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본당 [한] 黃州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인훈리 원동(黃海道 黃州郡 龜洛面 仁訓里 院洞). 황주땅은 일찍부터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고장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바 있었다. 병인박해로 전멸된 황주지방의 신자촌들은 1890년대 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1898년 황주군에 첫 공소가 설정되었다. 공소 소재지는 삼전면 철도리(三田面 鐵島里)였으며, 소속 본당은 신천군(信川郡)의 청계동(淸溪洞)본당이고, 주임신부는 빌렘(Wilhelm, 洪錫九, 요셉) 신부였다. 당시 이 공소에는 54명의 예비신자가 있었다. 1899년 황주지방은 안악군(安岳郡)의 매화동(玫花洞)본당의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의 관할로 넘어갔으며, 이해에 황주읍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1902년 황주 지방은 매화동본당에서 분립, 본당으로 승격, 동년 5월 서울의 용산(龍山) 신학교 교수이던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 황주읍 남문(南門) 밖 외남부마을에 30간짜리 한옥성당이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황주본당의 관할지역은 황주군 전역과 봉산군(鳳山郡), 서흥군(瑞興郡) 일부였고, 창설 이듬해에는 관할 공소는 33개(황주군 28, 봉산군 4, 서흥군 1)에 달했으며, 총 교세는 1,246명 이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한기근 신부는 전교의 희망이 없는 황주읍을 작별하고 황주읍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적은동(三田面 外松里 積銀洞)의 김촌(金村)으로 본당을 옮겼다. 1907년에는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순회전교여행 길에 적은동본당을 방문하고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한기근 신부는 적은동본당 근처에 초가집 한 채를 크게 짓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해성학교(海星學校)를 개설하고 수년간 운영하였다. 한 신부는 본당 사목 외에 1906∼1911년까지 교구장 뮈텔 주교의 위촉을 받고 성서의 국역사업(國譯事業)에 참여하였다. 종도행전(宗徒行傳)[使徒行傳]의 번역을 끝마치던 1911년 9월, 한 신부는 적은동에서 원동(院洞)으로 본당을 옮겼다. 1913년 4월 한 신부는 서울 주교관의 경향잡지사(京鄕雜誌社)로 전임되고, 평북 비현(枇峴)본당에서 전교하던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원동에 부임하였다. 1913년 10월에 원동의 교우 김 알로이시오가 성당부지와 건축비 전액을 부담한 가운데 조선식 기와집에다 양식을 가미한 넓고 큰 성당을 완공하였다. 1915년 6월 김윤근 신부는 재임 2년 만에 강원도 이천(伊川)의 망답(望沓)본당으로 전임되고, 원동본당은 후임신부를 배정받지 못해 1918년까지 사리원(沙里院)본당의 이기준(李基俊, 토마스) 신부가 본당주임을 겸임하였다. 따라서 이 본당은 1918년까지는 비록 신부가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서울교구 내의 한 본당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1919년부터 사리원 본당의 관할 공소로 편입되고, 1939년에는 송림(松林)본당의 관할로 넘어갔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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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율 [한] 黃鍾律

황종율(1910∼1972). 정치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963년 재무부장관, 1966년 무임소장관, 1967년 체신부장관, 1968년 재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뒤 1971년 8대 국회의원(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교우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다윗회를 주도, 간사로 활동하였고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가톨릭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서울교구 제16차 꾸르실리스타로서 신심운동에도 앞장섰다. 1972년 1월 21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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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교황주의 [한] 皇帝敎皇主義 [영] caesaropapism

평신도 전제군주가 치하의 교회에 대해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며 교의(敎義)처럼 보통 교권으로 보류된 문제에까지도 이를 행사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 황제의 ‘최고의 제관’(pontifex maximus)으로서의 기능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기원하며 로마 황제에게 이식된 것으로 5세기 제논(Zenon) 황제 때 시작되어 유스티누스(Justinus) 2세 황제(재위 : 527∼565) 때 전성기를 맞았다. 황제교황주의는 그 뒤 1천년간 비잔틴 제국의 제정일치의 통치원리가 되었는데, 특히 1054년 동방이교(東方離敎) 직후 수세기간의 통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의 서부 유럽에서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분쟁은 상당한 부분이 이 통치 형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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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광 [한] 黃日光

황일광(1756∼1802). 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시오.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백정(白丁)의 신분으로 출생. 1798년 이존창(李存昌)의 인도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동생과 함께 경상도의 벽촌으로 이주하였다. 1800년 경기도 광주(廣州) 정약종(丁若鍾)의 분가(分家)에서 8개월간 머무른 뒤 상경하였다가 이듬해 체포되어 1802년 2월 2일(음 1801년 12월 30일) 홍주에서 김귀동(金貴同)과 함께 참수(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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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심 [한] 黃沁

황심(1756∼1801).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으로 본명은 인철(寅喆).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일명 端源)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로는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과 더불어, 조선 교회와 북경주교와의 연락 일을 담당하였다. 1794년 12월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북경으로부터 영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이 탄로되어 1795년에 윤유일, 지황이 잡혀 순교한 뒤로는 황심이 주로 북경과의 연락을 맡았다.

즉 1796년에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북경주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冬至使)의 하인 자리를 돈을 주고 사서 북경에 들어가 밀서를 무사히 전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옥천희(玉千禧), 김유산(金有山)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에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로 하는 성유(聖油) 등 성물을 가져와 주 신부를 도왔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강원도 춘천(春川)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황사영(黃嗣永)이 가까운 곳에 피신해 온 것을 알고는, 제천(提川)으로 그를 찾아가, 주 신부의 순교사실을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의 이 같은 사정을 북경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북경주교와 면식이 있는 황심의 이름으로 이른바 백서(帛書)를 쓰고, 황심은 이를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 위해 그해 9월에 백서를 받으러 다시 제천에 가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도 그 달 26일에 잡혔으며 황사영도 10월 3일에 잡혀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1801년 10월 24일 옥천희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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