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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보관물: 2002-05-14
죽음과 그 이후- 해방 후의 증산교
(3) 8․15 해방 이후 8․15해방을 맞아 지하로 숨어들었던 신흥종교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교단의 재확립은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민중의 정신적 지주의 상실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6․25動亂 이후 포교활동에 있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던 교단들은 일제시대에 각 교파를 창설하였던 교주들이 노쇠(老衰)에 의해 사망하게 되자,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교단의 주도권확보를 위한 갈등이 점차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롭게 교단분열을 맞게 됨으로써 그 움직임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증산교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學界에서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증산교의 교리와 사상 속에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적 유산이 크게 내포되어 있음을 주목한 학자들은 이 종교의 교리와 사상을 강연회 · 세미나 · 학술논문 등의 형식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동향에 따라 증산교 교단의 활동도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교단들은 경전을 출판하고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하는 한편, 새로운 교단들도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교단들로는 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 ·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 증산도(甑山道) 등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대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증산교 각 교단의 활동은 보다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의 민족종교로 성장하기 위하여 교리의 체계화 작업과 분열된 교단의 통합운동 및 타종교 그 중에서 한국고유의 신흥종교들과의 대화와 연합을 위한 활동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운계, 단군계 등의 한국고유계통의 신흥종교들과 민족종교로서의 인정을 받고 또 그에 따른 활동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많은 대화를 갖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현재 증산교의 정확한 교단 수는 밝혀지기 않고 있으며, 그 까닭은 한 교파내에서도 경전의 해석에 따라 여러 갈래의 분파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50여개 이상의 교단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한 신자의 수효는 20-30만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2) (4) 교단 분열의 이유 교단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은 증산의 교단 조직구조상의 특징에 근거한다. 즉 증산은 동학이 그 교단의 조직이 계급질서가 명백한 지위서열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내실의 완비보다는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동학에서와 같은 위계질서의 확립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추종자들간의 관계는 비록 증산이 추종자들에 대해 만국대장, 통제사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평등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단의 조직체계는 증산과 각 추종자들간의 師弟 關係에 의해 유지되었을 뿐 추종자들간의 유기적 관계가 되기는 어려웠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하면서 각기 다른 사람을 다른 장소에 데리고 가서 다른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추종자들 각자의 역할이 자신을 중심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직구조상의 특성이 증산의 사후 교단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특정 기성종교를 주 계통으로 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통합하고자 시도하였기에 각 종교계통을 표방하여 분파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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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그 이후-증산교의 분열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죽음과 그 이후-증산교의 분열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죽음과 그 이후-증산교의 분열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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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그 이후1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