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iner, Augustin(1804∼1874). 역사학자이며 교회법학자. 폴란드 브로클로(Wroclaw)에서 출생. 안톤(Johann Anton)의 영향으로 가톨릭교회를 떠났으나 라므네(H. Lamennais)와 라이사흐(K.A. von Reisach) 추기경의 친분으로 인하여 회개하고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와 비오 9세로부터 역사학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바티칸 고문서관(Vatican Archives)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1850년) 마침내 그 관장이 되었다(1855년). 그의 저서들 중 ≪Geschichte des Pontifikats Clemens XIV≫(Paris 1853)는 교황 비오 9세의 지시에 의해 저술한 것이며 여기서 예수회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타시아노 [라] Tatianus
Tatianus(110∼?).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이며 영지주의자. 시리아 동부에서 출생. 150년경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니시미티스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에 개종하여 순교자 유스티노(Justinus)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유스티노와 함께 이교도의 오전(誤傳)에 대항하여 복음서의 원전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고함≫에서 유스티노와 대조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유스티노는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에 경의를 표하는 반면 타시아노는 이교도의 철학에 대해 경멸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172년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시리아로 돌아와 후에 ‘절제파’(Encratites)라고 불린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가 쓴 ≪Diatessaron≫은 매우 유명하여 15세기까지 시리아 교회의 기도서로 쓰였다.
타벨라 [원] Tabella
서울 용산 신학교에서 한국인 성직자를 대상으로 1912년부터 대략 1937년까지 라틴어로 간행한 월간잡지. 완전한 제호는 <예수성심의 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로서 우리말로는 ‘예수 성심지(聖心誌)’란 뜻이다. 처음에는 17cm×22cm 크기의 16면 혹은 20면의 등사판으로 발행되다가 1921년에 가서야 인쇄본이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나자렛인쇄소에서 인쇄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수록된 내용으로는 로마소식, 세계교회소식,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의 소식, 신학교의 소식을 싣는 소식란과 이단 반박의 역사, 토론, 강론지침, 과학란 등의 학문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그 폐간 연도를 1937년경으로 보는 것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1937년 6월호를 폐간호로 본 때문이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용산신학교에서 1935년부터 부록(Supplementum)이란 명칭으로 복간하였는데, 이는 홍콩에서 편집되고 간행되는 <타벨라>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10∼15면 정도로 발간되던 이것 역시 언제 폐간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 잡지는 무엇보다도 일정(日政)시대의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교회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타르시치오소년회 [한] ∼少年會
1930년 간도(間島) 용정(龍井)본당에서 창설된 소년단체. 회원들은 주로 미사에 복사(服事)하는 소년들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얼마 뒤 소녀들을 위한 ‘데레사회’가 조직되자 두 단체를 연길교구 내 각 본당으로 보급시키려는 용정본당 주임 랍(Rapp, 朴) 신부의 노력에 의해 교구 단위의 단체로 확대되어 ‘타르시치오소년회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31년 8월 제1차 연합대회가 미사성제를 주제로 간도의 대령동(大領洞)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12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 약 15명이 참가, 공동제헌, 제헌정신의 일치를 통한 청소년의 일치, 성가의 의의, 고대 그리스도교 봉헌예절의 재현 등 소주제를 통해 미사성제의 참뜻을 익혔고 그 뒤 대회장(大會長)이었던 아펠만(Appelmann, 裵) 신부에 의해 회지(會誌) <타르시치오회보>가 간행되었는데 <타르시치오회보>는 1931년부터 4년 동안 간행되다가 <가톨릭소년>으로 발전하였다.
클리어리 [원] Cleary, Patrick
Cleary, Patrick(1896∼1970).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성(韓國性)은 길(吉). 1923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북 의주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번(Byrne, 方) 신부, 모리스(Morris, 睦) 신부와 함께 평양교구 창설을 준비했고, 1927년 평양 교구가 창설된 뒤에는 관후리본당 주임신부, 1928년 마산본당 주임신부, 1931년 중강진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1933년 휴가차 잠시 귀국했다가 돌아와 1935년 중강진본당, 1938년 관후리본당, 1940년 기림리본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기림리본당에서 사목중이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평양교구에서 일하던 메리놀회의 모든 성직자와 함께 일제(日帝) 당국에 체포되어 이듬해 강제 추방되었으나 광복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6.25전쟁 중에는 유엔군을 따라 북진, 수복지역인 원산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하였다. 그 뒤 1951년 신병치료차 하와이로 건너갔고 1952년 다시 미국 본토로 돌아가 생활하다가 1970년 9월 6일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