1870년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정감록에는 진인사상(眞人思想), 신도사상(新都思想), 승지신앙(勝地信仰), 남조선 신앙(南朝鮮 信仰)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진인사상이란 메시아적 왕의 출현에 대한 대망(待望)이고, 신도사상은 時運에 의해 낡은 왕조는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서서 새 서울을 세운다는 믿음이며, 승지신앙은 亂時에 피하기만 하면 절대 안전하다는 피난지에 대한 신앙이고, 남조선 신앙이란 낙원이 남쪽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정감록은 조선말기의 쇠약한 국가정체와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성행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히 갖추어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민간에 대두하게 됨으로서 민중의 조선왕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고, 그것은 동학혁명의 발생과 그 추진력에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열강의 침략 및 기성종교의 허약 내지는 미조직화에 의해 1894년 이후부터는 정감록이 더욱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의 종교적 문화적 상황은 사회구조의 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극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生의 혼란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을 제시하여 불안을 면(免)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표상체계(表象體系)와 확신체계(確信體系)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국의 영향에 의한 문화갈등현상은 기존 규범체계의 와해(互解)를 가져와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도덕적인 규제력을 상실한 이른바 아노미 상태(Anomi)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동학혁명이 전개되었고, 증산이 출생하고 성장하였던 호남지방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증산의 本家나 外家가 위치한 古阜 지방은 민란과 동학혁명이 발생한 지역으로서 지방관리의 착취와 수탈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2)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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