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신 글
-
-
-

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ㄷ.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1)).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2)).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3)).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4)).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5)).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6)). 이것을 본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7)).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8)).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9)).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10)). (1) 성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에로 들어왔따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11))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12))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성막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헤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13))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를, 성소는 유형 실체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14)),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에 있어서 잇그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15))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의, 작게는 성막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16)).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17))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물속에 장사지내고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와 이적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심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은 천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ㄷ.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1)).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2)).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3)).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4)).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5)).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6)). 이것을 본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7)).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8)).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9)).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10)). (1) 성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에로 들어왔따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11))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12))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성막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헤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13))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를, 성소는 유형 실체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14)),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에 있어서 잇그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15))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의, 작게는 성막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16)).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17))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물속에 장사지내고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와 이적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심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은 천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댓글 남기기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 – 실체기대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와 육축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욌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22)),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23)), 그 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24)),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기적과 10재앙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25)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시었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땅에서 희생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26))라는 말로써 바로를 속여 3일 동안 자유를 얻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소요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27)). 이왁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28), 민수기 33장 3절29)).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30)).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드르이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31)).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32)),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33), 시편 2장 9절34))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35)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을 떠난지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36)).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37)),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38)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39)). 고린도전서 10장 4절40)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41))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도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지만, 반석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와 성막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42)).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마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 – 실체기대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와 육축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욌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22)),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23)), 그 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24)),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기적과 10재앙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25)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시었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땅에서 희생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26))라는 말로써 바로를 속여 3일 동안 자유를 얻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소요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27)). 이왁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28), 민수기 33장 3절29)).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30)).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드르이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31)).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32)),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33), 시편 2장 9절34))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35)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을 떠난지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36)).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37)),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38)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39)). 고린도전서 10장 4절40)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41))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도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지만, 반석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와 성막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42)).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마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 – 실체기대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와 육축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욌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22)),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23)), 그 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24)),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기적과 10재앙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25)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시었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땅에서 희생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26))라는 말로써 바로를 속여 3일 동안 자유를 얻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소요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27)). 이왁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28), 민수기 33장 3절29)).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30)).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드르이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31)).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32)),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33), 시편 2장 9절34))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35)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을 떠난지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36)).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37)),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38)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39)). 고린도전서 10장 4절40)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41))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도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지만, 반석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와 성막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42)).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마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