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보관물: 2002-05-14

청년시절 및 득도 전까지

靑年時代와 得道 이전까지  1) 결혼 증산은 21세(辛卯年)에 정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정씨 부인은 절름발이에다 눈은 아래로 보려면 위로 치켜 뜨게 되는 천바래기였다. 강일순은 첫날 밤이 아닌 그 다음날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도 사나워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정생활을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며 가정생활에는 등한시하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자.”고 하자,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있느냐?”하며 더욱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2)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불구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相對的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外地로 장기간 주유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서당 훈장 시절 그는 결혼 후 처가(妻家)에서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도중 1894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이 혁명의 실패를 예견(豫見)하고, 동학혁명군을 따라 남원, 인심, 전주, 청주, 공주 등지로 종군(從軍)하면서 싸움구경만 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이 되면 혁명군은 패하게 된다고 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말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동학혁명을 따라 다니며 동학혁명의 발전상황과 동학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욕구 등을 관찰한 증산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목격하고는 스스로 동학에 대신할 만한 大道를 창도하여 보겠다는 뜻을 이 시기에 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증산의 활동에 대해 大巡典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은 더욱 부패하여 세속은 날로 악화되고 관헌은 오직 태악(泰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란(虛亂)만 숭배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 진력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불안이 온 사회를 덮거늘 天師 개연(慨然)히 광구(廣求)할 뜻을 품어 유․불․선․음양식위(儒․佛․仙․陰陽識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3) 즉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失調解消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체계화된 민중종교가 不在할뿐만 아니라 기성종교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神明에 의한 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天主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주창(主唱)되고 있으나, 사실상 儒敎의 人道的인 것에 그쳐 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제세구민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莁),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神明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道術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達通할 수 있는 道通工夫를 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이미 도인(道人)이라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증산의 종교적 특성은 사회구조의 개혁방법에 대한 추구, 그러한 추구의 방법으로 제시된 종교적 방향에의 모색, 기성종교에 관한 모든 지식의 흡수,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소명의식의 발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4) 3) 유력(遊歷)을 통한 宗敎的 知識의 增大5) 여러 가지 서적을 탐독한 증산은 27세 되던 해에 더욱 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庚子년까지 3년동안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도통했다는 술객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1900년 30세 되던 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6)  유력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반 민중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욕구를 보다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지방으로의 유력은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관계로, 서울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서울은 외국과의 修交 이후 청, 일, 러시아, 미국, 이태리, 독일, 영국, 불란서, 네델란드 등 각국의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로의 건설, 광산의 채굴, 어업권의 확보, 각종 상업에의 종사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등을 포함하여 각국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천주교의 명동성당이 준공되고 改新敎의 교회와 병원 및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아관파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러일전쟁의 발생과 일본의 승리 예언, 한일 합방 및 그 후의 독립 예언, 마테오 리치의 언급 등 서교의 부분적 인용,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긍정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력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이 그의 종교적 성향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3년간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서구종교의 이질성, 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한 국가정체의 위기,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의 실태와 욕구 등을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구질서, 구체제 등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귀향하는 즉시 선령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살라 버린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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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및 득도 전까지

靑年時代와 得道 이전까지  1) 결혼 증산은 21세(辛卯年)에 정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정씨 부인은 절름발이에다 눈은 아래로 보려면 위로 치켜 뜨게 되는 천바래기였다. 강일순은 첫날 밤이 아닌 그 다음날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도 사나워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정생활을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며 가정생활에는 등한시하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자.”고 하자,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있느냐?”하며 더욱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2)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불구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相對的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外地로 장기간 주유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서당 훈장 시절 그는 결혼 후 처가(妻家)에서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도중 1894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이 혁명의 실패를 예견(豫見)하고, 동학혁명군을 따라 남원, 인심, 전주, 청주, 공주 등지로 종군(從軍)하면서 싸움구경만 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이 되면 혁명군은 패하게 된다고 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말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동학혁명을 따라 다니며 동학혁명의 발전상황과 동학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욕구 등을 관찰한 증산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목격하고는 스스로 동학에 대신할 만한 大道를 창도하여 보겠다는 뜻을 이 시기에 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증산의 활동에 대해 大巡典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은 더욱 부패하여 세속은 날로 악화되고 관헌은 오직 태악(泰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란(虛亂)만 숭배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 진력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불안이 온 사회를 덮거늘 天師 개연(慨然)히 광구(廣求)할 뜻을 품어 유․불․선․음양식위(儒․佛․仙․陰陽識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3) 즉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失調解消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체계화된 민중종교가 不在할뿐만 아니라 기성종교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神明에 의한 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天主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주창(主唱)되고 있으나, 사실상 儒敎의 人道的인 것에 그쳐 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제세구민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莁),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神明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道術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達通할 수 있는 道通工夫를 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이미 도인(道人)이라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증산의 종교적 특성은 사회구조의 개혁방법에 대한 추구, 그러한 추구의 방법으로 제시된 종교적 방향에의 모색, 기성종교에 관한 모든 지식의 흡수,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소명의식의 발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4) 3) 유력(遊歷)을 통한 宗敎的 知識의 增大5) 여러 가지 서적을 탐독한 증산은 27세 되던 해에 더욱 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庚子년까지 3년동안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도통했다는 술객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1900년 30세 되던 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6)  유력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반 민중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욕구를 보다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지방으로의 유력은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관계로, 서울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서울은 외국과의 修交 이후 청, 일, 러시아, 미국, 이태리, 독일, 영국, 불란서, 네델란드 등 각국의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로의 건설, 광산의 채굴, 어업권의 확보, 각종 상업에의 종사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등을 포함하여 각국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천주교의 명동성당이 준공되고 改新敎의 교회와 병원 및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아관파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러일전쟁의 발생과 일본의 승리 예언, 한일 합방 및 그 후의 독립 예언, 마테오 리치의 언급 등 서교의 부분적 인용,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긍정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력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이 그의 종교적 성향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3년간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서구종교의 이질성, 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한 국가정체의 위기,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의 실태와 욕구 등을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구질서, 구체제 등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귀향하는 즉시 선령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살라 버린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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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 출생 및 어린시절 1

1. 出生 증산 강일순은 동학의 기운이 크게 무르익던 조선 왕조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년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의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진주이며, 부친 흥주(興周)씨와 모친 권씨(權氏)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9세를 일기로 1909년에 사망하였는데, 성(姓)은 강(姜)이요, 본명은 일순(一淳)이며, 호(号)는 증산(甑山)이다.1) 증산교에서는 그들이 上帝라 지칭하는 증산의 탄생, 곧 강세(降世)를, 증산이 이 세상에 미리 내 보낸 석가․예수․공자를 비롯한 聖者와 哲人들이 미리 알렸다고 한다.2) 증산의 태몽에 관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3)  “모친이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1870, 庚午年 9월),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석달만에’ 낳았다.”  “그를 낳을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며, 왼손바닥에 별무자(戊) 무늬가 있고 아래 입술안에 붉은 점이 있었다.” 2. 幼小時代  증산은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갖가지 비범한 행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구경했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해에 증산의 부친은 그 아들의 출중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하늘 천(天)자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여 그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하여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혼자서 태을 주문(太乙呪文)을 읽고, 七星經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부친에게 청하여 뒷뜰에다 별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근접을 금하고 하루 건너 암 꿩 한 마리와 견직물 두 자씩을 구해 들이더니… 2개월 후에는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거처했던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5) 이 뒤에 집으로 돌아와 자의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항상 장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 부친의 빚을 갚아 주거나, 모친의 잃어버린 모시 베를 찾아 준 일등의 기록도 多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증산이 열 살이 넘었을 때 하루는 그의 부친이 벼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와 닭의 무리가 벼를 쪼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새들을 쫓았다. 그것을 본 증산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계속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증산의 가정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의 부친이 부채(負債)까지 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빈곤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상류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빈곤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증산을 서당에 보냈고, 증산의 학문적인 소질은 남달리 뛰어나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그는 서당을 통한 수업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4-15세에 학업을 중지한 그는 사방을 주유하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머슴살이도 하였으며,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扶餘谷)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 깊이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6)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의 부친이 경제적인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은 신분적 지위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었고, 그것은 증산에게도 강조되었을 것이다. 머슴살이 및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을 더욱 영향을 깊게 하였으며, 동시에 증산은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그 당시에 극심했던 고부지방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 민중의 현실 및 그들의 욕구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7) 김은지: 증산교2 [02/03-16:33] 안나: 증산교2 [02/0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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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 출생 및 어린시절 1

1. 出生 증산 강일순은 동학의 기운이 크게 무르익던 조선 왕조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년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의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진주이며, 부친 흥주(興周)씨와 모친 권씨(權氏)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9세를 일기로 1909년에 사망하였는데, 성(姓)은 강(姜)이요, 본명은 일순(一淳)이며, 호(号)는 증산(甑山)이다.1) 증산교에서는 그들이 上帝라 지칭하는 증산의 탄생, 곧 강세(降世)를, 증산이 이 세상에 미리 내 보낸 석가․예수․공자를 비롯한 聖者와 哲人들이 미리 알렸다고 한다.2) 증산의 태몽에 관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3)  “모친이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1870, 庚午年 9월),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석달만에’ 낳았다.”  “그를 낳을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며, 왼손바닥에 별무자(戊) 무늬가 있고 아래 입술안에 붉은 점이 있었다.” 2. 幼小時代  증산은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갖가지 비범한 행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구경했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해에 증산의 부친은 그 아들의 출중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하늘 천(天)자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여 그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하여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혼자서 태을 주문(太乙呪文)을 읽고, 七星經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부친에게 청하여 뒷뜰에다 별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근접을 금하고 하루 건너 암 꿩 한 마리와 견직물 두 자씩을 구해 들이더니… 2개월 후에는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거처했던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5) 이 뒤에 집으로 돌아와 자의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항상 장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 부친의 빚을 갚아 주거나, 모친의 잃어버린 모시 베를 찾아 준 일등의 기록도 多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증산이 열 살이 넘었을 때 하루는 그의 부친이 벼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와 닭의 무리가 벼를 쪼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새들을 쫓았다. 그것을 본 증산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계속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증산의 가정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의 부친이 부채(負債)까지 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빈곤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상류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빈곤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증산을 서당에 보냈고, 증산의 학문적인 소질은 남달리 뛰어나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그는 서당을 통한 수업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4-15세에 학업을 중지한 그는 사방을 주유하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머슴살이도 하였으며,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扶餘谷)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 깊이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6)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의 부친이 경제적인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은 신분적 지위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었고, 그것은 증산에게도 강조되었을 것이다. 머슴살이 및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을 더욱 영향을 깊게 하였으며, 동시에 증산은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그 당시에 극심했던 고부지방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 민중의 현실 및 그들의 욕구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7) 김은지: 증산교2 [02/03-16:33] 안나: 증산교2 [02/0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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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 출생 및 어린시절 1

1. 出生 증산 강일순은 동학의 기운이 크게 무르익던 조선 왕조 고종(高宗) 8년 신미(辛未)년인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지금의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진주이며, 부친 흥주(興周)씨와 모친 권씨(權氏)사이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9세를 일기로 1909년에 사망하였는데, 성(姓)은 강(姜)이요, 본명은 일순(一淳)이며, 호(号)는 증산(甑山)이다.1) 증산교에서는 그들이 上帝라 지칭하는 증산의 탄생, 곧 강세(降世)를, 증산이 이 세상에 미리 내 보낸 석가․예수․공자를 비롯한 聖者와 哲人들이 미리 알렸다고 한다.2) 증산의 태몽에 관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3)  “모친이 친정에 가 있던 어느 날(1870, 庚午年 9월),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며 천하가 밝아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석달만에’ 낳았다.”  “그를 낳을 무렵에 부친이 비몽사몽간에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두르고 하늘로 뻗어 7일 동안 계속하였다.”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며, 왼손바닥에 별무자(戊) 무늬가 있고 아래 입술안에 붉은 점이 있었다.” 2. 幼小時代  증산은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칭호를 들었고 갖가지 비범한 행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곱살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을 얻어 장성한 후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아니하나, 농악은 흔히 구경했다고도 전해진다. 같은 해에 증산의 부친은 그 아들의 출중함을 알고 없는 살림에 훈장을 데려다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따라 읽으나 그 다음은 아무리 타일러도 읽지 않으므로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하늘 천(天)자에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지(地)자에 땅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여 그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하리니 돌려보내사이다”하여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냈다고 한다.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늘 혼자서 태을 주문(太乙呪文)을 읽고, 七星經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그가 부친에게 청하여 뒷뜰에다 별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근접을 금하고 하루 건너 암 꿩 한 마리와 견직물 두 자씩을 구해 들이더니… 2개월 후에는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거처했던 방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5) 이 뒤에 집으로 돌아와 자의로 외접(外接)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항상 장원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 부친의 빚을 갚아 주거나, 모친의 잃어버린 모시 베를 찾아 준 일등의 기록도 多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증산이 열 살이 넘었을 때 하루는 그의 부친이 벼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와 닭의 무리가 벼를 쪼으려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새들을 쫓았다. 그것을 본 증산은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계속 쫓으니 별안간 한낮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증산의 가정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의 부친이 부채(負債)까지 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빈곤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상류 계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빈곤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증산을 서당에 보냈고, 증산의 학문적인 소질은 남달리 뛰어나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해 그는 서당을 통한 수업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14-15세에 학업을 중지한 그는 사방을 주유하다가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거사막(巨沙幕)에서 머슴살이도 하였으며, 장성군 백양사 부근 부여곡(扶餘谷)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꾼으로 일하기도 하고, 금산사 심원암에 이르러 깊이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6)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은 신분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의 불일치에 기인한 심리적 좌절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의 부친이 경제적인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은 신분적 지위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었고, 그것은 증산에게도 강조되었을 것이다. 머슴살이 및 나무꾼 생활은 그의 실조의식을 더욱 영향을 깊게 하였으며, 동시에 증산은 주유생활(周遊生活)을 통해 그 당시에 극심했던 고부지방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일반 민중의 현실 및 그들의 욕구상태를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7) 김은지: 증산교2 [02/03-16:33] 안나: 증산교2 [02/0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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