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독일 교회와 국가 사이의 입법에 대한 이론. 혼트하임(John Nikolas von Hontheim, 1701~1790)에 의해 유스티누스 페브로니우스(Justinus Febronius)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교황령과 로마 교황의 적법적 권리; 분열된 그리스도교도의 종교적 일치를 위해 씌여진 책≫(1763)에서 구체화된 국교회 사상과 공의회 지상주의의 한 가지이다. 여기서 교황을 교회의 수뇌, 교회 행정 및 신앙과 도덕의 감독자로 인정하는 한편 중세의 세속재산의 증가를 공격하였다. 교회문제는 가능한 한 교회와 민간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거짓 법령에 의한 교황의 모든 주장을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즉 천국의 열쇠의 기능은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교회에 부여되고, 그 집행을 위해 성직자가 선택된 것이며, 교황은 이들 성직자의 수위(首位)에 있긴 하지만 교회 전체에는 종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교황은 공의회 밑에 위치하며 신앙문제의 결정권은 없다. 교회 전체만이 무류성(無謬性)을 갖는다. 주교의 평등한 권능은 교황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계몽주의, 공의회 수위설, 국교회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황 글레멘스 13세는 1764년 혼트하임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요셉 2세와 투스카니의 레오폴드 2세 등의 평신도 통치자들은 이 이론을 지지하였다. (⇒) 교회와 국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 [라] Perpetua et Felicitas
Perpetua et Felicitas(?∼202?). 성녀. 축일은 3월 7일(1969년 이후). 카르타고의 순교자. 순교 당시 페르페투아는 아들이 하나 있는 귀부인, 펠리치타스는 임신중에 있는 노예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의 박해 때 다른 3명의 예비자와 투옥, 감옥에서 세례받은 뒤 투기장에서 참수당하였다. 부친은 페르페투아에게 여러 차례 배교를 종용, 결국 실패하였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수난사화≫(Passio Perpetuae et Felicitatis)는 대부분 페르페투아 자신(3장∼10장)과 같이 처형당한 이들의 사제 사투루스(Saturus, 11∼13장)에 의해 씌어졌는데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에 의해 편집된 듯하다. 그들과 다른 예비자들의 감옥생활과 순교, 그리고 페르페투아와 사투루스의 환시(幻視)에 대해서 담고 있는데 당시 카르타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기록으로 순교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페르시아 [원] Persia
이란 고원(高原) 서쪽에 위치한 서남 아시아 국가.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고 개칭하였는데 이란은 유사(有史) 이전에 인도 게르만인에 속하는 이란인과 인도인의 원래 호칭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1세기에 시리아로부터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졌다. 성령 강림(降臨)의 목격자 중에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도 있고”(사도 20:9)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시리아계의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72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에데사의 사도였던 아다이(Addai)가 그 제자 아가이(Aggai)와 마리(Mari)를 데리고 최초로 페르시아에 포교하고 거기에 신자단체를 세웠다고 한다. 아르베라의 연대기(年代記)에 따르면, 224년경 티그리스강 유역에 베트 슬로크(Bet-Slock) 등 주교좌(主敎座)가 20곳 이상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위치를 볼 때 그리스도교는 이교도나 위정자의 박해의 우려가 적은 산골 깊숙이 들어간 곳이었다.
3세기 중엽에는 큰 도시에도 주교가 나오고, 샤프르 1세(Sehapur I, 재위 : 241∼271) 왕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큰 증가세를 보였다. 로마제국은 한 때 거의 그리스도교 일색인 케레시리아주(州)로부터 주교까지 포함해서 온 마을사람을 포로로 하여 페르시아의 이주시킨 일도 있다. 그래서 4세기 초 페르시아의 웬만한 곳에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콘스탄티누스대제가 샤프르 2세에게 보낸 편지, 에우세비오 교회사 VIII 12). 수도인 셀레우키아 크테시폰에는 대주교가 있고, 교계(敎階)제도까지 실시되었다. 그러나 3세기에 사산 왕조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정하면서부터 신앙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특히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 로마를 적대시하는 페르시아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42년에 이르자 갑자기 전국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소조메누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이때에 총대주교를 비롯하여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만 하여도 1만 6,000명에 달하였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수는 늘었는데 5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포교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와 몽고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페르시아는 642년 아랍인에게 패하여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13∼14세기에는 몽고인의 압제하에 살았고, 1387년 오스만터키의 정복을 받았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고, 사파비(Safawi, 1502∼1722년) 왕조는 이슬람교의 시아파(派)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와 같은 풍토에서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등이 17세기를 통하여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박해도 당하였다. 특히 18세기에 나디르(Nadir, 1736∼1747)의 박해로 그리스도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750년 이 나라에 남은 사제는 3명에 불과하였다. 1840년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포교는 라자리스트회에 맡겨지고, 1874년에는 독자적인 교황사절(이전에는 메소포타미아에 속함)이 파견되었다. 1953년에 공사(公使)로 승격되고, 1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포교 근거지 40곳 중에서 절반은 재건되었다. 이란에는 1982년 현재 약 1만 9,0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고 4개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다.
페르비스트 [원] Verbiest, Ferdinandus
Verbiest, Ferdinandus(1623∼1688).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중국명은 남회인(南懷仁), 자(子)는 돈백(敦伯). 164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벨기에, 스페인, 로마 등지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선교사로서 미국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했으나 1657년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659년 동회 선교사 마르티니(Martini 또는 Martin, 街匡國)와 함께 중국에 입국, 섬서(陝西) 지방에서 전교하였다. 1660년 청(淸)의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북경에 들어가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을 도와 천문역산류의 책을 편찬, 강희제에게 등용되어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郞), 중국성구회장(中國省區會長),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1월 28일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교요서론≫(敎要序論, 北京 1669), ≪성체답의≫(聖體答疑), ≪도학가전≫(道學家傳, 北京 1686), ≪고해원의≫(告解原義, 北京1730), ≪곤여전도≫(坤輿全圖, 北京 1674), ≪곤여도설≫(坤輿圖說, 北京 1672), ≪의상지≫(儀象志, 14권), ≪의상도≫(儀象圖, 2권, 北京 1673)외 다수가 있다.
페루 [원] Peru
페루는 북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 브라질과 볼리비아, 남쪽으로 칠레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면적 128만 5,216㎢에 인구 약 1,823만명(1982년 추계)이다. 가톨릭은 스페인 내란이 종식되기 전(1537∼1554)에 이 나라에 들어왔다. 여러 수도단체에서 이 나라의 포교를 담당했지만 그 방법은 엇비슷하였다. 인력이 부족하여 스페인말을 할 줄 아는 인디언을 고용하여 사제일을 돕도록 하였다. 교회의 선교사업에 도덕적 또는 경제적으로 국가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어린이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성인들에 대한 포교는 대단히 어려웠다.
페루 교회를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주교회의이다. 모두 8차나 열린 회의 중에서 첫째(1551∼1552년), 둘째(1567∼1568년), 셋째(1582∼1583년), 여섯째(1772∼1773년)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개연성(蓋然性)에 관한 문제였다.
페루 자국민으로 하여금 사제 일을 맡도록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지배적이지만, 또 사실 인디언들이 그리스도교 관습에 잘 적응하고 여러 방면에 재능도 뛰어나지만 아직도 원주민이 사제가 되는 데 대하여 이상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 인디언 출신의 사제로는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자는 1982년 현재 약 1,685만명에 1,201개소가 넘는 본당을 거느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