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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2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 님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 복귀섭리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13)에 반석은 곧 그리스오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에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14), 출애굽기 7장 1절15)),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16)),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17)) 회개함으로써 소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어떻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18)),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19)).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20)),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21)). 모세가 반석을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22)).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까지 이어져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찌기 저들이 광야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 육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23)).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24)).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26))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27)).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28)),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29)).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미리 보이신 것이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2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 님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 복귀섭리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13)에 반석은 곧 그리스오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에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14), 출애굽기 7장 1절15)),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16)),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17)) 회개함으로써 소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어떻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18)),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19)).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20)),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21)). 모세가 반석을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22)).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까지 이어져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찌기 저들이 광야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 육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23)).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24)).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26))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27)).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28)),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29)).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미리 보이신 것이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2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 님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 복귀섭리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13)에 반석은 곧 그리스오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에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14), 출애굽기 7장 1절15)),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16)),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17)) 회개함으로써 소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어떻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18)),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19)).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20)),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21)). 모세가 반석을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22)).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까지 이어져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찌기 저들이 광야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 육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23)).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24)).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26))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27)).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28)),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29)).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미리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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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믿음의 기대
ㄹ.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ㄱ.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ㄴ.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셧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빋드록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ㄱ)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잇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1))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2))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3)).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오르는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5), 민수기 27장 12~14절6)).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7)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8)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9)),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10)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차 오실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11)),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태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믿음의 기대
ㄹ.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ㄱ.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ㄴ.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셧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빋드록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ㄱ)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잇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1))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2))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3)).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오르는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5), 민수기 27장 12~14절6)).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7)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8)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9)),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10)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차 오실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11)),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태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