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보관물: 2002-05-20

타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가끔 지나가다보면 “도”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고 덤비는 분들이 계십니다. 파수대를 들고 천주교 신자 집만을 찾아 다니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 그러다가 확 빠져 버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르시니까…. 타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것을 … 계속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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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의 시도

(4) 福音化를 위한 試圖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증산교의 모순성을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사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개념으로 구원의 진리를 설명해 내야 한다. 그것이 복음화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진리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증산교 구원관의 출발점이자 핵심인 解寃 즉 ‘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참된 恨은 무엇이며, 限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 복음화, 나아가 토착화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증산의 구원관에 있어 가장 핵심은 해원(解寃), 곧 ‘한(恨)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 해원(解寃)은 한국인의 현세중심적인 사고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恨이 ‘욕구 또는 갈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맺혀 있는 것’이라면 증산의 해원은 현세적인 것이다. 그 실천덕목(인간존중,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도 현세적인 것이다.  증산의 후천 선경(後天仙境)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다 보면 현세 중심적, 현세개혁적인 면을 간과(看過)하기 쉽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증산의 구원은 현세를 중심으로 두고 있다. 현세를 위한 解寃이요, 현세를 위한 相生이다. 증산교를 창립한 것도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다. 증산사상은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神보다 더 존엄하고, 만인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으로 아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그리하여 살맛나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행복은 현세안에서의 행복일 뿐이다. 결국 현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증산의 限界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갈망하고 있는데, 인간존재의 육체적 유한성은 죽음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의미추구는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인간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이지만, 영원한 삶에로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으로 인해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기에 인간의 궁극적인 恨은 죽음이다. 현세를 문제삼고 있는 증산은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恨을 풀지 못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恨을 풀어주는 ‘죽음의 解寃者’이신 것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주시는 ‘解寃의 뱃사공’, 죽음이라는 根源的인 限을 풀어주시는 ‘풀이의 전문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살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역사와 삶의 양식,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었다. 인간과 만물은 원래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수고는 죽음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永遠에로 이어져 의미(意味)를 지니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결국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현세의 삶 자체도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내세(來世)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리고 人間과 함께 하는 모든 現世的 狀況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현세집착적이라고 할만큼 현세를 중요시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망을 감싸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느님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그에 알맞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사랑도 함께 강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존엄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자체도 의미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인간구원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만민에게 전하게 명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할 뿐만 아니라, 전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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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의 시도

(4) 福音化를 위한 試圖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증산교의 모순성을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사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개념으로 구원의 진리를 설명해 내야 한다. 그것이 복음화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진리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증산교 구원관의 출발점이자 핵심인 解寃 즉 ‘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참된 恨은 무엇이며, 限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 복음화, 나아가 토착화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증산의 구원관에 있어 가장 핵심은 해원(解寃), 곧 ‘한(恨)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 해원(解寃)은 한국인의 현세중심적인 사고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恨이 ‘욕구 또는 갈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맺혀 있는 것’이라면 증산의 해원은 현세적인 것이다. 그 실천덕목(인간존중,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도 현세적인 것이다.  증산의 후천 선경(後天仙境)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다 보면 현세 중심적, 현세개혁적인 면을 간과(看過)하기 쉽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증산의 구원은 현세를 중심으로 두고 있다. 현세를 위한 解寃이요, 현세를 위한 相生이다. 증산교를 창립한 것도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다. 증산사상은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神보다 더 존엄하고, 만인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으로 아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그리하여 살맛나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행복은 현세안에서의 행복일 뿐이다. 결국 현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증산의 限界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갈망하고 있는데, 인간존재의 육체적 유한성은 죽음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의미추구는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인간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이지만, 영원한 삶에로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으로 인해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기에 인간의 궁극적인 恨은 죽음이다. 현세를 문제삼고 있는 증산은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恨을 풀지 못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恨을 풀어주는 ‘죽음의 解寃者’이신 것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주시는 ‘解寃의 뱃사공’, 죽음이라는 根源的인 限을 풀어주시는 ‘풀이의 전문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살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역사와 삶의 양식,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었다. 인간과 만물은 원래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수고는 죽음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永遠에로 이어져 의미(意味)를 지니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결국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현세의 삶 자체도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내세(來世)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리고 人間과 함께 하는 모든 現世的 狀況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현세집착적이라고 할만큼 현세를 중요시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망을 감싸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느님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그에 알맞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사랑도 함께 강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존엄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자체도 의미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인간구원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만민에게 전하게 명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할 뿐만 아니라, 전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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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의 시도

(4) 福音化를 위한 試圖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증산교의 모순성을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의 사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개념으로 구원의 진리를 설명해 내야 한다. 그것이 복음화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진리를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증산교 구원관의 출발점이자 핵심인 解寃 즉 ‘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참된 恨은 무엇이며, 限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 복음화, 나아가 토착화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증산의 구원관에 있어 가장 핵심은 해원(解寃), 곧 ‘한(恨)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 해원(解寃)은 한국인의 현세중심적인 사고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恨이 ‘욕구 또는 갈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맺혀 있는 것’이라면 증산의 해원은 현세적인 것이다. 그 실천덕목(인간존중,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도 현세적인 것이다.  증산의 후천 선경(後天仙境)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다 보면 현세 중심적, 현세개혁적인 면을 간과(看過)하기 쉽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증산의 구원은 현세를 중심으로 두고 있다. 현세를 위한 解寃이요, 현세를 위한 相生이다. 증산교를 창립한 것도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다. 증산사상은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이 神보다 더 존엄하고, 만인은 평등하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회복으로 아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그리하여 살맛나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행복은 현세안에서의 행복일 뿐이다. 결국 현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증산의 限界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갈망하고 있는데, 인간존재의 육체적 유한성은 죽음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의미추구는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인간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이지만, 영원한 삶에로의 궁극적인 갈망은 죽음으로 인해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기에 인간의 궁극적인 恨은 죽음이다. 현세를 문제삼고 있는 증산은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恨을 풀지 못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恨을 풀어주는 ‘죽음의 解寃者’이신 것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주시는 ‘解寃의 뱃사공’, 죽음이라는 根源的인 限을 풀어주시는 ‘풀이의 전문가’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살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역사와 삶의 양식,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었다. 인간과 만물은 원래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수고는 죽음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永遠에로 이어져 의미(意味)를 지니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결국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현세의 삶 자체도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내세(來世)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리고 人間과 함께 하는 모든 現世的 狀況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현세집착적이라고 할만큼 현세를 중요시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망을 감싸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느님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그에 알맞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사랑도 함께 강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존엄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자체도 의미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인간구원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만민에게 전하게 명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할 뿐만 아니라, 전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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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구원관 제시

(3) 그리스도교의 救援觀 提示 증산교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혼만을 구원하는 종교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당신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영광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 중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지닌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26)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닮은 존재, 곧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이다. 인간은 진선미(眞善美)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기에 진리를 알고 선한 것을 사랑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사랑의 내적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27-8)는 말씀처럼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하셨다. 인간은 原初的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있었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존재인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 곧 섭리(攝理)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느님처럼 되려 함으로써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을 등지게 되었다. 인간의 완전성은 완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하나, 그러한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생명을 등지게 되었다.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게 됨으로써 피조계의 유한성에 예속되었고, 그리하여 죽음에로 치닫게 된 것이다.  원래 하느님안에서 자연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었으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그러한 조화도 깨어지게 되었다. 죄악과 심각한 불평등 그리고 다툼과 재난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연은 온갖 엉겅퀴를 내고 동물마저 인간을 해치려 들었다. 인간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생명이신 하느님을 등지게 됨으로써 근원적인 죽음에로 이르게 되어 인간은 죽음앞에 허무한 존재,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죄악과 고통속에서 허덕이다가 죽음에 걸려 넘어져 버리는 우리네 삶은 하느님을 등진 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죄와 죄로 인한 파멸의 결과를 두고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친히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당신을 낮추시고 참으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셨다. 그리고는 부활하셨다. 그 분은 참 인간으로 오시어 참 인간으로서 고통받으시고 죽으시고 그리하여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결과인 죽음을 물리쳐 주셨다. 원래 인간이 하느님과 누리던 친교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는 하느님만이 사해주실 수 있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을 상대로 범한 것이기에 인간적 차원에서는 갚을 수 없다. 오직 하느님편에서만이 없애주실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 없습니다.”(사도 4,12) 인간의 구원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죽음앞에 사라져 버리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존재임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던 것처럼 인간은 부활하여 하느님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존재, 거룩하신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결국은 무덤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의미없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시의 상태, 곧 원죄 이전의 상태보다 더 영광을 받게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활찬송(Exsulltet)에서는 첫 인간이었던 아담의 죄를 두고 “오 복된 탓이여!”라고 노래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이 인간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인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가는 문’이 되었다. 영혼만이 아니라 靈肉의 완전한 인간이 새로운 삶에로 불리게 되었다. 하느님을 밝히 알게 되어 至福直觀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따라 ‘변화된 모습으로, 영적인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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