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보관물: 2002-05-20

한국사회의 전통혼합적 측면 – 유교, 불교

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카테고리: 타종교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한국사회의 전통혼합적 측면 – 유교, 불교

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한국사회의 전통혼합적 측면 – 유교, 불교

2. 韓國社會의 宗敎混合的 傳統의 延長이다. “옛적에는 판이 적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亂局)을 바로 잡을 수 있었거니와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混亂)을 바로 잡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증산은 현대사회의 諸 문제는 단일 기성종교의 역할이나 기능만으로는 수습될 수 없으며 모든 종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종교혼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각 종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기성종교의 기능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하에서 각 종교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증산교의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본다. 1) 유교적 측면 유교에 대해서는 그는 당시의 유교를 부유(腐儒)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유교가 조선시대 오백년간의 지배계급의 윤리로서 대두되었지만 그것이 조선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德을 찬양하고 誠·敬·信으로써 인격 수양을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忠․孝․烈의 윤리적 기강(紀綱)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교의 大學이나 孔子, 通鑑 및 書伝과 같은 경전을 추종자들에게 권함으로써 유교의 도덕적인 윤리와 범절을 자신의 종교에 포함시켰다.  2) 불교적 측면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즉 불교의 자기구원 방법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죄를 짓지 말고 전생부터의 묵은 業을 깨기 위하여 심법을 닦는 것인데, 수도의 도량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세계이다. 따라서 무수한 윤회과정을 통하여 점진적 자기 완성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도덕적 접근에는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자손을 두어야 하는 우주 자연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成佛한 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성불은 선천우주의 상극성에 비추어 보아 비현실적이며, 이에 따라 불교의 구원관에는 우주의 순환원리가 결여되어 있어 마음 닦는 것에 치중한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彌勒佛로 자인(自認)하였으며 자신이 세계에 강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동안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나는 원래 미륵불이었는데, 人世에 환생하여 5만년의 용화세계 運道를 짜놓고 금산사의 미륵불로 귀의하여 있을 것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찾아 오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2)고 함으로써 불교와 관련시키고 있다. 실제로 종도 김형렬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靈體로 신봉하였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지만 증산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륵불과 같은 이러한 진인 출현설은 정확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 폭압과 현실적 고통이 심할수록 민중에게 설득력있는 신앙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민중들은 미륵의 하생과 함께 이 眞人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민족운동의 퇴조기에는 일단 사라지거나 불신되지만 17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기록만 보더라도 민중운동의 상승기에는 역사의 새로운 움직임과 밀착되어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는 이야기처럼 긴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하고 규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미륵신앙의 증산교적 수용은 증산이 20세기에 출세한 미륵이므로 한층 더 구체화한 것이고, 증산사상에 나타나는 후천선경은 용화세계보다 현대감각에 알맞게 발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 댓글 남기기

평가

Ⅳ. 평가 1. 甑山敎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이다.  증산은 양반 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로 인해 학업마저 포기하고 머슴살이, 산판꾼 등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불일치로 인한 실조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실조의식은 그의 유력생활을 통해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에서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도 함께 성숙되었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은 국가 정체의 위기를 느낄 만큼 혼란한 상태였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의 위협과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암투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관리들의 민중수탈로 인해 일반 민중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신음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정체의 위기와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이 실패함으로써, 동학으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던 민중의 자아의식은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해 오히려 더 방황에로 접어들게 되었다. 관의 동학교도에 대한 색출과 처형은 삶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목격한 증산은 혼란한 시대에서 방향을 상실한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동학의 실패를 보고는 민중구제의 방법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현세적인 방법, 무력을 통한 방법으로는 성공치 못할 것으로 알고 종교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성종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화석화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동․서양의 교류로 인해 세계가 넓어짐으로써 이제는 어느 하나의 종교로는 안되고, 각 종교와 문화의 진액을 뽑아 하나로 뭉쳐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명을 주재하는 도술로써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불․선과 동학, 기독교, 민간신앙 등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大願寺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 조선사회의 제반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분석과 그 이전의 종교적 경험의 기초 위에서 극단의 종교적 경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이 구천의 上帝로써 이 세상의 혼란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온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내부의 심리내용을 외계로 투사(投射)시키는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심리적 과정은 E. Sapir의 말처럼 혼란한 사회에서 그것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존재 곧 증산 자신의 무력성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조건짓고 규제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궁극적이고 신성한 초월자를 경험하고 그 초월자와 자신을 의심없이 비합리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심리적 과정은 세계재건의 환상으로 전환된다. 불만스러웠던 과거는 멸망하고 새로운 유토피아가 전개된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는 그 세계를 향한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는 생각은 ‘과거의 열등과 우울과 불만에 차 있던 나’를 ‘앞으로 위대한 사명을 지닌 보람찬 존재인 나’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그는 경제적․신분적 불일치로 인한 좌절의식과 실조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노미적 상황에 빠진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得道를 하였다고 하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증산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심한 좌절의식에 빠져 있던 동학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증산의 카리스마를 통하여 동학혁명에서 성취하지 못한 사회구조의 개혁과 자신들의 욕구충족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추종자들의 욕구체계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이었던 것이다.  증산은 이러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한편, 그 욕구들을 하나의 민중사상(民衆思想)으로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종교사상(宗敎思想)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동학혁명을 통해 민중들이 실현하고자 하였던 平等, 平和, 民族主體의 欲求 등을 平等思想, 平和思想, 民族主體思想으로 체계화시켰고, 이것을 東學에서와 같이 직접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에 의해 실현시키려고 하기보다는 人存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이라고 하는 宗敎思想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볼 때 증산사상의 핵심사상인 人尊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 등은 증산의 새롭고 독특한 사상이라기 보다는 당시 일반 민중의 욕구를 종교적으로 體系化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증산교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 宗敎의 모습을 띤 大衆的인 解放運動이라 할 수 있다. 즉 後三國 時代의 견훤과 궁예의 彌勒革命 思想, 高麗末의 彌勒信仰 運動과 朝鮮時代 여환과 장길산의 彌勒革命 運動 등과 유사하나, 단지 다르다면 물리적 차원을 떠나 非世俗的인 次元인 宗敎的인 性格으로 轉換시켰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테고리: 타종교자료실 | 댓글 남기기

평가

Ⅳ. 평가 1. 甑山敎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이다.  증산은 양반 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로 인해 학업마저 포기하고 머슴살이, 산판꾼 등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불일치로 인한 실조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실조의식은 그의 유력생활을 통해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에서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도 함께 성숙되었다.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은 국가 정체의 위기를 느낄 만큼 혼란한 상태였다. 외부적으로는 서구 제국의 위협과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암투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관리들의 민중수탈로 인해 일반 민중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신음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정체의 위기와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이 실패함으로써, 동학으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던 민중의 자아의식은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해 오히려 더 방황에로 접어들게 되었다. 관의 동학교도에 대한 색출과 처형은 삶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목격한 증산은 혼란한 시대에서 방향을 상실한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동학의 실패를 보고는 민중구제의 방법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현세적인 방법, 무력을 통한 방법으로는 성공치 못할 것으로 알고 종교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성종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화석화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동․서양의 교류로 인해 세계가 넓어짐으로써 이제는 어느 하나의 종교로는 안되고, 각 종교와 문화의 진액을 뽑아 하나로 뭉쳐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명을 주재하는 도술로써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불․선과 동학, 기독교, 민간신앙 등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大願寺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 조선사회의 제반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분석과 그 이전의 종교적 경험의 기초 위에서 극단의 종교적 경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이 구천의 上帝로써 이 세상의 혼란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온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내부의 심리내용을 외계로 투사(投射)시키는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심리적 과정은 E. Sapir의 말처럼 혼란한 사회에서 그것을 구제할 수 없는 인간 존재 곧 증산 자신의 무력성을 인정하고, 이 세상을 조건짓고 규제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궁극적이고 신성한 초월자를 경험하고 그 초월자와 자신을 의심없이 비합리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심리적 과정은 세계재건의 환상으로 전환된다. 불만스러웠던 과거는 멸망하고 새로운 유토피아가 전개된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는 그 세계를 향한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는 생각은 ‘과거의 열등과 우울과 불만에 차 있던 나’를 ‘앞으로 위대한 사명을 지닌 보람찬 존재인 나’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그는 경제적․신분적 불일치로 인한 좌절의식과 실조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노미적 상황에 빠진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得道를 하였다고 하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증산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심한 좌절의식에 빠져 있던 동학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증산의 카리스마를 통하여 동학혁명에서 성취하지 못한 사회구조의 개혁과 자신들의 욕구충족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추종자들의 욕구체계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이었던 것이다.  증산은 이러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한편, 그 욕구들을 하나의 민중사상(民衆思想)으로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종교사상(宗敎思想)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동학혁명을 통해 민중들이 실현하고자 하였던 平等, 平和, 民族主體의 欲求 등을 平等思想, 平和思想, 民族主體思想으로 체계화시켰고, 이것을 東學에서와 같이 직접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에 의해 실현시키려고 하기보다는 人存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이라고 하는 宗敎思想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볼 때 증산사상의 핵심사상인 人尊思想, 解寃과 原始返本思想, 選民思想 등은 증산의 새롭고 독특한 사상이라기 보다는 당시 일반 민중의 욕구를 종교적으로 體系化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증산교는 時代的 不安을 克服하려는 宗敎的 試圖, 宗敎의 모습을 띤 大衆的인 解放運動이라 할 수 있다. 즉 後三國 時代의 견훤과 궁예의 彌勒革命 思想, 高麗末의 彌勒信仰 運動과 朝鮮時代 여환과 장길산의 彌勒革命 運動 등과 유사하나, 단지 다르다면 물리적 차원을 떠나 非世俗的인 次元인 宗敎的인 性格으로 轉換시켰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