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한] 自然 [라] natura [영] nature [관련] 환경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주만물, 즉 자연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을 태우고 복종시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세상 만물 즉 자연이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이것을 현명하게 이용하며 더 큰 이익을 위하여 노동으로 완성할 사명이 인간에게 맡겨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연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발전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누구든지 필요한 것을 땅에서 찾을 권리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땅과 그 안에 포함한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하시었다. 따라서 창조된 모든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주 지배의 원리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과학적 정신은 과거와는 다른 문화형태의 사고방식을 낳아 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자연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우주정복을 시도하게끔 되었다. 인간의 지성은 시간에 대해서까지 그 지배권을 확대시켰다. 역사지식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기술과 계획혁신의 가능성은 과학지식의 종합, 홍보의 집단성과 동시성, 완전 상호의존성을 강요하는 이른바 ‘경제세계’의 출현에 기인되어 있다. 이제 사람들은 생명유지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 물과 같은 천연자원뿐 아니라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포용하는, 작고 불안한 생명권이 무한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야말로 온 인류의 유일한 공유재산으로 보호받고 보존되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 지배와 생산 증가를 위한 계획도 어느 것이나 다 결국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계획이란 불평등을 감소시키고 차별을 제거하며,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누구나 자기의 물질적 복지를 도모하고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며 영신기능을 계발할 수 있게 한다. 진보는 사회적 향상과 경제적 발전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공동재화가 평등하게 분배되도록 증산을 꾀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또 대자연을 개발하여 인간이 살기에 보다 적합하도록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만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진보에 노력하는 사람들은 먼저 거기에 무슨 위험이 있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과대평가될 내일의 기술주의(테크너크래시) 즉 기술의 횡포가 가져올 해악(害惡)은 과거의 자본주의가 갖다 준 해악에 못지않을 것이다. 경제와 기술이 인간에게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의도 없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신의 행동을 명령하고 그 행동의 가치를 판단하며 스스로의 성장을 추진해 나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가 부여하신 본성에 알맞도록 자유로이 본성에 알맞도록 자유로이 본성의 능력과 요구를 받아 계발해야 할 것이다. 자연 정복은 무모한 도시비대와 공장들의 지나친 팽창을 동반한다. 기술의 탐구와 자연의 변형(變形)에 바탕을 둔 공업의 기계화 작업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무한대의 생산을 꾀하게 된다. 어떤 기업체는 날로 발전하며 서로 제휴하는가 하면, 다른 기업체는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시킨다. 직업적 내지 지역적 실업현상, 근로자들의 직업 전환과 이동, 기술공들의 계획적 적응, 여러 생산분야의 불균형 등을 초래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 수요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치성의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많은 소득을 성취하고서도 자기활동의 성과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면서도 자기가 만들어낸 생산품의 노예가 되고 있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서만, 즉 인간의 선과 가치를 캐냄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이 언급될 때마다 자연과 문화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문화란, 넓은 의미로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용하는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간은 지식과 노동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고 노력하고, 가정과 시민사이에 있어서 관습과 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며 마침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위대적 정신적 경험과 소망을 그 작품 속에 표현하고 전달하며 보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발전과 더 나아가서 전인류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자연의 이용, 노동, 자기표현, 종교의 실존과 관습의 형성, 입법과 법제도의 설립, 학문과 예술의 발전, 미의 발굴 등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공동조건과 생활수단 및 서로 다른 조직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이같이 물려받은 제도에서 각 인간공동체와 고유한 전통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 특정 환경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각 민족과 시대의 사람들이 속하게 되며 거기서 문화발전에 필요한 여러 재화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노력해 왔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교류 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가족은 전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때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전인류에 퍼져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인간들에게는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 있다. 인간의 시계(視界)는 스스로 선택한 환상에 적응되지만 다른 또 하나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뜻밖에 극적으로 따라오는 인간활동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날 사라들은 이 사실을 갑자기 의식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연을 불법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할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 스스로가 도리어 이런 타락의 희생물이 될 위협도 없지 않음을 느끼게 외었다. 인간은 자연의 타락과 폐물, 새로운 질병과 전면적 파괴력 같은 물질적 환경이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감당할 수도 없는 내일의 생활 조건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것은 전인류 가족에 관계되는 광범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 교인은 이 같은 새로운 전망에 관심을 모으고, 이제 공동운명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

오늘날 부강한 국가들의 천연자원과 에너지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 대량소비의 결과로 끔찍한 폐기물이 대기와 공해를 더럽히고 있으므로 지상 생명 유지에 필수 요소인 공기와 물을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 같은 대량소비와 오염현상을 그대로 증대되게 방치한다면 공해는 전인류에 미치게 될 것이다. 1971년 스톡홀름에서는 제1회 인간 환경문제 회의가 개최되어 공해문제를 다루었다. 선진국들의 물질적 욕구가 다른 국가들을 빈곤에 떨어뜨리고 혹은 지구상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선진국들이 요구되는 물질을 증가시키려는 권리를 과연 어느 정도 주장할 것인지는 예측을 불허한다. 이미 부유해진 나라들은 대량소비를 억제하고 보다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인류의 공동 유산인 물질과 생명을 인류 전체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누려야 할 절대적 정의의 요청에 따라 이 유산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 개발과 노동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때로는 노동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노동을 하느님께서 명하시고 축복하긴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창조사업을 완성하는 데에 창조주와 협력해야 하며 자기 안에 새겨진 정신적 모상을 이제는 땅에 되새겨 주어야 할 것이다. 지력과 상상력과 감수성을 인간에게 부여하긴 하느님께서는 이로써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할 수단과 방법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예술가, 기술자, 고용주, 노동자, 농부 할 것 없이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를 계속하는 셈이다. 인간의 노력에 저항하는 물질을 접할 때 그 안에 자신의 모상을 새겨 주며 자신 안에서는 인내와 재능과 연구심을 길러낸다. 또한 여럿이 함께 일함으로써 희망과 고통, 소망과 기쁨을 서로 나누게 되며 따라서 뜻이 합쳐지고 정신이 가까워지며 마음이 서로 결합된다. 사람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서로 형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환경 (韓庸熙)

[참고문헌]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회칙, 1967 /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부 2~3장.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자시미사 [한] 子時∼

가톨릭 교회에서 대축일 미사 중 자시 즉, 밤 12시에 드리는 미사. 자정미라하고도 한다. 예수 성탄 대축일의 세 대의 미사 중 밤중미사와 부활 성야제의 밤중 미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밖에도 지역교회에서, 필요한 몇몇 경우에 행해지기도 하는데 12월 31일의 송년미사를 자시미사로 드리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자선 [한] 慈善 [라] eleemosynae [영] almsgiving

곤궁한 상태에 있는 사람 또는 시설에,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 입각하여 베푸는 물질적 경제적인 원조를 가리킨다. 특히 가톨릭의 입장은, 자선을 회개의 주요한 형식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으며, 단식(斷食)에 관한 규칙의 완화가 있은 뒤부터는, 이에 버금하는 것으로서 널리 권장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초자연적인 애덕(愛德) 즉 자선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의 원천인 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인 대신애(對神愛)의 실행이요, 베품을 받는 대상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가장 광범한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의 영육(靈肉)의 고뇌 모두를 모면하게 하며 또는 경감시켜 주는 봉사를 포괄한다고 보겠다.

종래의 도덕률에서는 자선을 베푸는 자선을 베푸는 자의 입장을, 자기 한 몸과 가족을 자기 처지에 알맞게 부양하고서도 여유가 있을 경우, 자선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정의(正義)의 의무라고 여겨졌다. 이렇게 적용된 ‘자기 처지에 알맞은 필요’라는 실제적인 척도는 물론, 이에 대응한 의무적인 자선의 기반이 되는 ‘과잉’ 또는 ‘여유’의 관념도 개인주의화된 복잡한 오늘날의 사회에선 모호하기 짝없는 것이 되었다. 부유층이 사회정책 입법의 발동에 따라 부담하게 되는 ‘사회적인 부담’은 그 본성상(本性上)의 의무 충족이지, 자선이라는 ‘사랑의 의무’로 대체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보다도 정의의 규범에 편중하는 데서 자선에 대한 이론이 생기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교적인 자선은 덕행으로서 본래 이성적이라는 점을 어디까지나 그 본질 파악에 있어 깊이 주의하도록 해야만 한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자선사업’(corporal works of mercy)은 애덕의 7가지 실천, 곧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집 없는 자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일, 병든 자를 방문하는 일, 감옥에 있는 자를 방문하는 일, 죽은 자를 묻는 일 등을 말한다. 종교개혁자, 특히 칼빈은 가톨릭적인 덕을 비판하고, 자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나, 차차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신앙의 당연한 귀결로서 사회구제의 여러 활동을 활발히 행하여 오고 있으며, 자선이라는 용어보다 ‘봉사’(奉仕)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짙다.

[참고문헌] J. Foerstl, Almosen, 1909 / F. Keller, Caritaswissenschaft, 1925 / G.J. Budde, Christian Charity, Now and Always: The Fathers of the Church and Almsgiving, 1931 / L. Bouvier, Le Precepte de l’aumone chez saint Thomas d’Aquin, Montreal 1935.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자살 [한] 自殺 [라] suicidium [영] suicide [프] suicide

생명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모든 권리의 기본이다. 하느님의 창조력만이 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갖기 때문에 타인의 생명은 물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침해행위도 하느님의 주재권(主宰權)에 대한 침해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은 천주십계의 제5계인 “사람을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을 위배한 행위인 동시에 제1계인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라는 계명도 위배한 대죄(大罪)를 구성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은 타인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지킬 의무는 건강, 육체의 완전함, 지체(肢體)의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할 의무까지도 포함한다. 즉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 행위가 대죄임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죽음 앞에 방치하는 행위도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건강유지와 생명의 보전을 위해 인간은 모든 정당한 수단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자본주의 [한] 資本主義 [영] capitalism

1. 뜻과 특징 : 자본주의라는 말은 사회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하여 널리 보급된 용어로서 그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말은 쓰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화폐에 의한 교환경제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가 하면, 이윤획득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대하여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자본주의의 속성을 부분적으로는 나타내고 있지만 그 본질을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는 제도적 조직과 더불어 그에 적합한 생활태도와 의식형태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 있더 그 경제조직과 이에 상응하는 생활태도를 흔히 자본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서는 중세의 전통 및 윤리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리 추구를 충족시키는 생활태도와 경제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좀바르트(W. Sombart)와 브렌타노(L.J. Brentano)의 견해와 개인적 방종과 감성적 욕구를 억누르는 윤리적 생활태도를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보는 베버(M. Weber)의 견해가 있다. 직업윤리에 바탕을 둔 소명의식이 헌신적 정열과 금욕적인 절약을 낳고 여기서 구라파 중산계급의 합리적 윤리적 생활태도가 확립되어 자본주의 정신이 나타났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이 생산된다는 점,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 그리고 자유방임으로 말미암아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있다. 좀바르트는 “서로 다른 두 계층 즉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계층과 이를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시장에서 결합하여 생산활동에 함께 참여하며, 경제적 합리주의와 영리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경제적 조직”을 자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한다. 이밖에도 자본주의의 의미와 특징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며 자본주의 경제란 이러한 정신적 태도에서 상품이 생산되고 있는 유통경제조직을 지칭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유재산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모든 재화에는 가격이 성립되어 있고,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이 생산되며, 경제활동에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그리고 생산은 종합적 계획이 아니라 생산주체니 기업의 임의에 따라 생산된다는 점 등이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들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는 장단점을 가지게 된다. 장점으로서는 첫째,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 둘째,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자유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창의성이 발휘되어 좋은 상품을 풍부하게 그리고 싼값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별적으로는 이기적 동기로 경제활동에 참여하지만 총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체사회에 골고루 혜택을 주게 된다는 점이 자본주의의 장점이다. 단점으로는 첫째, 부(富)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독점의 형태가 나타나고 부의 편재현상을 초래하여 자유방임적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면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점. 둘째, 생산이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자유경쟁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므로 사회전체로서는 무계획적 생산이 되어 경제공황이나 실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시장기능 : 자급자족의 원시공동사회에 있어서는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였다. 이러한 형태를 ‘자기생산’이라고 한다. 중세의 도시경제에 있어서는 다른 재화와 교환하기 위해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주문생산’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시장을 통해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기 위해 재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생산양식을 ‘상품생산’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상품생산’이 이루어지는 경제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단계에서도 교환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그 뒤에는 화폐를 매개로 하여 교환이 이루어졌지만 교환의 목적은 항상 자신의 욕망을 직접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의 기능이 단순히 교환수단의 역할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등장하여 자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본가는 화폐자본으로 생산요소를 사들여 재화를 생산하고 판매하여 먼저 투자한 화폐량 보다 더 많은 화폐량을 얻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이윤 또는 잉여가치이며 결국 이것을 획득하기 위한 생산이 상품생산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착취한 것이 이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근대 경제학자들은 이윤이란 자본의 제공자에 대한 정당한 보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과 생산수단의 결합에 의해 창출되므로 그 가치는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각각 그 기여도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윤은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공헌에 대한 보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의 획득이 인정되고 있으며 영리추구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점은 영리추구가 단지 경제활동의 제한된 목표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때로는 모든 인간활동의 최고 목표로까지 승격되는데 있다. 물적 재화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지 결코 인간생활의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실천적 과정에서 비롯되는 이 같은 부작용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과제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고, 그 가격을 기준으로 재화의 생산 교환 소비가 이루어진다. 재화의 가격이 올라가면 생산공급이 증가하고 소비수요는 감소하게 되며, 가격이 내려가면 공급은 감소하고 수요는 증가한다. 따라서 재화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선에서 결정되며 동시에 그 가격에서 재화의 총거래량도 결정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가격의 성립과 그 바탕 위에서 유지된다. 상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이지만, 이 이론은 가격 형성에 대한 본질적 인식이라기보다는 형식적 이해에 속한다. 가격의 본질적 바탕을 가치에 두고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상품생산에 투하된 노동량으로 설명하는 노동가치설, 상품에 대한 수요자의 주관적 효용으로 설명하려는 효용가치설, 그리고 상품의 생산비에 평균이윤을 더한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설명 등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있어 국가는 원칙적으로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취한다. 자유방임정책을 고수하고 경제운용 질서를 오로지 가격에 의한 질서에만 의존하게 될 때 경제적 무정부성(無政府性) 때문에 생산과 소비에 틈이 생기게 되어 마침내는 자본주의 경제의 특유한 순환적 경제공황이 발생하게 된다. 경기가 불황기의 국면에 접어들면 실업자가 생기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된다. 이에 국가는 여러 가지 경제정책을 통하여 경제에 통제를 가하게 되었고,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시장기구(市場機構)와 국가통제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전개과정 :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원시적 상업자본주의 형태로서 이미 고대사회에서도 존재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업자본주의는 13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그리고 14세기 무렵에는 북구 쪽에서도 출현한다. 이 형태의 자본주의는 16세기 무렵 영국으로 건너가 봉건제와 ‘길드’제도의 요소와 함께 혼합되면서 산업자본주의로 탈바꿈하게 된다. 산업자본주의의 완숙한 형태는 18세기 중엽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점차 발달하여 산업혁명을 맞이하면서 확립되었고, 그 뒤 구라파 전역, 북미주, 대양주 등으로 파급되면서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19세기 무렵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가 형성되던 시기에는 다수의 소자본가들이 자유경쟁 속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들은 봉건시대의 전통적 생산방식을 벗어나 근대적 공장제 생산조직을 확립하게 된다. 이 초기단계의 자본주의를 ‘상업자본주의’라고 한다. 그 뒤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자본이 형성되고 경제제도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시기를 ‘산업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유경쟁이 치열해지자 중소기업은 도태되고 대기업만 남게 되어 대기업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으로 대기업들이 다 함께 치명타를 입게 되자 대기업들은 독점형태의 제도를 마련, 공존의 수단으로 삼게 되는데 이 시기를 ‘독점자본주의’라고 한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산업자본과 결합한 금융자본의 역할이 두드러져 ‘금융자본주의’라고도 부른다.

노동자를 직접 통솔하는 역할은 경영자가 담당하지만 생산에 대해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자본가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경영자를 통칭하여 흔히 사용자라고 부른다. 법률상으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임금 작업시간, 그 밖의 고용조건을 계약하도록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노동자가 언제나 계약체결에 있어 약자의 지위에 서게 된다. 이 같은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는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자신의 결점을 보완해 가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표면화되면서 자유주의 원칙을 대신하는 통제경제가 주장되기 시작하고, 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케인즈 경제학으로서 자본주의의 단점을 시정하기 위해 여러 측면에 걸쳐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손질이 가해져 왔기 때문에 흔히 이러한 형태를 ‘수정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실업과 공황이 발생하여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본주의가 고도로 성숙하면 할수록 내부의 모순이 극도로 커져서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고 사회주의 사회가 반드시 도래한다고 강조(强調)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느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혁명은 오히려 후진국에서 빈발하고 있다. 선진국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결점들을 보완하여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어 일찍이 마르크스가 예견하였고 아직도 사회주의자들이 신봉하고 있는 이론은 근거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4. 가톨릭 입장 : 물질적 재화는 그 자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 사명은 인간에게 봉사하는데 있다. 따라서 필요한 생계를 위하여 경제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 도덕적으로 정당하며 동시에 인간의 의무이다. 이러한 기본원리를 망각하고 오로지 치부만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위는 도덕적으로 악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소산으로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무자비한 경쟁도 불사하고, 싼 임금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등 온갖 부단한 방법을 동원한다. 그 결과 첫째, 소유(所有)와 사용(使用)에 있어 절대적 사유권(私有權)을 주장하므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고, 둘째,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므로 경제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제라는 수단을 위해 희생돼야 한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근대 자본주의는 결국 물질만능 사상을 신봉하게 되고, 이에서 비롯된 온갖 잘못을 저지르게 됨으로써 가톨릭 사회원리에 어긋난다. 물론 가톨릭 사회원리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와 권리는 무제한의 것이 아니라 전체사회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서는 제한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오로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경제의 고유목적이다. 따라서 경제발전의 근본동기는 이윤이고, 경제의 최고 법칙은 자유경쟁이며 생산수단의 사유권은 절대권리로서 사회적 책임이나 한계가 없다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같이 무절제한 자유방임주의는 무자비한 독점상태를 유발시키고 국제적 제국주의를 초래함으로써 경제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목적을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사회 본래의 제도로서 기능을 되찾기 위해서는 첫째, 무자비한 경쟁, 무계획적 생산의 바탕이 되고 있는 자유방임정책은 국민전체의 공동선 증진을 보장하기 위한 공권력의 개입으로 보완되어야 하며, 공권력의 개입은 ‘보조성(補助性)의 원리’에 바탕을 둔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사유재산제도는 자연법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인간본성에 부합하므로 옹호되어야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고도 남는 잉여재산은 전체 공동사회를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는 사유공용(私有共用)의 개념을 확립하여야 한다. 셋째, 임금제도 그 자체는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시장가격론(市場價格論)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은 잘못이므로 노동자와 그 가족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 기업의 지불능력(支拂能力), 그리고 고용기회가 최대한 보장될 수 있도록 국민경제 전체의 상황을 고려하여 정당한 임금이 결정되도록 하여야 한다. 경제에 있어서 차지하는 자본의 역할은 물론 중요하지만 노동의 역할은 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결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문제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본질적 속성에 기인된 것이기보다는 그 구체적 전개과정에서 빚어지는 잘못이므로 이러한 문제점만 시정된다면 인간사회의 경제제도로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자본주의관(資本主義觀)이다. (金漁相)

[참고문헌] Pope Leo XIII, Rerum Novarum, 1981 / Pope Pius XI, Quadragesimo Anno, 1937 / H.M. Robertson, Aspects of the Rise of Economic Individualism: A Criticism of Max Webb and His School, 1933 / W. Ropke, The Social Crisis of our Time, tr. P.S. Jacobsohn, 1950 / J.A. Schumpeter, Essays: Capitalism in the Postwar World, Postwar Economic Problems, 1943 / P.M. Sweezy, 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 1942 / M. Dobb, Capitalism; Yesterday and Today, 1958 / W. Sombart, Der moderne Kapitalismus, 1955 / M. Webb,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t of Capitalism, tr. T. Parsons, 1930 / O. Lange, Ekonomia Polityczna, 1961.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