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신 글
-
-
-

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메시아강림준비시대
제6장 메시아강림준비시대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예수님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탕감보귀하기 위하여는, 기독교 신도들도 교황이 <아비뇽>의 포로생활에서 <로마>로 돌아온 뒤, <메사아> 재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계속되는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듬> 이후 4,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 강림준비시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담>으로부터 6,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은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성전을 신축하고, 또 <말라기>선지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율법을 공부하고 신앙의 쇄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등을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중세 암흑시대의 어둠을 뚫고 새로운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던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약 40년 준비기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강림준비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대를 다시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모든 기곡교 신도들은, 마치 애급에서 <요셉>을 만날 때까지의 <야곱>가정이나, 또 예수님을 맞을 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복귀섭리시대는 율법과 제사 등의 외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였으므로, <메시아>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1 이스라엘은, <페르샤> <그리이스> <에집트>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에 지배되어 외적인 고난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귀섭리연장시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와 신앙의 내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2 <이스라엘>은 내적인 순나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곧 이 시대에는 문예부흥의 주도이념인 인문주의와 그에 따라 일어난 계몽사조, 그리고 종교개혁에 따라 부르짖게 된 신앙의 자유 등에 의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기독교 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인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강림을 위한 400년 준비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그의 재림을 위한 400년 준비기간이 있게 된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이 두 시대에 대해서, 각각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초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 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B.C.565~485)로 하여금 힌두교를 발전시켜 불교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그리이스>에서는 <소크라테스>(B.C.470~399)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B.C.552~479)로 하여금 유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Hebraism)를 수습하고 <헬라>문화(Hellenism) 및 불교(Buddhism) 유교(Confucism)등의 종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을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안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을 앞도구 <메시아>강림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셨던 그 환경 조성의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오게 된 시대가 문예부흥시대였다. 그러므로 문예부흥시대는 <메시아>재강림을 위한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시대였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바와 같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은, 모두 이 문예부흥시대로부터 급격히 시작되어,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성숙시켜나온 것이다. 즉 예수님 때에는 <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인하여 지중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대한 정치적 판도와, 사면팔방으로 트인 교통과, <헬라>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범한 문화적 판도 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는 평면적인 기대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재림 때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열강들의 융흥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기반으로한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판도는 전 세계에 펼쳐졌고, 교통 및 통신의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동서의 거리는 극도로 단축되었으며, 언어와 문화는 세걔쩍으로 교류되어, <메시아> 재강림을 위한 사조가 자유롭고도 신속하게 전 인류의 가슴 속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그 평면적인 판도가 완전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재림하시면, 그의 진리와 사상을 급속도로 전파하여 단시일내에 세계화시키는데, 이것이 그대로 적절한 평면적 기대가 되어지리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메시아강림준비시대
제6장 메시아강림준비시대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예수님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탕감보귀하기 위하여는, 기독교 신도들도 교황이 <아비뇽>의 포로생활에서 <로마>로 돌아온 뒤, <메사아> 재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지나서야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계속되는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듬> 이후 4,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메시아> 강림준비시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담>으로부터 6,000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민족은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성전을 신축하고, 또 <말라기>선지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율법을 공부하고 신앙의 쇄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등을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중세 암흑시대의 어둠을 뚫고 새로운 복음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던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약 40년 준비기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강림준비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대를 다시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모든 기곡교 신도들은, 마치 애급에서 <요셉>을 만날 때까지의 <야곱>가정이나, 또 예수님을 맞을 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복귀섭리시대는 율법과 제사 등의 외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였으므로, <메시아>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1 이스라엘은, <페르샤> <그리이스> <에집트>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에 지배되어 외적인 고난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귀섭리연장시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와 신앙의 내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에 있어서의 제2 <이스라엘>은 내적인 순나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곧 이 시대에는 문예부흥의 주도이념인 인문주의와 그에 따라 일어난 계몽사조, 그리고 종교개혁에 따라 부르짖게 된 신앙의 자유 등에 의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기독교 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인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강림을 위한 400년 준비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그의 재림을 위한 400년 준비기간이 있게 된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이 두 시대에 대해서, 각각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초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 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B.C.565~485)로 하여금 힌두교를 발전시켜 불교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그리이스>에서는 <소크라테스>(B.C.470~399)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B.C.552~479)로 하여금 유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Hebraism)를 수습하고 <헬라>문화(Hellenism) 및 불교(Buddhism) 유교(Confucism)등의 종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을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안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을 앞도구 <메시아>강림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셨던 그 환경 조성의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오게 된 시대가 문예부흥시대였다. 그러므로 문예부흥시대는 <메시아>재강림을 위한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시대였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바와 같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은, 모두 이 문예부흥시대로부터 급격히 시작되어,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성숙시켜나온 것이다. 즉 예수님 때에는 <로마>제국의 발흥으로 인하여 지중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대한 정치적 판도와, 사면팔방으로 트인 교통과, <헬라>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범한 문화적 판도 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는 평면적인 기대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재림 때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열강들의 융흥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기반으로한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판도는 전 세계에 펼쳐졌고, 교통 및 통신의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동서의 거리는 극도로 단축되었으며, 언어와 문화는 세걔쩍으로 교류되어, <메시아> 재강림을 위한 사조가 자유롭고도 신속하게 전 인류의 가슴 속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그 평면적인 판도가 완전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재림하시면, 그의 진리와 사상을 급속도로 전파하여 단시일내에 세계화시키는데, 이것이 그대로 적절한 평면적 기대가 되어지리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댓글 남기기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제5절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치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를 탕감복귀케 하시려고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들어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유대>민족도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왕국시대를 세우신 것은 교황과 국왕을 중심하고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로 재림하시는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를 인계해 드림으로써, <메시아>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이사야 9장 6절1), 누가복음 1장 33절2)). 그러나 국왕과 그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해야 할 교황들이 부패한 가운데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들, 그리고 정부 대신들과 관리와 기술자 등 많은 <유대>인들이 <비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70년 기간이 있었고(예레미아 39전 1~10절3), 역대기하 24장, 역대기하 25절), <페르샤>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을 해방시킨 후, 3차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여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준비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때까지의 140년기간이 있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노정을 걸어야 했었다. 교황과 승려들은 그들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위에 십자군전쟁에 패함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한편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제도가 몰락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이 커지면서 교황과 국왕과의 충돌은 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 충돌되어, 일시 그에게 금고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1대를 지나서 1305년에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었고, 거기에서 70년간 역대의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그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었다. 그가 서거한 뒤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바리>의 감독 <울바누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우게 되었었다. 이 분리는 다음 세기에 이르러 개혁회의에서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1409년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분리되어온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함으로써 한때 세사람의 교황이 정립하게 되었었다. 그 뒤 다시 감동과 대감독 외에, 신학자 왕후 사절 등 많은 참석자로써 <콘스탄트>대회를 개최하여, 세사람의 교황을 일제히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교황선출의 권한을 추기경들로부터 빼앗아,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던 이 회의에로 옮겼다(1418년). 이 회는 그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 기구를 입헌 군주제로 할 목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권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4세기의 모든 회의의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회의에 최고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부패한 교황과 승려들을 제거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교황권은 그들이 포로되기 전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위클리프>나 <후스> 같은 개혁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이 1309년으로부터 70년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같혔다가, 세 교황으로 분립되었던 노정을 거쳐 다시 <로마>교회를 중심한 교황전제정치로 복귀된 후, 1517년에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의 약 210년간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70년간 포로되었다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치와 신앙의 쇄신을 일으킬 때까지의 210년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제5절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치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를 탕감복귀케 하시려고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들어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유대>민족도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왕국시대를 세우신 것은 교황과 국왕을 중심하고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로 재림하시는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를 인계해 드림으로써, <메시아>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이사야 9장 6절1), 누가복음 1장 33절2)). 그러나 국왕과 그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해야 할 교황들이 부패한 가운데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들, 그리고 정부 대신들과 관리와 기술자 등 많은 <유대>인들이 <비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70년 기간이 있었고(예레미아 39전 1~10절3), 역대기하 24장, 역대기하 25절), <페르샤>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을 해방시킨 후, 3차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여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준비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때까지의 140년기간이 있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노정을 걸어야 했었다. 교황과 승려들은 그들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위에 십자군전쟁에 패함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한편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제도가 몰락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이 커지면서 교황과 국왕과의 충돌은 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 충돌되어, 일시 그에게 금고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1대를 지나서 1305년에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었고, 거기에서 70년간 역대의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그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었다. 그가 서거한 뒤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바리>의 감독 <울바누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우게 되었었다. 이 분리는 다음 세기에 이르러 개혁회의에서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1409년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분리되어온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함으로써 한때 세사람의 교황이 정립하게 되었었다. 그 뒤 다시 감동과 대감독 외에, 신학자 왕후 사절 등 많은 참석자로써 <콘스탄트>대회를 개최하여, 세사람의 교황을 일제히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교황선출의 권한을 추기경들로부터 빼앗아,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던 이 회의에로 옮겼다(1418년). 이 회는 그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 기구를 입헌 군주제로 할 목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권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4세기의 모든 회의의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회의에 최고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부패한 교황과 승려들을 제거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교황권은 그들이 포로되기 전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위클리프>나 <후스> 같은 개혁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이 1309년으로부터 70년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같혔다가, 세 교황으로 분립되었던 노정을 거쳐 다시 <로마>교회를 중심한 교황전제정치로 복귀된 후, 1517년에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의 약 210년간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70년간 포로되었다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치와 신앙의 쇄신을 일으킬 때까지의 210년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제5절 유대민족 포로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전이상을 복귀할 수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치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를 탕감복귀케 하시려고 <이스라엘>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들어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유대>민족도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왕국시대를 세우신 것은 교황과 국왕을 중심하고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로 재림하시는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를 인계해 드림으로써, <메시아>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이사야 9장 6절1), 누가복음 1장 33절2)). 그러나 국왕과 그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해야 할 교황들이 부패한 가운데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들, 그리고 정부 대신들과 관리와 기술자 등 많은 <유대>인들이 <비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70년 기간이 있었고(예레미아 39전 1~10절3), 역대기하 24장, 역대기하 25절), <페르샤>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을 해방시킨 후, 3차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여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준비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때까지의 140년기간이 있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노정을 걸어야 했었다. 교황과 승려들은 그들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위에 십자군전쟁에 패함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한편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제도가 몰락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이 커지면서 교황과 국왕과의 충돌은 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 충돌되어, 일시 그에게 금고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1대를 지나서 1305년에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었고, 거기에서 70년간 역대의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그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었다. 그가 서거한 뒤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바리>의 감독 <울바누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우게 되었었다. 이 분리는 다음 세기에 이르러 개혁회의에서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1409년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분리되어온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함으로써 한때 세사람의 교황이 정립하게 되었었다. 그 뒤 다시 감동과 대감독 외에, 신학자 왕후 사절 등 많은 참석자로써 <콘스탄트>대회를 개최하여, 세사람의 교황을 일제히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교황선출의 권한을 추기경들로부터 빼앗아,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던 이 회의에로 옮겼다(1418년). 이 회는 그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 기구를 입헌 군주제로 할 목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권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4세기의 모든 회의의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회의에 최고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부패한 교황과 승려들을 제거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교황권은 그들이 포로되기 전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위클리프>나 <후스> 같은 개혁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이 1309년으로부터 70년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에 같혔다가, 세 교황으로 분립되었던 노정을 거쳐 다시 <로마>교회를 중심한 교황전제정치로 복귀된 후, 1517년에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의 약 210년간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70년간 포로되었다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치와 신앙의 쇄신을 일으킬 때까지의 210년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