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한] 講論 [라] homilia [영] homily [관련] 설교

설교를 뜻하는 한국 천주교의 고유용어.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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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영 [한] 姜道永

강도영(1863~1929). 서울교구신부. 세례명 마르코. 서울출생. 고모 강마리아의 권면으로 입교(入敎)한 뒤 한문을 공부하던 중 블랑(Blanc, 白主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83년 4명의 신학생과 함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다가 1892년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龍山)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에서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 정규하(鄭圭夏, 레오)와 함께 사제로 서품, 그 해 6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미리내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 선종할 때까지 34년간을 그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당시 안성(安城) 일대에는 동학혁명군, 의병(義兵)들이 많이 몰려 있었고, 또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과 이에 이어 발생한 아관파천 등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으나 선교에 전념, 한때 안성, 양성(陽城), 용인(龍仁), 진위(振威), 수원(水原), 이천(利川) 등지까지 관할하였다. 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묻혀있는 산을 기증받아 교회묘지를 조성하고 1928년 김대건 신부 묘소옆에 기념경당을 설립하는 한편 외교인들에게는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등 교우, 외교인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목하였다. 1929년 3월 12일 공소 순방길에서 걸린 열병으로 인해 67세로 선종, 34년 동안 성직생활의 전부를 바친 미리내에 안장되었다.선종 후 장례미사에는 800여명의 교우를 비롯하여 안성군수를 포함한 100여명의 외교인들이 참석하였으며 외교인들은 강성삼 신부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건립하려 하였으나 교우들의 권고로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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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본당 [한] 江界本堂

1933년 평북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東部洞)에 창설되어 1947년 폐쇄된 평양교구소속 본당. 강계군과 희천군(熙川郡) 일대를 관할하며 만포(滿浦), 별하(別河), 전천(前川), 개고(价古) 등의 공소를 두었다. 강계지방은 1926년 메리놀회의 캐시디(Cassidy,姜)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후 1931년 제2대 평양교구장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파견한 전교회장 이병모(李炳模)의 열성적인 전교로 인해 교세가 신장되어 1933년 본당으로 창설되었고, 초대 주임신부로 메리놀회의 듀피(Duffy, 都) 신부가 부임, 성당을 건축하고 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강계 인근에 만포, 별하, 전천, 개고 등의 공소를 창설하고 1937년에는 빈민아동 교육기관인 소화학원(小化學院)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1938년 6월 듀피 신부가 신리본당으로 전임되자 강계본당은 중강진본당 관할로 되었고 1942년 의주본당 관할, 1943년 기림리본당 관할로 되었었다가 1944년 4월 홍도근(洪道根)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6년 9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한도준(韓道俊) 신부는 이듬해 3월 소화유치원을 개설하고 본당 발전에 힘을 기울였으나 1949년 1월 한도준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5대 주임 석원섭(石元燮) 신부가 부임 6개월 만인 1949년 7월 8일 강계정치보위 부원들에게 체포되고 이튿날 성당과 사제관 및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강계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부인들의 모임인 부인회, 미혼여성들의 모임인 성체회가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는 소화학원과 소화유치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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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품 [한] 講經品 [라] lectoratus [영] lectorate [관련] 칠품

7품 중의 제2품급으로서 성당 안에서 성경과 기도문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을 주기 위하여 주어지는 품. (⇒) 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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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포사건 [한] 江景浦事件

교안(敎案)의 하나로서 1899년 4월 4일 충남 강경에서 그 곳 주민과 나바위본당 주임 베르모렐(Vermorel, 强若瑟)이 외교인 조흥도(趙興道)에게 소금을 사고 값을 지불하지 못해 시비가 일어남으로 해서 비롯되었다. 김치문이 베르모렐 신부를 찾아가 조흥도가 천주교인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호소하고 물러가자 베르모렐 신부는 즉시 조흥도를 잡아들여 진상을 물었다. 조흥도가 이를 부인하자 김치문과 대질시키기 위해 김치문을 수소문해 찾는 한편, 그날 밤 조흥도를 한 객주에 잡아 두었다. 이튿날인 4월 5일 베르모렐 신부의 처사에 흥분한 군중들이 강경과 황산에서 밀려와 복사(服事)와 마부에게 폭행을 가하고 베르모렐 신부는 은진군수(恩津郡守)를 찾아가려 했으나 가는 도중 군중들에 의해 다시 강경포로 끌려왔으나 은진군수를 만날 수 있어 그 날밤 무사히 나바위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베르모렐 신부의 귄한을 모르는 전주(全州)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는 4월 6일 서울 주교관에 베르모렐 신부의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보두네 신부의 전보를 받은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외부(外部)에 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외부에서는 충남과 전북의 관찰사에게 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명령, 충남 관찰사 정주영(鄭周永)이 군대를 이끌고 강경포로 갔으나 베르모렐 신부는 이미 귀환했고, 소요도 진정되었으므로 군대의 철수를 지시하고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보고했고, 외부에서는 이를 다시 프랑스 공사에게 통첩하였다. 그러나 은진군수가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 중, 베르모렐 신부는 상해(傷害)당한 일이 없다는 것에 베르모렐 신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프랑스 공사를 통해 외부에 항의하였으나 외부에서는 조흥도의 무리가 조흥도가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구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다만 기물을 부수고 여럿에게 중상을 입힌 것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엄히 다스릴 것이고 베르모렐 신부도 죄 없는 평민을 잡아들여 구금시킨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프랑스 공사는 다시 항의하고 주모자의 처벌과 손해배상, 지방관의 견책을 요구하며 한성재판소에 소송을 제기, 사건은 교회측과 정부측 간의 문제로 확대되어 6월 7일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을 시작하여 7월 10일 주모자 최성진, 윤성여 등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고 일부는 방면되었다. 그러나 최성진, 윤성여 등이 불복, 평리원(平理院)에 상소했고, 프랑스 공사도 일부 범인들을 석방한 것에 대해 상소, 결국 10월 5일 평리원에서는 최성진과 윤상여에게 태장 1백 대와 징역 15년, 천장옥에게 태장 1백 대와 징역 10년의 최종 판결을 선고하여 사건은 6개월 만에야 마무리짓게 되었다. 최종판결 후 곧 교회의 요청으로 최성진, 윤성여, 천장옥 등은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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