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순 [한] 崔玟順

최민순(1912∼1975). 신부. 문인. 세례명은 요한. 1912년 10월 3일 전북 진안군 진안면 군하리(郡下里)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사제수업을 마친 후 1935년 사제로 서품되어 전북 정읍, 임실, 남원본당 등에서 주임신부로 사목하였고 1939년부터 1945년 초까지 전주 해성(海星)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2개월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聖神大學의 전신, 현 가톨릭大學] 교수로 전임되어 1948년 부학장, 1949년 도서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51년 대구교구 출판부장 겸 <천주교회보>와 <대구매일신문>의 사장으로 임명되어 이 신물들에 많은 논문과 호교론을 발표했고 이듬해 다시 성신대학 교수로 전임되어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가(聖歌)의 작사(作詞)외에 많은 시, 수필, 번역작품들을 발표하여 1960년 3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번역으로 제2회 한국 펜클럽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 8월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신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귀국, 1962년 성가수녀회 지도신부, 1963년 부천(富川) 소명(素明)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뒤 1965년 가톨릭 공용어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의 기도, 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작성했고 196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하였다. 1968년 구약성서의 시편(詩篇)을 완역했고 1974년에는 1967년부터 자신이 지도신부로 있던 가르멜회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1975년 8월 19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가톨릭대학 사제관에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평소 많은 수필과 시를 통하여, 또 특별강론이나 피정지도를 통하여 사제나 평신도들에게 영성(靈性)을 심어 준 영성신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존경을 받았었다.

저서로는 수필집 ≪생명의 곡≫(경향잡지사, 1954)과 시집 ≪님≫(성바오로출판사, 1955), ≪밤≫(1963), 그리고 유고집(遺稿集) ≪영원에의 길≫(가톨릭출판사, 1977)이 있으며 역서(譯書)로 단테의 ≪신곡≫(神曲) 중 지옥편(경향잡지사, 1957),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正音社, 1960),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성바오로출판사, 1965), ≪예수의 데레사≫, ≪완덕의 길≫(성바오로출판사, 1967), ≪성경의 시편≫(가톨릭출판사, 1968), ≪영혼의 성≫(바오로출판사, 1970), ≪십자가의 요한≫, ≪깔멜의 산길≫(성바오로출판사, 1971), ≪십자가의 요한≫, ≪어둔밤≫(성바오로출판사, 197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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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진 [한] 崔東鎭 [관련] 드게트

드게트(Deguette) 신부의 한국명. ⇒ 드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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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홍 [한] 崔德弘

최덕홍(1902∼1954). 제5대 대구교구장(大邱敎區長). 주교. 세례명 요한. 1902년 6월 2일 경북 대구에서 출생. 1914년 10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수업을 닦은 후 1926년 5월 29일 졸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제주 서홍리(西洪里)본당 주임신부, 1929년 6월부터 1936년 7월까지 제주본당 주임신부, 1936년 7월부터 1940년까지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 예수성심신학교 교수,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주교구 경리부장, 1944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목포(木浦)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고 1948년 12월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30일 주교로 성성(成聖)된 뒤 해성병원, 효성여대 등을 설립, 대구교구의 교육 · 사회복지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현재의 왜관대리구에 속해 있는 왜관 · 낙산(洛山) · 성주(星州) 지역의 관할권을 성베네딕토회에 위임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대리고(부산교구의 모체)를 설정하였다.

1953년 주교회의 군종신부단 지도주교를 역임하고 이듬해 11월 암(癌)으로 해성병원에 입원 중, 12월 14일 사망, 대구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경향잡지, 43권, 1006호(1949년 1월호); 47권 1042호(1955년 1월호) / 가톨릭日報, 제152호, 195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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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한] 崔南善

최남선(1890∼1957). 국학자. 역사가.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本貫)은 동주(東州)[鐵原]. 서울에서 관상감(觀象監) 기사(技師)이며 한약방을 경영하던 최헌규(崔獻圭)의 2남으로 출생.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졸업하고 1904년 국비유학생 소년반(少年班)의 반장으로 도일(渡日), 동경부립중학교(東京府立中學校)에서 3개월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가 1906년 다시 도일(渡日),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사부(高師部) 지리역사과(地理歷史科)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고 동지(同誌)에 자신의 신시(新詩)를 발표하였다. 1907년 모의국회(模擬國會)사건으로 제적당하자 귀국, 신문관(新文館)을 설치하고 1908년 잡지 <소년>(少年)을 창간, 한국 최초의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이광수(李光洙)의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첫 장(章)을 여는 한편, 휘문학교, 중앙학교, 경신학교에서 국사를 강의하였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고 1910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과 고전(古典)을 간행했고, 이어 1913년 <아이들 보이>, 1914년 <청춘>(靑春)지(誌)를 창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22년 10월 가출옥되어 이듬해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며 국사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 1925년 <동아일보>(東亞日報) 객원논설위원 등으로 잠시 언론계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27년 <불함문화론>(弗咸文化論)을 발표하고 총독부 주관 조선사편수위원회 촉탁위원,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강사를 역임한 뒤, 1938년 만주 신경(新京)의 <만선일보>(滿鮮日報) 고문,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설립한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2년 귀국하였고, 1943년 한국 유학생들에게 학병 권고의 강연을 위해 도일(渡日)하였다. 1944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다시 국사연구에 전념하다가 8.15광복을 맞고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이광수와 함께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나 곧 병보석되었고 그 뒤 해군전사편찬위원회(海軍戰史編纂委員會) 촉탁위원, 육군대학 강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5년 가을부터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956년 11월 17일 개종(改宗)하고 개종 당일 라디오방송과 <한국일보>(韓國日報)에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나”라는 글을 발표, 가톨릭 사상(思想)의 포용성, 역사성, 진보성 등을 언급하고 자신이 불교에서 개종한 이유를 밝혀 학계와 종교계는 물론 일반대중들에까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사망, 경기도 양주(楊洲)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시조집 ≪백팔번뇌≫(白八煩惱), ≪시조유취≫(時調類聚), 수필 <심춘순례>(尋春巡禮),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 <조선유람가>(朝鮮遊覽歌), <금감예찬>(金剛禮讚), 그리고 역사서로 ≪조선역사≫(朝鮮歷史),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국난극복사≫(國難克復史), ≪삼국유사해제≫(三國遺事解題) 등이 있다.

[참고문헌] 洪一植, 六堂硏究 / 洪以變, 六堂 崔南善의 一面 / 趙容萬, 崔南善, 韓國의 人間像, 第6卷 / 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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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한] 崔京煥

최경환(1805∼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프란치스코.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또는 치운.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崔良業)의 아버지. 충청도 홍주(洪州)의 다락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한편 1836년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을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1839년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 걸려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 포청옥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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