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한] 生命 [라] vita [영] life

생명이란 ‘내적인 동력(動力)’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내부로부터 행동하는 존재의 본질이다. 위로는 신의 생명(이것은 신의 본성과 동일하다)에서부터 아래로는 피조물 세계의 모든 생명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로 적용되는 용어이다. 본성(本性, natura)이 고도한 것일수록 거기서 생기는 것은 더욱 본질적이게 마련인데, 그 까닭은 행동의 내재성이라는 것이 존재의 순위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내재적인 행동인 것이며, 생물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에서 끝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서에는 생명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다.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어휘 중의 하나 ‘hayya’라는 말이 있는데, 히브리 사상에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하야’ 즉 생명으로 기술하고 있어, ‘하야'(존재)는 하느님으로서의 현현, 행위, 그 섭리의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활동성, 곧 생명의 현상으로서 상징되고 있다. ‘ruah’는 생명의 자생(自生)을 나타내어 ‘숨결’의 뜻이며, 이 ‘루아’를 포기함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고, ‘basar’는 살아 있는 인간의 기관 곧 ‘육체’를 나타냈고, ‘nepes’는 ‘영혼’, ‘넋’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인간 또는 집단의 몸 가운데 깃들이어 이를 형성하고 활동케 하는 생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육의 생명'(레위 17:14)이라고 할 때, ‘네페시’라는 낱말이 쓰이고 있다. 이렇게 개인의 생명을 넘어 집단 또는 민족의 생명에 대하여 언급한 곳도 있다. 신약성서에서의 생명의 개념도 구약성서의 경우와 가깝다. 가장 많이 나오는 용어 중 ‘psuche’는 ‘영혼’을 가리키며, 지상의 생명체, 사람, 생명의 원리, 초월적인 생명의 자리, 그 중핵(中核)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또 하나의 용어인 ‘zoe’는 ‘생명’을, 그리고 몇 군데 나오는 ‘soma’는 ‘육체’, ‘pneuma’는 ‘정신’을 뜻하는 데, 이는 모두 육체적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하느님의 나라를 표현으로 구약과는 달리 ‘사후의 생명’을 가리키는 ‘영원의 생명’에 대한 뚜렷한 구상도를 가지고 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는다(마르 8:34-38)고도 지적하여,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해석에 있어, ‘영원한 생명’은 부활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비로소 ‘새 생명’을 획득한 첫 사람이 된 것이다. 부활한 주의 생명은 종말론적으로 해석되어 있기 때문에 사후의 생명인 동시에 현재의 생명이기도 하다(로마 5:12-21, 6:11, 갈라 2:20, 2디모 1:1). 특히 바울로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현재화되어 있다.

생명의 자기운동은, 결국에 있어 오직 움직이게 할뿐이며 스스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부동의 능동자(能動者) 곧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생명은 순수한 내재적인 활동이다. 하느님의 내재적인 생명은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생명인 것이다. 성부(聖父)는 영원한 로고스 곧 ‘말씀’을 낳는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聖子)는, 셰벤(M.J. Scheeben, 1835-1888)에 따르면, “이들 공동의 마음의 절대적인 일치 또는 가득참으로부터 이런 일치를 제3의 위격으로 옮겨가서, 서로의 사랑을 절대적인 효력을 가지고 나타내 준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제3위 곧 성령(聖靈)에 있어서 하느님의 생명의 순환이 완결된다.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명은 이 삼위일체의 내재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개념의 생명론(生命論)이나 최근 핵단백질에서 찾는 생명의 기원과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관련에 있어, 성서 특히 창세기의 생물생성 기사에 대하여는 이미 다윈의 진화론에서 극복되어 있으므로, 이런 점에다 문제의식을 품는 것은 과거 일이 되어 버렸다. 설혹 장차 무생물로부터 인공적으로 완전한 생물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시간·공간적이 존재인 생물의 기원이 창조주에게 의거한다는 것을 반박하는 증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참고문헌] W. Eichrodt, Theology Old Testament, tr. J.A. Baker, Philadelphia 1961; Man in the Old Testament, tr. K. and R. Gregor Smith, Chicago 1951 / E. Schrodinger, What is Life?, Cambridge, Mass. 1963 / A. Portmann, New Paths in Biology, tr. A,J. Pomeans, New York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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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서울 대교구의 월간 기관지 <새벽>은 원래 1972년 1월 30일 란 이름으로 창간되었다. 창간 목적은 1970년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민족의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소식을 교환하고, 이로써 서로간의 이해와 사랑을 돈독히 함과 동시에 공동선에 도달하도록 하자는데 있었다. 19cm×26cm 판 4∼6면 체제로 교리 · 윤리 · 전례의 해설, 각 본당 · 수도원 · 액션 단체의 소개, 세미나 · 학술모임 · 신간안내, 제언란을 실었다. 이 외 주교관, 지역구, 사제, 평신도 동정(動靜)에 관해서도 싣고 있다. 1973년 7월호 (8호)부터 1974년 2월호(16호)까지는 제호를 <화해>라고 했다가 그 후 다시 라고 했으며 1975년 3월호(23호) 이후 폐간되었다. 1977년 9월 1일 사목적 요청에 따라 복간되었으며, 1979년 1월호부터는 제호를 <새벽>이라 고치고 그전의 팸플릿에서 책자의 형식으로 체제를 바꾸었다. 1984년 2월 1일 현재 통권 93호를 발해하였다. 편집과 발행은 서울 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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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순교지.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 주로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한양성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조선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演武場)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버) 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 새남터는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들이 순교의 성혈을 뿌린 영광의 땅이 되었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范)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 1846년 기해박해 때 김대건 신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188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푸르티에(Pourthie, 申),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등 5명의 신부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의 평신도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새남터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확인하기 어려우나 현재 철도청이 기관고로 사용하는 부지일 것이라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오랜 주장이다. 그러나 원효로 4가 부근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고증이 어려운 데다가 그 부지의 확보마저 어려워 새남터 근방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용산구 서부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확보하고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하였다. 1956년 이 곳에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 독립되기도 하였다. 1983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는 새남터에 대성전을 건립하기로 하여 공사에 착공, 그 이듬해 완공하였다. 이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의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과 전시관, 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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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윤리 [한] 狀況倫理 [영] situation ethics

도덕적 결단을 내릴 때, 십계명과 같은 보편적 도덕률을 염두에 두고 그 정신을 구현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법적 상황을 앞세워 도덕률을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한 개인이 처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을 강조하여 도덕률을 무시하는 입장을 말한다. 전자는 율법제일주의의 형태(legalistic style)이고, 후자는 반율법주의, 즉 무법주의 형태(antinomistic style)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윤리를 위협하고 자연법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장애요소로 등장한 것은 바로 후자의 형태로서의 상황윤리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2년 가톨릭 청년여성 세계연합회 (Federation Mondiale des Jeunesses Feminines Catholiques)에 보낸 훈시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개신교 신학자 요셉 플레처(Joseph Flecher)가 ‘새 도덕'(The new Morality)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내 놓은 이 윤리사상이 성가(聲價)를 얻은 것은, 체계적인 철학적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청년운동에 의해서 또 상황윤리와 죄 신비설간의 관계를 다루는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등 소설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반응을 통해서였다.

윤리의 절대성은 사랑뿐이며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 법이 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윤리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사랑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법은 현저히 다르다.

율법제일주의의 상황윤리는 “법을 따르라, 그것이 곧 사랑이다.”고 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양심이 명하는 바에 의거하고 사랑을 따르는 의향만 가지면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가치의 적용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도덕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보편적인 원리나 가치를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개인이 처한 개별적이고 비 대체적인 경우의 구체화가 보편적인 도덕률의 역할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잘못이며 일반적인 원리의 성격을 무효화시키지 않으면서 특수한 경우에 비추어 응용을 해야 할 것이다.

상황윤리는 양심을 가치와 분리시키나, 도덕적인 결단은 도덕과 관련되는 가치가 인식되고 난 뒤에 비로소 가능하며 이 가치는 구체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두루 유효하므로 일반적인 가치이고, 양심은 이런 가치를 전제하여 발로되므로 양심을 가치와 분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상황윤리는 도덕적인 중요 가치를 행위자의 선한 의향에 둔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의향을 갖는다는 것은 도덕률을 기꺼이 성취하겠다는 목적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하겠으므로 선한 의향을 내세워 일반적인 원리를 배척함은 타당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윤리는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한 인간이 ‘지금 여기서’ 자기 결단을 내리는 상황만을 고려하므로 사랑과 정의의 관계 속에서 인격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요구를 무시하는 수가 많게 된다.

성황윤리의 죄 신비설 또한 위험하다. 이 설은 죄를 범함은 필연적으로 죄인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오도(誤導)한다. 그러나 범죄는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보증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한 범죄인이 다른 범죄인을 비난하고 우월감을 갖는 수가 적지 않은 것이다. 상황윤리의 근저에는 도덕적 의무의 멍에를 흔들어 보고자 하는 저의가 있다. 이 윤리의 옹호자들은 또한 인간의 지위가 피조물임을 거부한다. 은연중에 인간을 하느님과 동등한 평면에 두고 그래서 인간의 영광이 하느님께 복종하는 데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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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스 [라] sanctus

감사송(praefatio)다음에 부르는 기쁨의 노래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온 누리에 주 천주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이사 6:3)의 부분과 “높은데 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시편 117:25)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첫 부분은 초기 교회시대에 유태교 의식에서 채택한 것으로, 유태교도들은 안식일의 아침 의식 때 이 부분을 노래 불렀다. 이 부분이 모든 전례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도시대 때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뒷부분은 야곱식 · 라틴식 · 비잔틴식 전례에서 처음으로 첨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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