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롱 [원] Feron, Stanislas

Feron, Stanislas(1827∼1903).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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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시 [원] Perosi, Lorenzo

Perosi, Lorenzo(1872∼1956). 이탈리아의 가톨릭 성직자, 작곡가. 1895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 성가대장에 임명, 1898년에는 시스티나 성당 성가대장이 되어, 그 곳에서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을 고전적 정신에 의해 정비하였다. 이것이 성 비오 10세가 발표한 교황자의교서(Motu proprio, 1903)의 발표동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1905년 성 비오 10세의 칙명으로 종신 ‘교황 성당 악장’이라는 최고지위를 받았다. 그는 많은 수난곡과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는데, 그것들을 전례적(典禮的)인 라틴어 성서에 의한 대화라기보다는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적인 스타일에 의한 것이며, 더구나 단순하고도 장엄한 합창과 독창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로써 정리한다는 그 특유의 새 수법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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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원] Ferreol, Jean Joseph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생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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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신학교 [한] 彼南(濱榔)神學校 [프] College Generale de Pinang

파리 외방전교회가 1807년에 세움 신학교로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Penang 혹은 Poulo-Pinang)에 있었다. 방인성직자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1665년경부터 당시 샴왕국의 수도였던 유타이어(Juthia)에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박해와 전쟁으로 베트남, 인도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807년 페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페낭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수업을 받았다.

마카오에 유학시켜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를 양성하는 데 성공한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비교적 완화된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신학생 파견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854년 메스트르(Maistre) 신부는 이(李) 바울리노, 임(林) 빈첸시오, 김(金) 요한 등 세 사람을 선발, 페낭으로 유학보냈고, 1858년에는 다시 세 사람을 파송하였다. 그 뒤 병인박해(1866년)로 정세가 긴박해지자 신학생파견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점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키로 하고 1882, 1883, 1884년의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유학보냈다. 이 가운데 강성삼(姜聖參), 강도영(姜道永), 정규하(鄭圭夏), 한기근(韓基根), 김성학(金聖學), 이내수(李廼秀), 김원영(金元永), 홍병철(洪秉喆), 이종국(李種國), 김양홍(金洋洪), 김문옥(金紋玉), 김승연(金承淵) 등이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들은 인종과 풍습이 다른 10여 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과정, 철학과정, 신학과정을 공부하였고, 이 중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12명은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가 다른 페낭에 유학한 신학생들은 기후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고, 심지어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있었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교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학교를 설립한 한국 천주교회는 페낭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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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 [한] 八部 [라] Octava [영] Octaves

축일을 지내고 나서도 그 분위기가 지속되는 팔일간(八日間)을 말하며, 이는 축일 당일도 포함시켜 계산한 기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팔부를 지내는 축일이 대단히 많았으며 팔일 동안 매일 미사와 성무일도에서 그 축일을 연장하여 기념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를 개정한 결과 예수성탄 대축일과 예수부활 대축일만 팔부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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