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 [한] 李東鎬

이동호(1935∼ ). 왜관(倭館) 성 베네딕토 대수도원 제2대 아빠스, 왜관 감목대리. 세례명은 플라치도. 만주 간도성 연길현 팔도구에서 출생. 1948년 팔도구본당의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덕원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하여 성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으로 성신중 · 고등학교(소신학교)에 편입, 공부를 계속했고 1955년 성신대학(聖神大學)[현 가톨릭대학]에 진학, 1958년 수도서원을 한 후 1962년 1월 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왜관 본당 보좌신부, 1963년 성주본당 보좌신부, 1964년 구미본당 주임신부, 1965년 왜관 성마오로기숙사 사감을 거쳐 1969년 왜관 성 베네딕토 대수도원 원장(Prior)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71년 아빠스 겸 왜관 감목대리구장으로 선출되어 이해 4월 16일 축성 및 착좌식을 가졌다. 그 뒤 1981년 침묵의 교회인 함흥교구 및 덕원면속구 교구장서리를 겸하게 되어 현재 왜관 성베네딕토 대수도원 아빠스, 왜관 감목대리구장, 함흥교구 및 덕원면속구 교구장서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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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축일 [한] 移動祝日 [라] festum mobile [영] movable feasts [관련] 교회축일

교회축일 중 전례력(典禮曆)에 고정적인 날짜로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일. 유동축일이라고도 한다. 이동 축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들은 예수부활 대축일과 성령강림 대축일이며, 기타 다른 특정한 축일들과 사순절은 부활축일의 날짜에 따라 유동적이다. 이동축일은 주의 공헌, 주의 세례, 재의 수요일, 예수 부활, 승천, 성령강림,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성심, 그리스도왕, 대림 1주일, 예수 · 마리아 · 요셉의 성가정 등이 있다. (⇒) 교회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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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한] 李東郁

이동욱(1739∼?). 문신. 이승훈(李承薰)의 부친.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巖), 본관은 평창(平昌), 광직(光溭)의 아들. 1776년 정시문과 병과(庭試文科丙科)에 급제하였고 1776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으로 갈 때 아들 승훈을 동반, 승훈으로 하여금 북당(北堂)에서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하여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게 하였다. 귀국 후 사직(司直), 참판(參判), 의주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정조(正祖) 때 사망하였다. 사후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아들 승훈이 처형되자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글씨를 잘 써 서예작품으로 <자규루상량문>(子規樓上樑文)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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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한] 李東九

이동구(1904∼1943). 교육자. 문학평론가, 소설가, 희곡작가. 세례명은 베네딕토. 1931년 일본 규우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 1942년까지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면(張勉), 정지용(鄭芝溶), 윤형중(尹亨重) 신부 등과 <가톨릭靑年>의 창간에 참여했고, 동지(同誌)에 단편소설 ‘도항노동자’(渡航勞動者), 단편소설 ‘풍선’(風船) 외에 많은 문학작품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1939년 경향잡지사 주관의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 현상작품모집에 희곡 ≪순교자≫(殉敎者)로 1등을 수상하였고 1940년에는 보댕(Bodin, 邊若瑟) 신부가 작곡한 성가 <복자찬미가>(福者讚美歌)를 작사(作詞)하기도 하였다. 1942년 계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943년 7월 19일 한강에서 교직원들과 함께 수영 강습회에 참가하던 중 익사(溺死), 종현본당(鐘峴本堂)[현 明洞聖堂]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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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기 [한] 李道起

이도기(1743∼1798).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충청도 청양(靑陽) 출신. 그는 글을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천주의 사랑과 덕행을 본받아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그의 입교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그는 천주교를 신봉한 후로 는 청양 · 공주 · 은진(恩津) 등지에서 많은 사람을 감화하여 입교시켰다.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제일 먼저 천주교인임이 밝혀져 정산(定山) 옹기 마을로 피신하였으나 1791년 6월 8일 청송(靑松)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무수한 고문에도 끝내 배교치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1년여의 옥중생활 끝에 1798년 6월 12일 그의 소원대로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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