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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보관물: 2002-05-14
죽음과 그 이후1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
죽음과 그 이후1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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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17 장11 거룩하신 아버지,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시어,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12 저는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했습니다.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가운데 하나도 멸망하지 않았으니 이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 계속 읽기
교단의 형성과 종교활동
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단의 형성과 종교활동
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