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신학 [한] 革命神學 [영] theology of revolution [독] Revolutionstheologie

2차 대전 후 등장한 신학개념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의 하나. 혁명신학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전세계의 사회 · 윤리구조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제3세계의 극단적인 사회변혁을 역사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혁명신학은 사회제도와 구조 속에 내포된 부당한 억압의 요인들을 영원히 말살시키고, 기존체제의 잔재를 극복한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혁명신학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학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던 프린스턴대학의 숄(Richard Shaull)이다. 숄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준 사람들로서는 레만(Paul Lehmann), 베네트(John C. Bennett), 부버(Martin Buber), 류벤(A. van Leeuwen), 로마드카(J. Hromadka), 마르쿠제(H. Marcuse) 등이다. 한편 혁명신학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제네바의 ‘교회와 사회’, 1967년 독일의 ‘혁명신학’ 심포지움 이후다. 혁명신학의 사상은 종래의 다른 신학사상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데 비해,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사회 · 경제적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조직신학 및 성서신학적인 면에서도 종래의 신학과는 다른 측면에서의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있다.

혁명신학은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하느님이 활동하는 장(場, locus)이라고 파악하는 점에서 세계신학(theology of world)이나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과 관계가 깊고, 기존의 것에서 개방된 것으로의 투쟁을 전제로 한 점에서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과 유사하며, 영원한 혁명을 통한 인간화(人間化)에 주의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과 내용을 같이하고 있다. 숄에 따르면 “성서의 하느님은 일하고, 개혁하며, 혁명하는 하느님이지 지금까지와 같이 형이상학과 종교성에 가려진 그런 하느님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금까지 경건의 배후에 숨겨져 있었고, 절대주의적인 권위를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고 논증하였다. 혁명신학은 세계적인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극복하려는 제3세계에서 태동했고, 오늘날 국제 정치무대에서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설자리를 모색하는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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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한] 革命 [라] size [영] revolution [독] Revolution [프] revolution

일반적으로는 사회의 근본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사회혁명(社會革命)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사회혁명이란 하나의 사회공동체의 기반을 이루는 생산관계가 발전하여 생산력을 억압하는 장애로 될 때, 발전하는 생산력과 억압하는 생산관계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낡은 생산관계 속에서 이익을 누리고 착취하는 소위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착취되고 억압당하면서 발전된 생산력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대표하는 계급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혁명은 기존질서 속에서 점진적 변혁을 통해 전면적 변혁으로 나아가려는 개량주의와 다르고, 동일 지배계급 내에서의 권력투쟁인 쿠데타나 궁정혁명과도 구별된다.

혁명의 성격은 혁명에 의해 실현될 사회적인 과제에 의해 규정된다.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에로의 길을 연 혁명은 소위 브르좌 혁명인데, 그 전형적인 예는 1879년 프랑스대혁명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신흥세력이었던 브르좌들이 지도세력이 되고, 다른 근로대중을 동맹으로 하여 수행되었다. 자본주의적 제도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제도를 수립하는 혁명은 소위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되는데,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대표적인 예다. 또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이 제국주의의 지배체제를 일소하여 민족독립을 달성하고, 봉건적인 유물을 청산하는 혁명을 민족해방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피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는 혁명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동반하였지만 지배계급의 폭력적인 탄압과 저항의 강도에 따라 그 정도는 달라졌는데, 이것은 각국의 역사적 사회적인 갖가지 조건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 · 레닌주의는 소위 유물사관적 입장에 입각하여 역사는 혁명의 역사이고 혁명은 역사를 움직이는 기관차라고 불렀다. 그래서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의 경우 혁명의 주체적 객관적 조건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객관적 조건이란 사회모순의 증대, 특히 생산력과 생산관계와의 모순을 말하며, 주체적 조건이란 피지배계급의 계급의식이 성숙하여 모순을 첨예하게 느끼며, 이를 변혁시킬 의지를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학 중에서 루터파의 질서신학(秩序神學)은 혁명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어떤 경우에는 혁명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혁명적 상황에 몸을 내맡긴 최근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리스도가 혁명의 주님임을 신앙 고백하고 있다. 현대 가톨리시즘에 있어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폭정이나 국민의 기본권이 극악무도하게 침해당하는 경우 다른 구제책이 없을 때만이 혁명이나 저항의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국제사회문제연합회, 사회원리규범). 그러나 폭력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폭력을 거슬러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의식계발, 대화, 폭력 아닌 운동으로 상황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비(非)폭력은 피동(被動)이 아니다. 때로는 적극적인 항거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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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영] Hellenism [독] Hellenismus

넓은 뜻으로 히브라이즘과 함께 유럽문화의 기반이 된 2대 사상의 하나로 그리스 사상 일반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기원전 323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조(朝)가 멸망하고 이집트가 로마에 귀속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의 오리엔트 세계문화를 지칭한다. 그간 그리스문화는 지중해 동부는 물론 멀리 인도의 동부지방에도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로마인에게 계승되어 유럽문화의 전통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었다. 특히 알렉산더에 의한 오리엔트 제국의 통일과 그가 죽은 이후 제국의 분열, 항쟁을 반영한 정치적 혼란과 정신적 불안은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는 모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시대의 정신적 특징으로서는 세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알렉산더의 통일에 따라서 종래에 도시국가(Polis)가 지닌 실질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도시국가와 비도시국가, 그리스인과 이방인과의 차별이 철폐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를 하나의 전체(Oikumene)로 보고 인간을 여기에 속한 세계시민(Kosmopolites)로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리스 본토에 있어서 방언(方言) 대립이 해소되고 코이네(Koine)라고 부리는 그리스어가 표준어로 공용되어 디아스포라의 유태인까지 이를 사용, 신약성서를 코이네로 기록하고 있다. 세계주의적 경향은 인간을 도시국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세계시민으로서 자각시킴으로써 상호평등, 즉 성별, 신분별, 민족의 차별이 제거되고, 개인이 한 인간으로 존중되는 기풍이 고조되어 개인주의적 경향을 낳게 하였다. 개인주의적 자각은 정치적 변동과 사회적 불안에 처해 확고부동하고 올바른 자유를 누리는 인간의 생활태도를 확립하려는 윤리적 실천적 요구를 강하게 표출하게 된다. 이에 발맞춰 철학적 여러 경향, 즉 제논(Zenon)이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로스가 수립한 에피큐로스학파, 회의학파 등이 나타난다. 윤리학도 종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와 같이 정치학의 한 분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처세술과 관계된 것으로서 논리학, 자연학에 선행하여 철학의 최고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체계에 포함되어 있던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천문학 · 수학 · 의학 · 생물학 · 지리학 · 문헌학 등의 여러 과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실증적 과학적 경향이 대두된다. 헬레니즘의 풍조는 종교의 분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붕괴된 도시국가의 종교에 동방의 여러 종교, 특히 밀교가 융합되어 종교에 동방의 여러 종교, 특히 밀교가 뚜렷하게 나타내다. 이 시대의 종교적 관심은 개인의 영혼구제의 문제를 내면화시킨 것이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전파가 요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축에는 코린트식이 대표적 양식이며 순수문학에는 뚜렷한 특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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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코 [라] Henricus

Henricus(?∼1157). 성인. 스웨덴 웁살라(Upsala)의 주교. 축일 7월 13일. 영국에서 태어나 핀란드의 코일로(Coylio)에서 죽었다. 이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기록이 없는 편이지만, 그는 스웨덴왕 에릭 9세의 핀란드에 대한 종교전쟁에 수행하여 핀란드의 많은 이교도를 개종시킨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에릭 9세가 귀국한 뒤 핀란드에 남아 있다가 그가 파문(破門)시킨 핀란드인에게 살해당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 살해자가 헨리코의 비레툼(birretum, 사제의 사각모자)을 벗겨서 머리에 썼다가 다시 벗으려 하자 살이 모자에 달라붙었다고 한다. 이 성인에 대한 숭배열은 스웨덴과 핀란드에 급속히 번졌고, 그 뒤 비리제트 여자수도회의 성장과 함께 유럽대륙에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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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원] Henry, W. Harold

Henry, W. Harold (1909∼1976).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선교사, 대주교. 제5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초대 제주(濟州)교구장. 한국명은 현해(玄海).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North Field)에서 출생. 미국에서 골룸바노 신학교와 밀턴대학을 졸업한 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포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1933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풍속을 익히고 1934년 전남 노안본당 보좌신부,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강제 추방된 뒤 1943년 미(美) 육군에 입대, 유럽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였다. 1945년 군에서 제대하고 1947년 한국에 재입국, 광주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0년 6.25동란으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몬시뇰이 북한공산군에게 납치되자 광주교구장서리 겸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광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54년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서울 · 광주 · 대구 등 3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1971년 제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제주교구의 교세 신장에 힘쓰는 한편 광주교구장 시절부터 힘써 온 교육 · 의료 · 사회개발 분야에 걸친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유해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黃沙坪)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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