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본당 [한] 長城本堂

광주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모든 성인. 전남 장성군(長城郡) 북이면 사거리에 위치한 사거리 공소는 조선왕조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피난 온 후예들이 노령산맥(蘆嶺山脈)의 방장산을 중심으로 생활한 신자들로써 구성되어 있었는데, 1896년 전북 김제군(金堤郡) 수류본당(水流本堂)이 설립됨으로써 차차 수류로 다니면서 성사를 보았다. 수류는 1935년에 본당이 설립되어 장성본당보다 3년이나 일찍 본당이 된 곳이지만, 지금은 장성본당 관할의 공소로 되어 있다. 1935∼1937년에 나주군 노안면(羅州郡 老安面) 양천리본당(良川里本堂)에서 자주 내왕하던 이곳 장성에 공소가 설치된 것은 1937년 4월이었다. 초대(1937∼1941년) 게라티(B. Geraghty. 池) 주임신부 때인 1937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을 주보로 하여 성당이 준공되었고 3대(1941∼1944년) 스위니(A. Sweeney, 徐) 주임신부가 사거리본당에서 부임해 왔는데 그는 일정(日政)의 탄압으로 한때 형무소에 감금(1942. 8)되기도 했고, 교구장의 금족령(1942. 9)을 받기도 하였다.

4대(1944∼1945년) 감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 5대(1945∼1953년)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신부를 거쳐 6대(1953∼1960년) 우즈(F. Woods, 禹) 신부 때인 1954년 4월에 성당 건물 25평을 증축하였다.

7대(1960. 7. 11∼1963년) 밀레니(F. Mullany, 卓) 신부 때인 1961년 10월 25일에는 ‘포항 예수 성심수녀원’ 분원이 설치되었고, 8대(1963. 6. 20∼1964년) 도허티(J. Doherty. 洪) 신부를 거쳐 9대(1964. 11. 19∼1967년) 모리시(M. Morrissey, 牟) 신부 때 ‘성모유치원’을 설립(1966. 6. 9)하였다. 이어 10대(1967. 2. 7∼1967. 8) 맥폴리(B.M. McPolin, 睦) 신부, 11대(1967. 8. 21∼1968. 9) 오순탁(베드로) 신부, 12대(1968. 9∼1971년) 김용배(金容培, 안드레아) 신부 때인 1968년 10월에 본당 사도회가 발족하였다. 13대(1971. 10. 25∼1975년) 이천수(李淺水, 나자로) 신부, 14대(1975. 11. 7∼1978년) 고재영(高在榮, 야고보) 신부를 거쳐 15대(1978. 1. 11∼1983년) 김형수(金炯秀, 비오) 신부 때에 와서는 1982년 6월 8일 연건평 215평의 신축 본당이 준공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현재 광주교구 관하에 있는 장성본당의 주임신부는 16대(1983. 2. 7∼현재) 김승희(金昇熙, 다니엘) 신부이고, 신자수는 1983년 12월말 현재 2,800명, 예하에 두고 있는 공소는 9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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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한] 長上 [라] superior [영] superior

라틴어 ‘superius’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superior’란 말은 ‘∼보다 상위(上位)에 앉은 자’란 의미를 가진 말이다. 교회에서 장상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권위를 가진 인물을 통칭하는 말로, 교회의 위계제도에 따라 ‘교회의 장상’(ecclesiastical superior)과 ‘수도회 장상’(religious superior)의 2종류가 있다. 교회의 장상과 수도회 장상이 겸임되는 수도 있으나 보통 양자는 별개의 인물로 구별된다. ‘교회의 장상’은 재치권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 교회의 최고 장상은 교황으로 전교회에 대한 재치권을 가지고 추기경, 대주교, 주교는 관할지역의 사제와 신자에 대한 재치권을 가지며, 마지막으로 사제는 신자에 대한 재치권을 가진 장상이다. ‘수도회 장상’이란 수도회를 다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그의 권한은 교회의 일반법과 수도회칙에 의해 규정된다. 수도회 장상은 수도회 내의 모든 회원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면속 성직자수도회의 장상은 교회법상의 재치권도 가진다. 장상은 고위장상과 하위장상으로 나누어지며 고위장상은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수도회 총장, 관구장, 대수도원장 등이 속하고, 후자에는 사제, 수도원장, 분원장 등이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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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화 [한] 張炳華

장병화(1912∼1990). 주교, 제2대 마산(馬山) 교구장. 세례명 요셉. 경북 대구(大邱)에서 출생.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 철학과를 거쳐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경남 문산본당 보좌신부, 1939년 경남 진영본당 주임신부, 1940년 대구 계산동본당 보좌신부, 1942년 경남 충무본당 주임신부, 194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1949년 대구교구 재정부장 등을 역임했고 1954년 벨기에 루뱅대학에 유학, 사회학을 전공하고 1956년 귀국하여 진해 중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였으며 1957년 부산교구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부산교구로 입적되어 부산 중앙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중 1960년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어 1963년 몬시뇰로 승임되었다. 1968년 제2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7일 로마에서 주교 성성(成聖)되어 현재까지 마산교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마산교구장으로서 마산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는 이외에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의 위원과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가톨릭 간호협회, 한국가톨릭 여성연합회, 한국가톨릭 의사협회 등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장병화 주교는 1990년 8월 3일 선종하여 경남 고성군 이화공원 묘원 내의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재 마산교구 제4대 교구장은 2002년 11월 11일 착좌한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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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의 [한] 長白衣 [라] alba [영] alb

사제(司祭)가 미사 때 개두포 위에 입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긴 옷.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어깨에서 발등까지 내려오는 소매 없는 평상복에서 유래되었는데, 로마제국 초기에는 넓은 소매를 달아서 입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장백의가 되기까지 성직자들이 계속 착용해 왔는데 수단을 가리기 위해 길이가 길어졌고 무릎을 꿇을 때 용이하도록 폭이 넓어졌다. 장백의는 허리부분을 띠로 묶어 끌리거나 벌어지지 않게 한다(띠 없이 입을 수 있는 장백의도 있다). 장백의가 평복의 목을 다 덮지 못하면 장백의를 입기 전 개두포를 착용해야 한다. 장백의를 조금 짧게 변형시킨 중백의로 장백의를 대신할 수 있으나 제의(祭衣)를 입게 될 때와 재의 대신 영대를 하게 될 때, 영대와 함께 부제복을 입을 때는 대신 할 수 없다. 장백의는 사제가 미사성제 때 가져야할 육신과 영혼의 결백을 상징한다. 사제는 장백의를 입을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주여, 나를 결백하게 씻으시어 내 마음을 조찰케 하시고 고양(羔羊)의 피로 결백하게 되어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또한 장백의는 고대 교회의 영세자들이 영혼의 결백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 토요일부터 부활절 다음 주일(사백주일)까지 1주일 동안 입었다. 현재는 사제 외에 성채분배권자도 예식 중에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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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 [한] 張勃

장발(1901∼2001). 서양화가, 한국의 성화(聖畵) 개척자. 세례명 루도비코, 호는 우석(雨石). 인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이다가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9년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지도한 고려화회(高麗畵會)에서 양화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그때 양화가가 될 뜻을 굳혀 1920년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다음 컬럼비아 대학 미술과에 입학, 1925년에 졸업하였다. 당초부터 그는 성화를 그릴 목적으로 있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김대건 신부>[유화 반신상, 천주교 서울 대교구 소장]는 현존하는 그의 가장 초기의 성화이다. 그 후 그는 서신을 통해 독일 뮌헨의 그리스도 미술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그 협회의 기관지인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che kunst)을 구독하여 독일의 엄격한 보이론파(Beuron)의 성미술 정신에 감화를 받았다.

1925년 7월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거행된 79명의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 전에 형제인 장면(張勉)과 더불어 치명복자(致命福者) 친족대표로 미국에서 직행하여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명동성당의 대작인 <14종도상(宗徒像)>을 위촉받고 그렸다. 같은 시기에 주위의 요청으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소장)도 그렸다.

그 수법은 전형적인 보이론풍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널리 알려져 있는 1928∼1929년 무렵 제작한 <복자 김대건 신부상>(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은 다분히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와 한결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프랑스 나빌파(Nabis) 화가 드니(M. Denis)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장발은 여러 성당에서 거듭 성화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때의 작품 중 신의주성당 벽화 <성령강림>(聖靈降臨, 1928), 평안북도 비현(批峴)성당의 <예수 성심상(聖心像)>(1935),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1945)는 그의 대표적인 역작이었으나 광복 후의 국토분단과 북한지역의 공산화 및 6.25 전쟁의 참화 때문에 <성모영보>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앞에 든 성화 외에도 평양 서포(西浦)의 성모(聖母)수녀회의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1940년 무렵)과 서울 가르멜 성당의 <성모대관>(1945) 제작사실이 있으나 역시 기록뿐이다. 다만 1941년에 그린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소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하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보존돼 있다.

광복 후, 장발은 서울대학교 미술과 창설을 주도하고 1961년까지 초대 미술대학장을 역임하는 한편 국전(國展)심사위원, 한국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회원이 되었다. 1961년 장면 정권의 이탈리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5.16혁명으로 부임을 못한 채 해임되고,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 세인트 빈센트 대학 명예 교수를 지냈다. 1976년에는 미국에서 그린 추상화 작품들을 서울에 보내 전시를 가졌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가톨릭미술 특별전에 출품했고, 1925년의 김대건 신부를 위시한 역사적 한국 순교자 시성식에 로마 시복식 참례 생존자로서 직접 참석하였다. 여러 공로로 서울특별시 문화상(1949년), 예술원상(미술공로상, 1958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금관, 1984년)을 받았다.

[참고문헌] 張勃, 朝鮮カトリツク藝術, カトリツク大辭典, 東京 富士房, 1940 / 世界文藝大辭典, 上·下, 成文閣, 1975 / 李龜烈, 韓國가톨릭美術 2백년의 궤적, 季刊美術, 29호, 1984.

[참고 : 장발은 2001년 5월 10일부터 뉴욕 한국 문화원 갤러리에서 열리는 100수 기념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4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100번째 생일을 지내고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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