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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보관물: 2002-05-27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박재만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한국 교회는 빗나간 사회적 및 종교적 흐름으로부터 크게 도전받고 있다. 신흥종교들과 여러 빗나간 영성운동들 그리고 이설들이 여러 방법과 경로를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그에 기울어져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러한 현상들의 위험 요소들과 현혹방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면서 그에 대처해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원 및 사명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신앙생활의 주체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 개념을 정립하고 참다운 그리스도교 영성과 영성생활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어서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유익한 몇 가지 사항들을 고찰한 후, 영의 식별기준 및 척도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론으로 한국 사회의 빗나간 영성운동과 흐름의 문제점들을 분석, 고찰하면서 그에 대한 교회의 대책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 이해 오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은 인간에 관한 학문들과 개방적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무진장 담겨있는 신비로운 창조물인 인간 존재에 대해 훨씬 풍요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인간에 관한 학문들이란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 생물학, 의학 등인데, 이 학문들은 끊임없이 각기 인간의 측면들을 분업적으로 깊이 탐구함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를 더 많이 알아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이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계시진리인 성서에 입각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정의해온 신학은 한 때 그러한 학문들이 신학을 배제하며 인간에 관해 연구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학설들을 조심스럽게 대하며 소외시키려 했다. 무신론, 영혼존재 부정, 유물론 등의 오류를 지닌 그 학문들이 실상 계시진리를 손상시킬 위험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편 유감스럽게도 그 학문들의 긍정적인 측면과 유익하고 중요한 지식 및 정보까지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오늘도 모든 논쟁이 끝나거나 상호 불신이 다 극복된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상황은 이미 바뀌었다. 학문적 분야에서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 사이에 많이 성숙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의 충돌은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 또는 하느님을 보는 방법이 다르고 또한 인간의 신앙적 행위에 대한 착안점이 다르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것이다. 심리학 등 인간에 관한 학문들은 오늘 일반적으로 신학적 본성의 문제에 대해 논란하겠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들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생활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거룩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분석하는 데 유익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웃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정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기도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정상적 신앙생활과 비정상적이고 빗나간 신앙생활을 구별해 내고 식별하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은 불가분적인 네 측면으로 구성된다. 일차적 측면은 생물학적 및 화학적 작용을 하는 신체, 물리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 대해 생물학, 생리학, 의학 등이 많이 연구하여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 측면은 심리적 및 지성적 측면이다. 이에 대해서는 심리학, 교육학 등이 연구하고 실험 .체험하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세 번째로 고찰 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정(情)적 측면이다. 이 분야에 대해선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이 기여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요소는 윤리적, 영적 차원이다. 이 분야는 신학에 고유하고도 특수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계시진리에 입각하여 이해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박재만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한국 교회는 빗나간 사회적 및 종교적 흐름으로부터 크게 도전받고 있다. 신흥종교들과 여러 빗나간 영성운동들 그리고 이설들이 여러 방법과 경로를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그에 기울어져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러한 현상들의 위험 요소들과 현혹방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면서 그에 대처해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원 및 사명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신앙생활의 주체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 개념을 정립하고 참다운 그리스도교 영성과 영성생활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어서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유익한 몇 가지 사항들을 고찰한 후, 영의 식별기준 및 척도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론으로 한국 사회의 빗나간 영성운동과 흐름의 문제점들을 분석, 고찰하면서 그에 대한 교회의 대책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 이해 오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은 인간에 관한 학문들과 개방적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무진장 담겨있는 신비로운 창조물인 인간 존재에 대해 훨씬 풍요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인간에 관한 학문들이란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 생물학, 의학 등인데, 이 학문들은 끊임없이 각기 인간의 측면들을 분업적으로 깊이 탐구함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를 더 많이 알아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이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계시진리인 성서에 입각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정의해온 신학은 한 때 그러한 학문들이 신학을 배제하며 인간에 관해 연구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학설들을 조심스럽게 대하며 소외시키려 했다. 무신론, 영혼존재 부정, 유물론 등의 오류를 지닌 그 학문들이 실상 계시진리를 손상시킬 위험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편 유감스럽게도 그 학문들의 긍정적인 측면과 유익하고 중요한 지식 및 정보까지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오늘도 모든 논쟁이 끝나거나 상호 불신이 다 극복된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상황은 이미 바뀌었다. 학문적 분야에서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 사이에 많이 성숙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의 충돌은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 또는 하느님을 보는 방법이 다르고 또한 인간의 신앙적 행위에 대한 착안점이 다르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것이다. 심리학 등 인간에 관한 학문들은 오늘 일반적으로 신학적 본성의 문제에 대해 논란하겠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들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생활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거룩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분석하는 데 유익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웃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정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기도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정상적 신앙생활과 비정상적이고 빗나간 신앙생활을 구별해 내고 식별하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은 불가분적인 네 측면으로 구성된다. 일차적 측면은 생물학적 및 화학적 작용을 하는 신체, 물리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 대해 생물학, 생리학, 의학 등이 많이 연구하여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 측면은 심리적 및 지성적 측면이다. 이에 대해서는 심리학, 교육학 등이 연구하고 실험 .체험하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세 번째로 고찰 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정(情)적 측면이다. 이 분야에 대해선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이 기여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요소는 윤리적, 영적 차원이다. 이 분야는 신학에 고유하고도 특수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계시진리에 입각하여 이해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영성과 빗나간 영성 박재만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한국 교회는 빗나간 사회적 및 종교적 흐름으로부터 크게 도전받고 있다. 신흥종교들과 여러 빗나간 영성운동들 그리고 이설들이 여러 방법과 경로를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그에 기울어져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러한 현상들의 위험 요소들과 현혹방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면서 그에 대처해야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원 및 사명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신앙생활의 주체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 개념을 정립하고 참다운 그리스도교 영성과 영성생활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어서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유익한 몇 가지 사항들을 고찰한 후, 영의 식별기준 및 척도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론으로 한국 사회의 빗나간 영성운동과 흐름의 문제점들을 분석, 고찰하면서 그에 대한 교회의 대책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 이해 오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은 인간에 관한 학문들과 개방적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무진장 담겨있는 신비로운 창조물인 인간 존재에 대해 훨씬 풍요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인간에 관한 학문들이란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 생물학, 의학 등인데, 이 학문들은 끊임없이 각기 인간의 측면들을 분업적으로 깊이 탐구함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를 더 많이 알아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이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계시진리인 성서에 입각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정의해온 신학은 한 때 그러한 학문들이 신학을 배제하며 인간에 관해 연구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학설들을 조심스럽게 대하며 소외시키려 했다. 무신론, 영혼존재 부정, 유물론 등의 오류를 지닌 그 학문들이 실상 계시진리를 손상시킬 위험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편 유감스럽게도 그 학문들의 긍정적인 측면과 유익하고 중요한 지식 및 정보까지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오늘도 모든 논쟁이 끝나거나 상호 불신이 다 극복된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상황은 이미 바뀌었다. 학문적 분야에서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 사이에 많이 성숙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신학과 인간에 관한 학문들의 충돌은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 또는 하느님을 보는 방법이 다르고 또한 인간의 신앙적 행위에 대한 착안점이 다르다는 것을 상호 인정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것이다. 심리학 등 인간에 관한 학문들은 오늘 일반적으로 신학적 본성의 문제에 대해 논란하겠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들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생활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거룩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분석하는 데 유익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웃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정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기도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정상적 신앙생활과 비정상적이고 빗나간 신앙생활을 구별해 내고 식별하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은 불가분적인 네 측면으로 구성된다. 일차적 측면은 생물학적 및 화학적 작용을 하는 신체, 물리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 대해 생물학, 생리학, 의학 등이 많이 연구하여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 측면은 심리적 및 지성적 측면이다. 이에 대해서는 심리학, 교육학 등이 연구하고 실험 .체험하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세 번째로 고찰 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정(情)적 측면이다. 이 분야에 대해선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이 기여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요소는 윤리적, 영적 차원이다. 이 분야는 신학에 고유하고도 특수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계시진리에 입각하여 이해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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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적 종교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계급의 비대화(肥大化)였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은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며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위에 정치구조상의 혼란에 기인한 관리들의 민중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반 민중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塗炭) 그 자체였다. 그 결과 각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부터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1894년 1월까지 30년동안에 전국에 걸쳐 41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특히 관리들의 수탈이 심한 전라도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동학혁명 직전인 1893년 11월에는 고부, 전주, 익산 등 3군(郡)에서 한꺼번에 발생하였다. 정부의 탄압도 이와 함께 거세어졌는데, 民亂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던 관계로 동학교도들은 관리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탄압이 심한 만큼 민중들의 저항도 거세어졌고, 결국 동학혁명의 기치(旗幟)를 높이 날리게 되었다. 이는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인 대중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민중의 열망과 욕구가 뭉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결국 외국군대의 개입과 동학조직 내의 분열, 무기의 원시성, 중간계급(소재산 소유자, 적당한 교육을 받은 자)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교도들은 재산을 압류당하고 극심한 탄압에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때 동학혁명은 초기에는 잠재되어 있던 일반 민중의 욕구를 극대화시켜 이에 참여할 경우 신정부의 수립과 복지사회의 건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지만, 이것이 실패함으로써 혁명에 가담한 일부 민중은 극대화된 욕구의 충족수단을 상실함하고 심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혁명의 부산물로 나타난 사회적 혼란 및 관군과 日兵, 민포군(民包軍) 등으로부터 받게 된 보복은 그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이 처음으로 발생하였던 전라도 지방이 더욱 심했고, 특히 전봉준이 봉기했던 고부(古阜-증산의 출생지)지방과 그가 군관과 최후의 결전을 했던 태인, 금구(金溝) 등지에서 더욱 심했다. 또한 1895년에는 유교적 전통사상의 단절을 뜻하는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각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의병들은 한때 위력을 떨쳤으나 1896년 국왕의 포고문과 선무작업(宣撫作業)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잔존(殘存)해 있던 의병들이 화적으로 전환되기도 하여 민중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쳤다. 3. 종교적 상황 동학혁명의 실패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혼란은 신흥종교로서의 기대를 모았던 동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와 허탈감을 갖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문호개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구문화는 국내의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1866년 대박해(大迫害) 이후 1878년부터 다소 탄압이 풀린 西學(天主敎)뿐만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온 신교(改新敎)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일반 민중들에게는 기독교 사상이 아직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래(在來)의 종교인 儒敎와 佛敎 및 道敎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지 못했다. 유교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반상차별(班常差別)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고, 불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되고 산으로 은거처를 찾는 등 일반민중에게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도교는 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에는 일반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화된 종교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 사이에 크게 성행한 것은 오히려 조선 초기부터 전해오던 정감록(鄭鑑錄) 사상이었다. 정감록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868년과 1870년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정감록에는 진인사상(眞人思想), 신도사상(新都思想), 승지신앙(勝地信仰), 남조선 신앙(南朝鮮 信仰)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진인사상이란 메시아적 왕의 출현에 대한 대망(待望)이고, 신도사상은 時運에 의해 낡은 왕조는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서서 새 서울을 세운다는 믿음이며, 승지신앙은 亂時에 피하기만 하면 절대 안전하다는 피난지에 대한 신앙이고, 남조선 신앙이란 낙원이 남쪽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정감록은 조선말기의 쇠약한 국가정체와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성행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히 갖추어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민간에 대두하게 됨으로서 민중의 조선왕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고, 그것은 동학혁명의 발생과 그 추진력에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열강의 침략 및 기성종교의 허약 내지는 미조직화에 의해 1894년 이후부터는 정감록이 더욱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의 종교적 문화적 상황은 사회구조의 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극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生의 혼란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을 제시하여 불안을 면(免)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표상체계(表象體系)와 확신체계(確信體系)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국의 영향에 의한 문화갈등현상은 기존 규범체계의 와해(互解)를 가져와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도덕적인 규제력을 상실한 이른바 아노미 상태(Anomi)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동학혁명이 전개되었고, 증산이 출생하고 성장하였던 호남지방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증산의 本家나 外家가 위치한 古阜 지방은 민란과 동학혁명이 발생한 지역으로서 지방관리의 착취와 수탈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1)
사회 경제적 종교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계급의 비대화(肥大化)였다. 이로 인해 과거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은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며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위에 정치구조상의 혼란에 기인한 관리들의 민중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일반 민중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탄(塗炭) 그 자체였다. 그 결과 각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4년부터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1894년 1월까지 30년동안에 전국에 걸쳐 41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특히 관리들의 수탈이 심한 전라도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동학혁명 직전인 1893년 11월에는 고부, 전주, 익산 등 3군(郡)에서 한꺼번에 발생하였다. 정부의 탄압도 이와 함께 거세어졌는데, 民亂의 주모자들이 대부분 동학교도였던 관계로 동학교도들은 관리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탄압이 심한 만큼 민중들의 저항도 거세어졌고, 결국 동학혁명의 기치(旗幟)를 높이 날리게 되었다. 이는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차라리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인 대중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민중의 열망과 욕구가 뭉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결국 외국군대의 개입과 동학조직 내의 분열, 무기의 원시성, 중간계급(소재산 소유자, 적당한 교육을 받은 자)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교도들은 재산을 압류당하고 극심한 탄압에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때 동학혁명은 초기에는 잠재되어 있던 일반 민중의 욕구를 극대화시켜 이에 참여할 경우 신정부의 수립과 복지사회의 건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지만, 이것이 실패함으로써 혁명에 가담한 일부 민중은 극대화된 욕구의 충족수단을 상실함하고 심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혁명의 부산물로 나타난 사회적 혼란 및 관군과 日兵, 민포군(民包軍) 등으로부터 받게 된 보복은 그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이 처음으로 발생하였던 전라도 지방이 더욱 심했고, 특히 전봉준이 봉기했던 고부(古阜-증산의 출생지)지방과 그가 군관과 최후의 결전을 했던 태인, 금구(金溝) 등지에서 더욱 심했다. 또한 1895년에는 유교적 전통사상의 단절을 뜻하는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각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의병들은 한때 위력을 떨쳤으나 1896년 국왕의 포고문과 선무작업(宣撫作業)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잔존(殘存)해 있던 의병들이 화적으로 전환되기도 하여 민중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쳤다. 3. 종교적 상황 동학혁명의 실패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혼란은 신흥종교로서의 기대를 모았던 동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와 허탈감을 갖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문호개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서구문화는 국내의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1866년 대박해(大迫害) 이후 1878년부터 다소 탄압이 풀린 西學(天主敎)뿐만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온 신교(改新敎)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일반 민중들에게는 기독교 사상이 아직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래(在來)의 종교인 儒敎와 佛敎 및 道敎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지 못했다. 유교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반상차별(班常差別)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고, 불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되고 산으로 은거처를 찾는 등 일반민중에게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도교는 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에는 일반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조직화된 종교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 사이에 크게 성행한 것은 오히려 조선 초기부터 전해오던 정감록(鄭鑑錄) 사상이었다. 정감록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868년과 1870년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정감록에는 진인사상(眞人思想), 신도사상(新都思想), 승지신앙(勝地信仰), 남조선 신앙(南朝鮮 信仰)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진인사상이란 메시아적 왕의 출현에 대한 대망(待望)이고, 신도사상은 時運에 의해 낡은 왕조는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서서 새 서울을 세운다는 믿음이며, 승지신앙은 亂時에 피하기만 하면 절대 안전하다는 피난지에 대한 신앙이고, 남조선 신앙이란 낙원이 남쪽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정감록은 조선말기의 쇠약한 국가정체와 사회적 혼란을 계기로 성행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히 갖추어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이 민간에 대두하게 됨으로서 민중의 조선왕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고, 그것은 동학혁명의 발생과 그 추진력에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열강의 침략 및 기성종교의 허약 내지는 미조직화에 의해 1894년 이후부터는 정감록이 더욱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말기의 종교적 문화적 상황은 사회구조의 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극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민중은 生의 혼란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을 제시하여 불안을 면(免)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표상체계(表象體系)와 확신체계(確信體系)를 갖지 못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국의 영향에 의한 문화갈등현상은 기존 규범체계의 와해(互解)를 가져와 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도덕적인 규제력을 상실한 이른바 아노미 상태(Anomi)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동학혁명이 전개되었고, 증산이 출생하고 성장하였던 호남지방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증산의 本家나 外家가 위치한 古阜 지방은 민란과 동학혁명이 발생한 지역으로서 지방관리의 착취와 수탈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