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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보관물: 2002-05-26
결론
결론 19세기 조선왕조는 정치․경제․ 사회․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서 최제우는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濟宣이라는 이름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濟愚로 바꿨다. 그는 이런 생각 속에서 20대에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고, 민중의 생활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한울님’께 도를 얻어 ‘東學’을 창도했다. 수운의 신 즉 ‘한울님’은 인간의 화복과 자연계를 다스리는 全知全能하신 초월적 존재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따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나면서부터 모시고 있는 내재적인 존재다. 이런 ‘한울님’을 잘 모시기 위해 기본이 되는 마음 자세는 誠․敬․信의 마음이며, 그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三七字呪文이다. 인간은 주문을 통해 ‘한울님’을 섬길 수 있고 ‘한울님’을 알아모실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조건으로 誠敬의 마음이 전제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呪文을 외우고 하느님을 섬길 때 인간은 天命과 天理를 알아들어 道成德立하여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 방법 또한 유가처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하고 일부 계층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誠․敬․信의 마음으로 道를 깨닫고, ‘한울님’을 섬길 때 聖人․君子가 되는 것이다. 이런 東學의 理想的 人間觀은 유교처럼 폐쇄적인 人間觀이 아니라, 개방적이며 보편적인 人間觀이다. 최제우의 人間觀을 최시형은 실생활에 구체화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胞胎說을 주장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해서 汎神論으로 빠졌다. 손병희는 人乃天의 원리로 인간 본성을 규명하고 인본주의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 그는 性心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인간의 무궁함을 설명했고, ‘侍’를 覺天으로 풀이하여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한울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깨닫고 자신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인간 본질을 깨닫게 했다. 東學의 人間觀은 근대 이후 인간을 존중하고, 나가 만물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사상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간을 너무 중요시하여 신적 위치로 격상시키면서, 정작 신의 위치는 격하시켰다. 人乃天思想은 無神論的 성격과 汎神論的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런 東學의 사상은 근대적 人間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운의 侍天主思想은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東學의 입장은 유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事人如天思想은 평등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을 恭敬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東學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愛主愛人思想과 비슷하다. 그러나 손병희가 侍天主思想을 발전시킨 人乃天思想은 근대적 人間觀형성에 도움은 되었으나 無神論과 汎神論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면 인간과 하늘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인데 굳이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고, 내가 중요한데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잘못 해석하면 극도의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손병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잇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Imago Dei’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Imago Dei란 하느님께서 인간은 자기의 형상대로 人格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닮은 것이지 똑같은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느님과의 거리감을 인식하며, 모상의 원천인 하느님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구체적인 인간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
결론 19세기 조선왕조는 정치․경제․ 사회․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서 최제우는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濟宣이라는 이름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濟愚로 바꿨다. 그는 이런 생각 속에서 20대에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고, 민중의 생활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한울님’께 도를 얻어 ‘東學’을 창도했다. 수운의 신 즉 ‘한울님’은 인간의 화복과 자연계를 다스리는 全知全能하신 초월적 존재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따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나면서부터 모시고 있는 내재적인 존재다. 이런 ‘한울님’을 잘 모시기 위해 기본이 되는 마음 자세는 誠․敬․信의 마음이며, 그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三七字呪文이다. 인간은 주문을 통해 ‘한울님’을 섬길 수 있고 ‘한울님’을 알아모실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조건으로 誠敬의 마음이 전제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呪文을 외우고 하느님을 섬길 때 인간은 天命과 天理를 알아들어 道成德立하여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 방법 또한 유가처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하고 일부 계층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誠․敬․信의 마음으로 道를 깨닫고, ‘한울님’을 섬길 때 聖人․君子가 되는 것이다. 이런 東學의 理想的 人間觀은 유교처럼 폐쇄적인 人間觀이 아니라, 개방적이며 보편적인 人間觀이다. 최제우의 人間觀을 최시형은 실생활에 구체화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胞胎說을 주장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해서 汎神論으로 빠졌다. 손병희는 人乃天의 원리로 인간 본성을 규명하고 인본주의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 그는 性心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인간의 무궁함을 설명했고, ‘侍’를 覺天으로 풀이하여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한울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깨닫고 자신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인간 본질을 깨닫게 했다. 東學의 人間觀은 근대 이후 인간을 존중하고, 나가 만물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사상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간을 너무 중요시하여 신적 위치로 격상시키면서, 정작 신의 위치는 격하시켰다. 人乃天思想은 無神論的 성격과 汎神論的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런 東學의 사상은 근대적 人間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운의 侍天主思想은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東學의 입장은 유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事人如天思想은 평등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을 恭敬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東學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愛主愛人思想과 비슷하다. 그러나 손병희가 侍天主思想을 발전시킨 人乃天思想은 근대적 人間觀형성에 도움은 되었으나 無神論과 汎神論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면 인간과 하늘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인데 굳이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고, 내가 중요한데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잘못 해석하면 극도의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손병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잇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Imago Dei’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Imago Dei란 하느님께서 인간은 자기의 형상대로 人格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닮은 것이지 똑같은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느님과의 거리감을 인식하며, 모상의 원천인 하느님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구체적인 인간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
결론 19세기 조선왕조는 정치․경제․ 사회․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서 최제우는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濟宣이라는 이름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濟愚로 바꿨다. 그는 이런 생각 속에서 20대에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고, 민중의 생활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한울님’께 도를 얻어 ‘東學’을 창도했다. 수운의 신 즉 ‘한울님’은 인간의 화복과 자연계를 다스리는 全知全能하신 초월적 존재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따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나면서부터 모시고 있는 내재적인 존재다. 이런 ‘한울님’을 잘 모시기 위해 기본이 되는 마음 자세는 誠․敬․信의 마음이며, 그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三七字呪文이다. 인간은 주문을 통해 ‘한울님’을 섬길 수 있고 ‘한울님’을 알아모실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조건으로 誠敬의 마음이 전제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呪文을 외우고 하느님을 섬길 때 인간은 天命과 天理를 알아들어 道成德立하여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 방법 또한 유가처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하고 일부 계층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誠․敬․信의 마음으로 道를 깨닫고, ‘한울님’을 섬길 때 聖人․君子가 되는 것이다. 이런 東學의 理想的 人間觀은 유교처럼 폐쇄적인 人間觀이 아니라, 개방적이며 보편적인 人間觀이다. 최제우의 人間觀을 최시형은 실생활에 구체화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胞胎說을 주장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해서 汎神論으로 빠졌다. 손병희는 人乃天의 원리로 인간 본성을 규명하고 인본주의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 그는 性心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인간의 무궁함을 설명했고, ‘侍’를 覺天으로 풀이하여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한울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깨닫고 자신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인간 본질을 깨닫게 했다. 東學의 人間觀은 근대 이후 인간을 존중하고, 나가 만물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사상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간을 너무 중요시하여 신적 위치로 격상시키면서, 정작 신의 위치는 격하시켰다. 人乃天思想은 無神論的 성격과 汎神論的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런 東學의 사상은 근대적 人間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운의 侍天主思想은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東學의 입장은 유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事人如天思想은 평등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을 恭敬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東學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愛主愛人思想과 비슷하다. 그러나 손병희가 侍天主思想을 발전시킨 人乃天思想은 근대적 人間觀형성에 도움은 되었으나 無神論과 汎神論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면 인간과 하늘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인데 굳이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고, 내가 중요한데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잘못 해석하면 극도의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손병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잇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Imago Dei’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Imago Dei란 하느님께서 인간은 자기의 형상대로 人格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닮은 것이지 똑같은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느님과의 거리감을 인식하며, 모상의 원천인 하느님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구체적인 인간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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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과 현대인 상
제3절 ‘원본(原本)’과 ‘현대인상(現代人像)’ 서론 현대는 과학의 최첨단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 아직도 거리마다 비합리적이고도 원시․기복적인 굿이 성행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절에서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心性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巫의 원본과 現代人像을 비교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現代人像이란, 현대인의 心性에 기반을 둔 人間像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선 밝혀야 할 것은 현대의 개념과 다음으로 현대인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의 현대의 개념 기준은 역사적 시간에 바탕을 둔 고대와 현대의 개념도 아니고, 단순히 문명에 기준을 둔 원시와 현대의 의미가 아니고, 그 이전에 인간이 역사와 문명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과 그 근원(根源)에 기준을 두고자 한다. 본론 인간은 원시 역사에서 볼 때 자연과 未分化의 상태에 있었다. 즉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 속에 자연 상태 그대로 있기를 원해 자연에 맡겨진 상태다. 神을 믿고 神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인간의 心性이 주어진 자연적 상황 그대로 자연에 순종하는 상태의 未分性이다(표1-A).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자연을 分化된 상대적 개체임을 깨닫고 자연으로부터 오는 인간 존재의 저해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道具를 만들어 내게 된다(표1-B). 예를 들어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 자연의 공간과 시간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려는 교통수단(자동차, 비행기 등), 그리고 각종 기계 등의 도구들이 오늘날 인간들의 문명 척도가 되었다. 인간은 이것을 자연의 利用이나 活用이라 하여 표1-A의 未分的 心性의 自然中心에서 표1-B의 人間中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된 독립적 개체임을 인식하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 놓은 사건을 인간 쪽에서 존재의 지속 측정 단위 개념인 시간을 설정하여 이 단위 기준으로 측정하고 있는 것을 역사적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분화된 인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안에서 한 번 더 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표1-C에서 보듯이 B의 M에서 C의 a로 분열이 생기고, 여기서 다시 C의 b와 같이 M M M M 로 각기 개체분화를 일으켜 질서있게 횡적 수평선상에 일직선으로 위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分化된 개체가 횡적 수평선상에서 規格化하여 연계적 유대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분화된 개체 M M M M 가 각기 自我中心의 인력(引力)에 의해 이 分化된 개체들을 자기만의 자아로 흡수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引力을 견제하기 위해서, 또 개체 지속을 위해서 개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인위적 개체분화질서(人爲的 個體分化秩序)인 것이다. 그래서 미분적 순환지속(未分的 循環持續)의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간끼리 서로 개체로 分化되어 그 分化된 개체 인간이 지속되기 위해, 수평적이고 규격화해야 하는 인위적 개체분화질서를 만들어 놓고 인간이 그 속에서 인위적 질서에 스스로 얽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연을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상대적 개체로 보아 그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인위적 결과로 얻어지는 경험, 이 경험을 토대로 한 論理, 이것에 기초를 둔 과학과 합리성에 매달려 文名化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면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위적 경험과 이론에 기초를 둔 합리성 위주의 인위적 상황을 ‘現代’라는 의미로 보고, 이런 인위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現代人’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는 인위적 경험과 이론․과학․합리성․문명화의 획일적 질서 쪽에만 서 있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상황의 총화(總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발전 단계상 인간은 상호 완전한 수평적 분화의 상황(인위적 상황) 속에서 규격화, 합리화된 질서 속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心性은 그렇게 획일적으로 규격화되지 않는다 사실이다. 합리성에 바탕을 둔 현대의 이상적 질서가 획일적으로 규격화시키려는 규범을 만들어 인간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또 강제성을 띤 法으로 발전해 인간을 스스로 구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현대사회에 제반 법규가 있고, 이것을 감독하고 집행하는 경찰과 법관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획일화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표C-b와 같이 인간이 합리적으로 획일화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의 인위적 상황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적 질서에 불과한 것이고 이런 현대 상황속에 살면서도 인간이 그 이상적 질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직면한 현실 – 획일적이고 규격화하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양자를 함께 갖고 있으며, 이 양자 중에서 어디에 비중을 더 두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표가 필요하다. 이 표는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되어 가면서도 다시 자연으로 향하는 과정의 양면이 종합된 표이다. 표2-D의 M 상단 화살표 N→C 방향은 자연적 상황과 인간의 分化 및 그 행위이고, M 하단 화살표 C→N 방향은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心性的 欲求여서 인간 M은 N과 C의 중간에 위치하여 인간은 N과 C의 양면적 유동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 양자를 함께 소유하려는 욕구가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편리한대로 이 양자 중의 비중이 바뀔 수 있는 유동성을 보이고 있다. 표2-D의 N→C 방향 즉, 인위적 상황의 욕구는 도구의 사용과 도구의 발달로 인해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는 인간중심의 인위적인 상황으로서, 인간 상호간의 분쟁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 질서를 요구하는 제반 법규가 생겨나고 이것을 시행 감독하기 위한 경찰․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심성의 또 다른 한 면은 합리성에 기초를 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여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상황을 원하는 심성도 겸하게 된다. 인간 서로가 균형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인위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그렇게 균형 있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동시에, 경찰과 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 자체가 자연적인 상태로 있기를 원해 필요에 따라서는 自我中心의 未分性으로 인해서 인간 상호간에 충돌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인위적 상황은 보다 더 기계적으로 문명화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만큼 그것과는 반대인 자연의 보호를 갈망하게 되고, 이런 양면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을 바라면서도 그 인위적 상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반대편의 자연적 상황을 갈망하게 된다(예: 일(인위적 상황)과 휴식(자연적인 상황), 50分수업에 10分간 휴식, 방학, 회사와 직장, 군대 등에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시간의 분리 등) 인위적 상황의 현대 사회는 학교․사회․공장․군대가 필요하고 감옥도 필요하여, 그 인위적 질서는 계속 강화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어서 이런 것들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 현대 사회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은 그 인위적 질서의 속박만큼 그렇게 그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것의 상태가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욕구한다. 이렇게 현대인의 심성은 순환(循環)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런 순환적 현상은 인간이 인위적 질서에 묶여 있게 되면 여기서 탈출하여 그 인위적 질서가 가해지기 이전, 원래 있었던 그대로의 자연적인 상태로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자유롭게 되기 위해 편리한 대로 자연적 상황에 비중을 두는 유동적 심성이라 할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라 스스로 생각하는 인위적 상황 속에서 인위적인 상황에 비중을 두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연적 상황을 또 그 인위적인 것의 비중만큼 원하는 심성, 그래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동시에 갖으려는 양면적 유동성의 순환적 심성에 기반을 둔 현대인의 심성, 이것을 現代人像으로 본다. 이렇게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함께 갖으려는 現代人像의 양면적 유동성 자체가 이 양자를 엄격히 분리시키지 못하는 未分性이며, 자연적 상황에서 인위적 상황으로, 여기서 다시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순환적 현상이 이 양자를 각기 分化된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카오스’적 未分性에 기반을 둔 순환성이라 생각된다. 이 외에도 합리적이어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에서는 인간이 마약을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그 반대로 합리적이어야 하는 사회일수록 진한 마약을 통해 현실계의 질서를 초월해 환각(幻覺)의 세계를 체험하려는 경향이 높아간다. 이렇게 복잡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카오스’적 未分性의 희열(喜悅) 때문에 사람들은 마약을 사용하고 술도 마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위적 방편인 마약이안 술을 통해서라도 인위적 상황의 현실을 초월해 ‘카오스’적 未分性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속박을 거부하고 영원히 자유로운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心性은 현대인 뿐만 아니고 자연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민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욕구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의 영구지속욕구(永久持續欲求)로 나타난다. 결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여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은 그 인위적 상황 그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그 인위적 상황이 요구하는 질서 속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에서 벗어나 그 인위적 상황 이전에 원래 있었던 자연적인 것의 상태로 영원히 자유롭게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인위적 상황의 현실적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시간 밖의 영원을 생각하며, 그렇게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현대인의 心性은 ‘코스모스’ 의 현실을 초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코스모스’의 현실을 초월하려는 현대인의 심성이 인위적 상황과 상반되는 자연적 상황으로 바뀌어 순환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 양자를 ‘코스모스’ 밖의 ‘카오스’쪽에서 미분적 동일 근원으로 보는 ‘아키패턴’의 思考 延長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심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위적 상황을 원하면서도 자연적 상황을 함께 갖으려는 양면적 未分性이 현대인의 심성 속에 未分化 상태로 있게 되어 現代人像이 양면적 未分化 상태로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아키패턴’의 思考가 연장되는 현대인의 이런 양면적 未分性의 心性으로 인해 ‘카오스’쪽에서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그렇게 영원히 만들려는 巫俗의 굿이 합리적이어야 하는 인위적 상황의 현대 도시 –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파고 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인위적 상황과 자연적 상황이 分化되지 않은 양면적이고 유동적인 미분성으로 인해 이런 현대인의 心性 속에 있는 미분성의 ‘原本’思考와 巫俗의 ‘原本’思考가 일치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인위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巫俗의 굿에 참여하게 되면 현대인의 心性은 이미 그 인위적 상황의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무당을 믿고 무당과 함께 미분성의 ‘原本’思考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위적 상황의 편리한 점을 좇아 현대 도시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巫俗을 비롯한 불교나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분화하지 못한 미분성의 ‘原本’思考를 배제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될 수 없어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이 조화있게 균형을 유지해 가야 할 인간의 생존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카오스’의 未分性이 영원히 변치않는 人間思考의 ‘原本’(arche-pattern)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인간 활동의 동력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원본과 현대인 상
제3절 ‘원본(原本)’과 ‘현대인상(現代人像)’ 서론 현대는 과학의 최첨단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 아직도 거리마다 비합리적이고도 원시․기복적인 굿이 성행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절에서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心性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巫의 원본과 現代人像을 비교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現代人像이란, 현대인의 心性에 기반을 둔 人間像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선 밝혀야 할 것은 현대의 개념과 다음으로 현대인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의 현대의 개념 기준은 역사적 시간에 바탕을 둔 고대와 현대의 개념도 아니고, 단순히 문명에 기준을 둔 원시와 현대의 의미가 아니고, 그 이전에 인간이 역사와 문명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과 그 근원(根源)에 기준을 두고자 한다. 본론 인간은 원시 역사에서 볼 때 자연과 未分化의 상태에 있었다. 즉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 속에 자연 상태 그대로 있기를 원해 자연에 맡겨진 상태다. 神을 믿고 神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인간의 心性이 주어진 자연적 상황 그대로 자연에 순종하는 상태의 未分性이다(표1-A).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자연을 分化된 상대적 개체임을 깨닫고 자연으로부터 오는 인간 존재의 저해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道具를 만들어 내게 된다(표1-B). 예를 들어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 자연의 공간과 시간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려는 교통수단(자동차, 비행기 등), 그리고 각종 기계 등의 도구들이 오늘날 인간들의 문명 척도가 되었다. 인간은 이것을 자연의 利用이나 活用이라 하여 표1-A의 未分的 心性의 自然中心에서 표1-B의 人間中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된 독립적 개체임을 인식하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 놓은 사건을 인간 쪽에서 존재의 지속 측정 단위 개념인 시간을 설정하여 이 단위 기준으로 측정하고 있는 것을 역사적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분화된 인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안에서 한 번 더 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표1-C에서 보듯이 B의 M에서 C의 a로 분열이 생기고, 여기서 다시 C의 b와 같이 M M M M 로 각기 개체분화를 일으켜 질서있게 횡적 수평선상에 일직선으로 위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分化된 개체가 횡적 수평선상에서 規格化하여 연계적 유대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분화된 개체 M M M M 가 각기 自我中心의 인력(引力)에 의해 이 分化된 개체들을 자기만의 자아로 흡수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引力을 견제하기 위해서, 또 개체 지속을 위해서 개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인위적 개체분화질서(人爲的 個體分化秩序)인 것이다. 그래서 미분적 순환지속(未分的 循環持續)의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간끼리 서로 개체로 分化되어 그 分化된 개체 인간이 지속되기 위해, 수평적이고 규격화해야 하는 인위적 개체분화질서를 만들어 놓고 인간이 그 속에서 인위적 질서에 스스로 얽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연을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상대적 개체로 보아 그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인위적 결과로 얻어지는 경험, 이 경험을 토대로 한 論理, 이것에 기초를 둔 과학과 합리성에 매달려 文名化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면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위적 경험과 이론에 기초를 둔 합리성 위주의 인위적 상황을 ‘現代’라는 의미로 보고, 이런 인위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現代人’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는 인위적 경험과 이론․과학․합리성․문명화의 획일적 질서 쪽에만 서 있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상황의 총화(總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발전 단계상 인간은 상호 완전한 수평적 분화의 상황(인위적 상황) 속에서 규격화, 합리화된 질서 속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心性은 그렇게 획일적으로 규격화되지 않는다 사실이다. 합리성에 바탕을 둔 현대의 이상적 질서가 획일적으로 규격화시키려는 규범을 만들어 인간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또 강제성을 띤 法으로 발전해 인간을 스스로 구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현대사회에 제반 법규가 있고, 이것을 감독하고 집행하는 경찰과 법관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획일화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표C-b와 같이 인간이 합리적으로 획일화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의 인위적 상황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적 질서에 불과한 것이고 이런 현대 상황속에 살면서도 인간이 그 이상적 질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직면한 현실 – 획일적이고 규격화하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양자를 함께 갖고 있으며, 이 양자 중에서 어디에 비중을 더 두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표가 필요하다. 이 표는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되어 가면서도 다시 자연으로 향하는 과정의 양면이 종합된 표이다. 표2-D의 M 상단 화살표 N→C 방향은 자연적 상황과 인간의 分化 및 그 행위이고, M 하단 화살표 C→N 방향은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心性的 欲求여서 인간 M은 N과 C의 중간에 위치하여 인간은 N과 C의 양면적 유동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 양자를 함께 소유하려는 욕구가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편리한대로 이 양자 중의 비중이 바뀔 수 있는 유동성을 보이고 있다. 표2-D의 N→C 방향 즉, 인위적 상황의 욕구는 도구의 사용과 도구의 발달로 인해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는 인간중심의 인위적인 상황으로서, 인간 상호간의 분쟁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 질서를 요구하는 제반 법규가 생겨나고 이것을 시행 감독하기 위한 경찰․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심성의 또 다른 한 면은 합리성에 기초를 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여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상황을 원하는 심성도 겸하게 된다. 인간 서로가 균형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인위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그렇게 균형 있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동시에, 경찰과 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 자체가 자연적인 상태로 있기를 원해 필요에 따라서는 自我中心의 未分性으로 인해서 인간 상호간에 충돌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인위적 상황은 보다 더 기계적으로 문명화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만큼 그것과는 반대인 자연의 보호를 갈망하게 되고, 이런 양면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을 바라면서도 그 인위적 상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반대편의 자연적 상황을 갈망하게 된다(예: 일(인위적 상황)과 휴식(자연적인 상황), 50分수업에 10分간 휴식, 방학, 회사와 직장, 군대 등에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시간의 분리 등) 인위적 상황의 현대 사회는 학교․사회․공장․군대가 필요하고 감옥도 필요하여, 그 인위적 질서는 계속 강화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어서 이런 것들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 현대 사회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은 그 인위적 질서의 속박만큼 그렇게 그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것의 상태가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욕구한다. 이렇게 현대인의 심성은 순환(循環)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런 순환적 현상은 인간이 인위적 질서에 묶여 있게 되면 여기서 탈출하여 그 인위적 질서가 가해지기 이전, 원래 있었던 그대로의 자연적인 상태로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자유롭게 되기 위해 편리한 대로 자연적 상황에 비중을 두는 유동적 심성이라 할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라 스스로 생각하는 인위적 상황 속에서 인위적인 상황에 비중을 두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연적 상황을 또 그 인위적인 것의 비중만큼 원하는 심성, 그래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동시에 갖으려는 양면적 유동성의 순환적 심성에 기반을 둔 현대인의 심성, 이것을 現代人像으로 본다. 이렇게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함께 갖으려는 現代人像의 양면적 유동성 자체가 이 양자를 엄격히 분리시키지 못하는 未分性이며, 자연적 상황에서 인위적 상황으로, 여기서 다시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순환적 현상이 이 양자를 각기 分化된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카오스’적 未分性에 기반을 둔 순환성이라 생각된다. 이 외에도 합리적이어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에서는 인간이 마약을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그 반대로 합리적이어야 하는 사회일수록 진한 마약을 통해 현실계의 질서를 초월해 환각(幻覺)의 세계를 체험하려는 경향이 높아간다. 이렇게 복잡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카오스’적 未分性의 희열(喜悅) 때문에 사람들은 마약을 사용하고 술도 마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위적 방편인 마약이안 술을 통해서라도 인위적 상황의 현실을 초월해 ‘카오스’적 未分性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속박을 거부하고 영원히 자유로운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心性은 현대인 뿐만 아니고 자연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민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욕구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의 영구지속욕구(永久持續欲求)로 나타난다. 결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여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은 그 인위적 상황 그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그 인위적 상황이 요구하는 질서 속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에서 벗어나 그 인위적 상황 이전에 원래 있었던 자연적인 것의 상태로 영원히 자유롭게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인위적 상황의 현실적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시간 밖의 영원을 생각하며, 그렇게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현대인의 心性은 ‘코스모스’ 의 현실을 초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코스모스’의 현실을 초월하려는 현대인의 심성이 인위적 상황과 상반되는 자연적 상황으로 바뀌어 순환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 양자를 ‘코스모스’ 밖의 ‘카오스’쪽에서 미분적 동일 근원으로 보는 ‘아키패턴’의 思考 延長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심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위적 상황을 원하면서도 자연적 상황을 함께 갖으려는 양면적 未分性이 현대인의 심성 속에 未分化 상태로 있게 되어 現代人像이 양면적 未分化 상태로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아키패턴’의 思考가 연장되는 현대인의 이런 양면적 未分性의 心性으로 인해 ‘카오스’쪽에서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그렇게 영원히 만들려는 巫俗의 굿이 합리적이어야 하는 인위적 상황의 현대 도시 –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파고 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인위적 상황과 자연적 상황이 分化되지 않은 양면적이고 유동적인 미분성으로 인해 이런 현대인의 心性 속에 있는 미분성의 ‘原本’思考와 巫俗의 ‘原本’思考가 일치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인위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巫俗의 굿에 참여하게 되면 현대인의 心性은 이미 그 인위적 상황의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무당을 믿고 무당과 함께 미분성의 ‘原本’思考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위적 상황의 편리한 점을 좇아 현대 도시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巫俗을 비롯한 불교나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분화하지 못한 미분성의 ‘原本’思考를 배제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될 수 없어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이 조화있게 균형을 유지해 가야 할 인간의 생존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카오스’의 未分性이 영원히 변치않는 人間思考의 ‘原本’(arche-pattern)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인간 활동의 동력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