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조 [한] 李之藻

이지조(1565~1630).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 레오. 자는 양암(凉菴), 호는 양암거사(凉菴居士) · 양암일민(凉菴逸民). 항주(杭州)에서 출생.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양정균(楊廷筠, 1577~1627)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支柱)로 추앙받는다. 1594년 거인(擧人), 1598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남경(南京)의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 되었다. 서학(西學)과 천문 · 지리 · 역산 · 수학 · 군사 · 치수(治水) · 종교 · 철학 · 이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고 1603년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李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간행하고 이어 1605년 역시 리치의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을 개역(改譯)하였으며 리치를 도와 한역서학서의 저술과 간행을 도왔다. 1610년 중병에 걸리자 리치의 권유로 성세성사를 받았고,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항주로 낙향하여,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 카타네오(Lazarius Cattaneo, 중국명 敦居靜, 1560~1640) 등과 함께 항주를 개교(改敎)시키는 한편 양정균에게 전교, 그를 입교시켰다. 1613년 태복사소경(太僕寺少卿)이 되어 조정에 한역서학서의 간행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문산지≫(同文算指)의 한역(漢譯)에 참가하였다. 1616년 남경에 교난이 일어나자 천주교인의 보호에 힘쓰고 서광계(徐光啓)의 청으로 마카오에서 서양총포를 구해와 난(亂) 진압에 공헌했으며 1621년에는 감독군수광록사소경(監督軍需光祿寺少卿) 겸 관공부수청리사사(管工部水淸吏司事)가 되어 자신이 직접 총포를 제작하는 한편 마카오에서 대포를 들여와 국방강화에 힘썼다. 1629년 서광계와 함께 ≪숭정역서≫(崇禎曆書)의 간행에 참여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지조는 서관계, 양정균과 중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서, 항주지방의 교회를 창설하는 한편 한역서학서의 간행에 참여, ≪천주실의≫, ≪기인십편≫(畸人十篇), ≪성수기언≫(聖水紀言), ≪직방외기≫(職方外紀), ≪동문산지≫ 등의 서(序)를 남겼고, 스스로도 ≪환유전≫(-有銓), ≪명리탐≫(名理探) 등을 저술하여, 천주교의 중국전파 및 동양전파에 큰 공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香港公敎眞理學會, 香港,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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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한] 李止淵

이지연(1777~1841). 문신. 천주교 박해자.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고(希谷), 본가는 전주(全州). 공조참판(工曹參判) 의열(義悅)의 아들. 1805년 증광문과 을과(增廣文科乙科), 1806년 문과중시 을과(文科重試乙科)에 각각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주서(注書)를 거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 뒤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 이조 · 호조판서를 지내고 1837년 우의정에 승진 이듬해 실록정 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純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해 영의정 이상황(李相璜)과 좌의정 박종훈(朴宗薰)이 사직하자 홀로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며 조인영(趙寅永) · 조만영(趙萬永) 형제 등 풍양조씨 세력과 결탁, 대왕대비 김씨(大王大妃金氏)를 비롯하여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인 안동김씨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많은 천주교인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해 말 우의정을 조인영에게 빼앗기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가 1840년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희준(李羲準) 등에 의해 정권을 독점했다는 탄핵을 받고,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저서로 ≪희곡유고≫(希谷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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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배 [한] 李中培

이중배(?~1801). 순교자. 세례명은 마르티노,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으로 1797년 김건순(金建淳)의 전교로 이종사촌 원경도(元景道)와 함께 입교하였고, 그 뒤 독실한 신앙생활로 가족들을 입교시켰다. 1800년 4월 원경도와 함께 정종호(鄭宗浩)의 집에서 부활 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되어 여주관아, 경기감영(京畿監營) 등에서 1년간 옥살이를 하였고, 이때 옥소에서 의술(醫術)을 발휘, 사방에서 병자들이 진찰을 받으려고 몰려들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해 4월 25일(음 3월 13일) 고향인 여주성 밖에서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崔昌周), 임희영(任喜永) 등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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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목위원회 [한] 移住司牧委員會 [영] Migration Pastoral Committee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전국위원회 가운데 하나로 1981년 가을 주교회의에서 이향신자 사목부와 해외교포 사목부를 통합, 발족시킨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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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창 [한] 李存昌

이존창(1752~1810). 초기의 천주교인. 일명 단원. 세례명 루도비코. 충청도 천안군 여사울의 농민 출신, 학자.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을 가져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었으며, 고향인 충청도지방의 전교임무를 맡았다. 그는 가족은 물론 내포(內浦) 지방 일대에 복음을 널리 전함으로써 후일 내포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는,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으로 보내 마침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정조 15년) 때 잡혀 심한 고문과 꾀임에 빠져 한때 배교했으나,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곳 보다도 천주교가 성했고, 따라서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崔良業)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 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 되었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다가, 1801년 3월 18일(음 2월 5일)에 다시 체포 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50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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