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총서 3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내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 적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 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버리려야 떼어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 욕은, 끈덕지게 도인들을 붙들어 오뇌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쓸모 없게 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로 계발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전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 님이 오셔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의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전이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 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전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각 다른 모양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세인 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 진리는 어떤 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악한 마음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 악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 서에서는 어떠한 의지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정 지 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서랴. 그러므로 이 새진 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시려고 애써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쟁에서이긴 나라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강대국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서양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내적인 이념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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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2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크게 갈라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의 기쁨은 청빈을 즐기는 도인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 그가 이상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 적인 심령세계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에로 노 저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 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 그들이 제시한 주의와 사상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 개혁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큘레시아]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큘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니,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오늘의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적이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이 또 있다. 음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연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본질세계에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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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2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크게 갈라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의 기쁨은 청빈을 즐기는 도인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 그가 이상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 적인 심령세계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에로 노 저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 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 그들이 제시한 주의와 사상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 개혁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큘레시아]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큘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니,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오늘의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적이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이 또 있다. 음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연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본질세계에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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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크게 갈라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의 기쁨은 청빈을 즐기는 도인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 그가 이상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 적인 심령세계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에로 노 저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 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 그들이 제시한 주의와 사상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 개혁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큘레시아]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큘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니,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오늘의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적이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이 또 있다. 음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연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본질세계에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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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총                 서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개인의 조그만 일로부터 역사를 좌우하는 큰일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보다 행복해지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인가 ?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래의 의미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옳지 못한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에서 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들의 생활 있지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로마서 3장 10 – 11절1))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비참한 형편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장 22 – 24절2))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악한 마음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돌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 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지니고서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신론과 무신론을 두고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악이 도리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절대적인 정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거슬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악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한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려는 이 무지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 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 그리고 내세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나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 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고 무지에서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려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 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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