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복귀기대섭리시대

   제1장 복귀기대섭리시대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타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에서 논한 바와 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에서 논한 바와 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위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4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을 하늘 편으로 분립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 물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이었다.  둘째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마땅히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처지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 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가 있음을 조건 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인 처지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 성품적인 존재와 악 성품적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 악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인가 ?  가인과 아벨은 다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인 해와의 타락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쨋번은 천사장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이었으며, 둘쨋번은 아담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쨋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째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세기 3장 5절1))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쨋번의 타락행위는 첫쨋번의 행위가 분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서로 다른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번째 것이었던 천사장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을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두번째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나타내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차지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권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 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 때 이미 피조세계를 차지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세기 4장 7절2))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올 때에 애급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애급기 12장 29절3))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후손만이 법궤를 메고 갔었다(신명기 31장 25절4)).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5)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전 복중의 태아들이었던 장자에서를 미워하고 차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세기 48장 14절6))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세기 4장 3~5절7)).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브리서 11장 4절8)),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세기 4장 4절9)).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음으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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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Ⅳ. 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첫째로 여기에서도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쩡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명을 대신하시면서까지 기필코 그 뜻을 이루시려 하셨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절대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택함 받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을 중심한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인물이나 어떤 민족을 세우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명자를 세우시어 그 일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로 세례요한을 택하셨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으로 베드로를 택하셨고, 또 가룟유다를 12제자의 하나로 택하셨던 것이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한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택하셨었으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사명을 이방인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3장 46절, 마태복음 21장 33~43절). 이처럼 아무리 뜻 성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중심한 뜻의 성사는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례요한이나 가룟유다가 불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것을 못하게 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에 대하여는 일체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고 주관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큰 사명을 맡은 인물일수록, 그에게 오는 시련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으로 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쑤님이 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는, 아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믿음을 세워 그의 타락 전 입장을 탕감복귀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까지도 받으셔야 했었고 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까지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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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Ⅳ. 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첫째로 여기에서도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쩡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명을 대신하시면서까지 기필코 그 뜻을 이루시려 하셨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절대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택함 받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을 중심한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인물이나 어떤 민족을 세우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명자를 세우시어 그 일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로 세례요한을 택하셨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으로 베드로를 택하셨고, 또 가룟유다를 12제자의 하나로 택하셨던 것이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한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택하셨었으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사명을 이방인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3장 46절, 마태복음 21장 33~43절). 이처럼 아무리 뜻 성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중심한 뜻의 성사는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례요한이나 가룟유다가 불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것을 못하게 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에 대하여는 일체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고 주관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큰 사명을 맡은 인물일수록, 그에게 오는 시련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으로 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쑤님이 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는, 아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믿음을 세워 그의 타락 전 입장을 탕감복귀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까지도 받으셔야 했었고 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까지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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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Ⅳ. 예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첫째로 여기에서도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쩡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명을 대신하시면서까지 기필코 그 뜻을 이루시려 하셨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절대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택함 받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을 중심한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인물이나 어떤 민족을 세우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명자를 세우시어 그 일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로 세례요한을 택하셨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으로 베드로를 택하셨고, 또 가룟유다를 12제자의 하나로 택하셨던 것이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한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택하셨었으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사명을 이방인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3장 46절, 마태복음 21장 33~43절). 이처럼 아무리 뜻 성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중심한 뜻의 성사는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례요한이나 가룟유다가 불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것을 못하게 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에 대하여는 일체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고 주관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큰 사명을 맡은 인물일수록, 그에게 오는 시련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으로 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쑤님이 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는, 아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믿음을 세워 그의 타락 전 입장을 탕감복귀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까지도 받으셔야 했었고 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까지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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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주님을 중삼한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

   2. 재림주님을 중심한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실체노정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영적노정으로 출발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이다.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 메시아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출발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섭리는, 2천년의 유구한 역사노정을 지나서, 오늘날 세계쩍으로 그 영적 판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모세의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여호수아가 대신하여 실체노정으로 걸어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였던 것과같이,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영적 가나안 보귀노정을 재림하셔서 실체노정으로 걸으시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심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재림주님은 처음 오셨을 때에 실체로서 이루시려던 지상천국을 그대로 이루셔야 하기 때문에, 실체인간으로 지상에서 탄생하셔야 되는 것이다(후편 제6장 제2절 Ⅱ 참조).  그러나 재림주님은 초림 때의 복귀섭리노정을 탕감복귀하셔야 하기 때문에, 마치 그의 초림 때에 유대임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적 복귀섭리의 고난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과 같이, 재림때에 있어서도 만일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 영적인 고난의 노정을 다시 실체로써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나 그(예수님)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 버린 바 되어야 할찌니라”(누가복음 17장 25절1))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초림 때에, 그를 위하여 소명되었던 제1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 선민으로 세워가지고 새로이 영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올 수밖에 없으셨던 것과같이, 재림 때에도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들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을 세우시어 실체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아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이,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세례요한의 사명(요한복음 1장 23절2)을 가지고 올 선구자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재림주님 자신이 또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제3차 세계쩍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실체적으로 만드셔야 하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림주님은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하여도,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참 부모님을 세우시어(전편 제7장 제4절 Ⅰ.1)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아담에서 예수님을 거치어 재림주님에 이르기까지 세번째인 재림 때에는 당연히 그 섭리를 이루시게 되어 있으며, 더구나 후편 제4장 제7절에 논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 이후 2,000년의 영적 복귀섭리는, 그를 위한 사회 조성을 위하여 민주주의 시대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초림때에는 유대교의 반역자로 몰려서 돌아가셨지만, 그가 재림하시는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설혹 그가 이단자로 몰리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이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할지라도, 그가 세우시는 실체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 모시는 성도들이 못여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실체노정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조성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실체적인 기대>를 이루게 될 것만은 확실하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 때에는 반석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게 되어 있었고, 여호수아 때에는 반석보다 더 내적인 그 샘물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초림 때에는 기사이적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지만, 재림 때에는 그의 내적인 ‘말씀’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전편 제3장 제3절 Ⅱ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요한복음 1장 3절3))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목적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의 외적인 조건을 세우시어 복귀섭리를 이루어 나오시다가, 섭리역사의 종말에 이르러는 ‘말씀’의 실체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장 14절4))을 다시 보내시어 ‘말씀’을 중심하고 구원섭리를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심정의 인연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은 영적인 부모로서 인간을 실체의 자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최초로 하나님의 이성성상의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제1 실체대상으로서 인류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부모의 심정과 부부의 심정과 자녀의 심정으로 맺어진 가정을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3대상 목적을 이룬 4위기대인 것이다(전편 제1장 제2절 Ⅲ 참조).  이와같이 하나님은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계의 자녀들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이미 타락론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인간시조가 천사장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온 인류는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모두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마태복음 3장 7절5), 마태복음 23장 32절6), 요한복음 8장 44절7)). 그리하여 인간시조는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전편 제2장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타락인간을 복귀시켜 가지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세우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비밀을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위에서 논한바와 같이, 타락되어 살육행위를 마구했던 아담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에 이르러, 그의 둘째 아들로서 아벨의 입장이었던 함은 그의 실수로 인하여 비록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노아가 충성을 다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종들의 종’(창세기 9장 25절8))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전 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르러, 그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선민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나미의 종의 입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니(레우기 25장 55절9)),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예수님이 오신 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세우신 그의 <믿음의 기대> 위에 섰던 제자들은, 비로소 구약시대의 종된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으로 복귀되었었다. 그들이 하늘의 직계의 혈통적 자녀가 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에게 절대로 순종하여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선 예수님에게 영 육 아울러 접붙임을 받아서(로마서 11장 17절10)) 그와 일체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원죄 없는 독생자로 오셔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붙이어 일체가 되게 하심으로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붙이어 일체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 부모로서,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접붙이어 원죄를 벗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창조본연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한다(전편 제7장 제4절 참조). 그러므로 예쑤님은 돌 감람나무 된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접붙이게 하시기 위하여 참 감람나무의 중심으로 오셨던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으므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자리에 서 보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적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부활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신 후, 회개하고 돌아온 제자들의 신앙과 중절로 말미암아 영적인 <실체기대>가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영적인 기대 위에 영적인 메시아로 서신 예수님에게 영적인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성도들은 영적인 자녀로서만 설 수 있게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복귀섭리에 의한 하나님과 타락인간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후의 영적 부활섭리는, 마치 하나님이 영계를 먼저 창조하셨던 것과 같이 그러한 형의 영적세계를 먼저 복귀하여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타락인간은 아직 영적으로만 하나님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육적으로 내려오는 원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이와 같이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님 앞에 혈통이 다른 자녀이기 때문에 양자가 되는 것이다. 일찌기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여 양자 되기를 기다린다고 한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로마서 8장 23절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 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셔야 한다. 따라서 그는 초림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지상에서 탄생하셔서 초림 때의 노정을 다시 걸으심으로써 그것을 탕감복귀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재림 예수님은 ‘말씀’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조성하시어, 그 기대 위에서 온 인류를 영 육 아울러 접붙이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초림 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야곱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세 제자를 중심한 12제자를 세우심으로써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셨고, 다시 70문도를 세우심으로써 그 기대를 종족적인 기대에로 넓히려 하셨던 것과 같이, 그는 재림하셔서도 그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가정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 천주적인 것으로 복귀하시어, 그 기대 위에 천국을 이루는데까지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천국 건설의 목적을 빨리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제1차 이스라엘 선민을 세우심으로써 그 터전을 예비하셨었으나, 그들이 배반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로 세우셨던 것과 같이, 만일 재림 예수님의 천국건설 이상을 위하여 제2 이스라엘로 세워진 기독교 신도들이 또 그를 배반하면, 하나님은 부득이 그 제2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 선민을 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천한 기독교 신도들은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민족들과 같이, 가장 행복된 환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한편 가장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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