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Haleluja’가 70인역 성서(聖書)에는 ‘할렐루야’로 번역되었고, 로마 전례에서는 ‘알렐루야’(Alleluja)로 사용된다. 암브로시오 전례에서는 ‘할렐루야’의 형태로 사용된다. ⇒ 알렐루야
할레르슈타인 [원] Hallerstein, Augustin von
Hallerstein, Augustin von(1703∼1771).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신부, 과학자. 중국명은 유송령(劉松齡), 자(字)는 교년(喬年). 유고슬라비아의 류블리아나(Ljubljana)에서 출생하였다. 1721년 예수회 입회, 오스트리아와 리스본에서 공부한 뒤,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738년 마카오에 도착, 1739년 건륭제(乾隆帝)의 명으로 북경에서 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46년 쾨글러(Ignace Kogler, 중국명 戴進賢)의 뒤를 이어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이 되어 천문역산서의 편찬을 책임 맡았고, 1766년에는 고가이슬(Antoni Gogeisl, 鮑友營)과 함께, 조선에서 온 동지사(冬至使) 홍대용(洪大容)을 만나 서학(西學)에 대해 토론하고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었다. 1771년 10월 29일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의상고성≫(儀象考成)[Kogler, Gogeisl 共著] 등을 남겼다.
한티
초기 교회 유적지. 순교자 묘소 소재지. 여러 사람이 함께 묻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한테’라고 했는데, ‘한테’는 경상도 사투리로 ‘함께’라는 말이다. 한테가 변하여 한티로 불리는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기호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와 정착한 신앙공동체 마을이다. 성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4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곳도 이곳이며, 1868년 포졸들에게 습격당해 쑥밭이 된 교우촌도 이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살던 수백 명의 교우들이 잡혀가 순교했으며, 그 중 서태순(요하), 이 곤자가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현재 한티 마을 입구에는 성가양로원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서 순례의 길을 시작한다. 1983년 이 곳에는 순례자의 집이 건립되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 위치.
한정흠 [한] 韓正欽
한정흠(1755∼1801). 순교자. 세례명은 스타니슬라오. 전라도 김제(金堤)의 가난한 양반집에서 출생. 전주(全州)의 먼 친척인 유항검(柳恒儉)의 집에서 유항검의 아들을 가르치며 살았고 유항검의 인도로 입교하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3월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全州監營)과 포청(捕廳)에서 신문을 받은 뒤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다 1801년 8월 26일(음 7월 18일) 출신지 김제에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한이형 [한] 韓履亨
한이형(1799∼184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라우렌시오. 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4세 때 입교하였고, 21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한 뒤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해 살았다.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입국 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와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丙午)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었고 체포된 그 자리에서 포졸들에게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라 포졸들이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을 오르는 예수를 묵상하며 백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포청에서도 체포될 때와 마찬가지로 심한 매와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9월 20일 최후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