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본당 [한] 淸州本堂

충청북도 청주시 수동(壽洞)에 있는 청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안나, 1932년 10월 장호원본당(현 감곡본당)에서 분할되어,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함으로써 설정되었다. 창설자 박일규 신부는 처음 청주시내 북문로 3가에 성당부지 1,600여평을 사들여, 1933년 봄에 성당과 사제관의 신축공사에 착수, 그해 9월 3일 공사를 다 마치고 12월 1일 축성식를 거행하였다. 그 뒤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잠시 사목을 맡았다가, 이삼복(李三馥, 요한) 신부가 3대 본당신부로 7년간(1941∼1948. 3) 전교하고,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4대 본당신부로 1948년 3월부터 1953년까지 사목하는 동안 고아원을 세우고, 6.25전란도 겪었다.

김유룡 신부 재임시에는 김피득(金皮得, 베드로), 구전회(具田會, 바르톨로메오),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신부 등이 보좌신부로 재임하였다. 1947년 내덕동본당을 분할할 때까지 25년간 청주 시내의 유일한 교회였던 이 본당의 교세는 1937년에 1,211명이고, 청주교구로 편입된 1958년에는 1,644명이었다. 1955년부터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부임하였는데 처음 부임한 메리놀회 신부는 맥노튼(W. McNaughton, 羅吉模) 신부였고, 그 후임인 설리반(H. Sullivan, 薛) 신부의 재임시에 청주교구로 편입되었다. 청주본당은 1966년 8월 15일에 북문로 3가에서 수동으로 본당위치를 이전한 뒤 이름도 ‘수동본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1967년 5월에는 수녀원을 지어, 복자수녀원 분원을 설치하였다. 1967년 5월 유치원을 개설하고 1973년 11월에 현 유치원 건물을 준공하였으며, 1974년에는 사직동 본당을 분할하였다. 1983년말 현재 주임은 정충일(鄭忠一, 안토니오)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총수는 2,781명이다.

이 본당이 창설된 뒤, 역대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박일규, 임종국(林種國, 바오로), 정원진, 이삼복, 김유룡, 맥노튼(현 인천교구장), 설리반, 설리반(R. Sullivan, 반예문), 루먼(F. Luhmann, 유), 하먼드(G. Hammond, 咸)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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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한] 淸州敎區

충청북도 일원을 관할하는 교구. 8.15광복 이후, 북한지역에서의 전교가 전혀 어렵게 되자, 서울 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주교는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1953년 9월 1일 서울교구 안에 충청북도 감목대리구를 두기로 하고, 광복 전예 평양교구(平壤敎區)를 맡아 보던 미국 메리놀(Maryknol) 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이 지방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노 주교는 그 해 9월 16일, 메리놀회 본부 총재 월시(Walsh) 주교와 함께 감곡(甘谷) 성당으로 가서, 6.25동란 때 종군신부로서 제주도의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을 감화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 파디(Pardy, 巴) 신부를 감목대리로 임명하였다.

청주교구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辛酉)박해 이전부터였으나, 대부분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을 지켜 왔다. 그러므로 1882년 이후 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곧 여러 곳에 공소(公所)가 생겨 교세가 날로 늘어났다. 1896년에 충북 감곡에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가 성당을 건립함으로써, 이 지방에 정식으로 교회가 성립되어, 첫 본당이 생기게 되었다. 뒤이어 1906년에는 옥천(沃川)에 두 번째 본당이 설립되었고, 청주(淸州), 증평(曾坪), 제천(堤川), 치현(治峴) 등 6개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었는데, 그 중 증평본당이 6.25동란으로 폐쇄되어, 결국 5개 본당만이 1953년에 메리놀 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충청북도 감목대리구는 그 뒤 메리놀회의 후원과 파디 신부 이하 전교회 신부들의 눈부신 전교활동으로 큰 발전을 보아 1958년 4월에 청주대목구로 독립하게 되고, 파디 신부는 7월 4일 교황청으로부터 청주교구 초대대목으로 임명되어, 그 해 8월 16일 미국에서 성성식을 가졌다. 그 뒤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에 따라 정식 교구로 승격되어, 파디 주교의 착좌식이 그 해 7월 25일에 거행되었다. 1970년에 파디 주교가 72세의 고령으로 교구장직을 사임하자, 그 해 6월 25일 정진석(鄭鎭奭) 신부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0월 23일 성성식을 가짐으로써, 청주교구도 한국인 주교가 다스리는 자치교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주교구의 관할지역은 단양군(丹陽郡)과 제천군(堤川郡)을 제외한 충청북도 일원 5,767㎢에 달하며, 1982년말 현재 교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자수 4만8,805명, 본당수 26개소, 공소 98개소, 한국인 신부 34명, 외국인 신부 6명, 외국인 수사 1명, 한국인 수녀 72명, 외국인 수녀 8명, 남자수도단체 1개, 여자수도단체 9개, 병원 2개소, 양로원 1개소, 유치원 6개소,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특수학교 2개교, 주일학교 26개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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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자 [한] 請願者 [라] postulans [영] postulant

수도회의 수련기를 앞두고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수도생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수도생활에 대한 적성 여부를 판별하고 지원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는 사람. 대략 6개월에서 2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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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 [한] 淸貧 [관련] 가난

가난을 의미하나 특히 복음적 권고의 하나로서 수덕적(修德的) 의미의 가난을 가리킨다. (⇒)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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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본당 [한] 淸溪洞本堂

1898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黃海道 信川郡 斗羅面 淸溪理)에 창설되어 1912년 폐쇄된 서울교구 소속 본당. 청계동은 황해도의 유서깊은 교우촌의 하나로, 1863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황해도 순방 때 17가구의 천주교인이 살고 있었다. 베르뇌 주교는 매년 청계동을 방문하여 공소회장 박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성당터까지 물색해 두었으나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공소회장 박 프란치스코와 김 베드로, 김 시몬 부자(父子)가 순교하고 나머지 교우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교우촌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96년 안태훈(安泰勳)에 의해 청계동에는 다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해 12월 안악(安岳) 매화동(玫花洞) 본당의 빌렘(Wehelm, 洪錫九) 신부가 2명의 전교회장을 파견, 1897년 1월 안태훈 일가를 비롯한 33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어 부활절에는 66명의 영세자가 나오게 되었다. 청계동에서 이처럼 활발한 개종운동이 일어나자 빌렘 신부는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고, 1898년 4월 자신이 직접 청계동으로 부임하여 청계동 본당을 창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전교의 요충지로 창설된 청계동본당은 신천, 재령, 해주, 봉산, 송화, 문화 등의 지방을 관할하게 되었다. 1898년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이 증축되었으며, 1899년에는 재령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재령과 봉산의 전지역과 신천의 일부지역을 재령본당에 이관하였다.

그 뒤 1900년에는 교우수 800여명, 예비자수 600여명, 공소수 25개소의 놀라운 교세신장을 기록, 뮈텔 주교의 특사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청계동을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해 가기도 했는데 이렇게 놀라운 교세신장은 빌렘 신부와 안태훈 일가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빌렘 신부는 청계동에서부터 해주와 옹진반도 그리고 서해의 도서지방에까지 전교여행을 다녀 1902년에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잠시 머물렀던 순위도(巡威島)에까지 공소를 개설하였고, 안중근(安重根)도 빌렘 신부를 보좌하며 황해도 각지를 전교하는 한편, 뮈텔 주교에게 인재양성을 위한 대학의 설립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해도에서의 천주교 세력을 막으려는 일부 지방관리들에 의해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소외 ‘해서교안’(海西敎案)이라는 교회와 정부와의 마찰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청계동본당은 다른 황해도의 본당들과 함께 교세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을 전후해 성인영세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되자 빌렘 신부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인 해주로의 진출을 모색하여 결국 1912년 해주에 본당을 신설하고 청계동본당을 공소로 격하시켰다. 그 위 청계동은 계속 해주본당의 공소로 존속해 오다가 1949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으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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