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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보관물: 2002-05-27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1. 영성에 대당되는 의미들(영성에 관해 잘못 이해된 의미들) ①영성은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정서(감동, 감상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신비적 체험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을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에 이를 수 있고, 종교적 감동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에 있어 인격적 하느님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성생활에서 넓은 의미의 신비체험(세레, 기도, 감사로움 체험)이 필요하고, 좁은 의미의 신비체험<탈혼, 시현, 말씀(locution), 계시, 성흔, 공중부양 등 – 신흥종교가 이 점을 중시하며 강조함>이 있을 수 있다. 영성생활에서 정적측면이 무시될 수 없고, 오히려 중요요소이지만, 감정에만 호소되거나 예속되어서는 안된다(신흥종교들이 이런 경향이 있음). 지(知), 정(情), 의(義)의 조화가 필요하다(성령쇄신운동, 부흥회 등 이런 경우 주의를 요한다). ②영성생활을 어떤 영적 이상(理想)과 혼돈해선 안된다. 영성생활은 비현실적 영적관념으로 지배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영성인이다(루가6,46: 말씀따라 사는 사람 ; 갈라5,25 :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 혼돈할 경우 땅에 발을 디디고 뜬 구름잡으려는 격이 된다. 이원론적 영성으로 빗나갈 수 있다(육과 세상 경멸하는 영성). 구원(성화) = 은총 + 인간의 협력 : 기도, 성서읽고 묵상, 사랑실천, 복음선포. ③영성은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적 미덕(美德) 추구에 있지 않다. 윤리주의적 미덕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강요되는 의미없는 형식적 법이나 전통은 – 살아계신 하느님을 잃게하며, 소심하고 법칙준수로 자족자만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은 – 오늘의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을 형성한다(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잘 살았으나 그 근본정신(사랑)을 놓쳤음). 물론 교회법, 영성적 규범이나 지침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 근본정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영성생활의 본질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삶이다. 율법주의 자세는 Pelagianism을 추구하게 된다<Pelagius(+418)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은총과 구원에 대한 이설임. 원죄의 결과를 부정 내지 경시하면서 의화와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함. 은총을 그것을 쉽게 하는데 필요할 뿐이라고 함). ④영성은 경건한 자태(Pietismus)나 정적주의(Quietismus)가 아니다. 영성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밖으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영성은 무조건적 열심과 다르다. 더구나 빗나간 열심과 드르다. 그러므로 영성은 정체적일 수 없다. 영성생활은 보다 강한 생활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일치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삶은 자연히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Quietismus(靜寂)- 17C 블란서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설임. 그리스도교 완성이란 죄악과 싸우는 인간의 노력적 행위나 도덕성등의 외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도달하는 영혼의 정적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 상태에 도달한 이는 절제도, 성사생활도 필요없다>. ⑤영성은 물질이나 육을 배제하거나 벗어나 독립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제일의 가치로, 우선적 가치로 추구하는 것은 영성생활이 아니다. 영과 물질은 서로 배제하거나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고, 완전성에서 영이 물질보다 상위이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하위의 물질(물리적 측면)이 상위의 영(영성적 측면)에 종속될 때에 이루어진다. 인간은 영혼으로 대표되는 영과 육신(육체)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측면(물질)로이루어진 단일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만을 따라 가거나 그것을 먼저 추구하는 삶은 영성ㅇ적 삶이 아니다. 지나치게 현세적 재물이나 명예에 지착하고 있거나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이라면 올바른 영성생활이 아니다. 한편 육체와 물질을 거부하고 순수히 영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세상의 발전과 사회참여, 이웃사랑을 경시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신심주의이며 빗나간 영성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생활은 인간의 영과 육의 단일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이끄심인 영성이 상위적으로 모든 삶을 주관하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1. 영성에 대당되는 의미들(영성에 관해 잘못 이해된 의미들) ①영성은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정서(감동, 감상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신비적 체험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을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에 이를 수 있고, 종교적 감동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에 있어 인격적 하느님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성생활에서 넓은 의미의 신비체험(세레, 기도, 감사로움 체험)이 필요하고, 좁은 의미의 신비체험<탈혼, 시현, 말씀(locution), 계시, 성흔, 공중부양 등 – 신흥종교가 이 점을 중시하며 강조함>이 있을 수 있다. 영성생활에서 정적측면이 무시될 수 없고, 오히려 중요요소이지만, 감정에만 호소되거나 예속되어서는 안된다(신흥종교들이 이런 경향이 있음). 지(知), 정(情), 의(義)의 조화가 필요하다(성령쇄신운동, 부흥회 등 이런 경우 주의를 요한다). ②영성생활을 어떤 영적 이상(理想)과 혼돈해선 안된다. 영성생활은 비현실적 영적관념으로 지배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영성인이다(루가6,46: 말씀따라 사는 사람 ; 갈라5,25 :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 혼돈할 경우 땅에 발을 디디고 뜬 구름잡으려는 격이 된다. 이원론적 영성으로 빗나갈 수 있다(육과 세상 경멸하는 영성). 구원(성화) = 은총 + 인간의 협력 : 기도, 성서읽고 묵상, 사랑실천, 복음선포. ③영성은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적 미덕(美德) 추구에 있지 않다. 윤리주의적 미덕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강요되는 의미없는 형식적 법이나 전통은 – 살아계신 하느님을 잃게하며, 소심하고 법칙준수로 자족자만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은 – 오늘의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을 형성한다(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잘 살았으나 그 근본정신(사랑)을 놓쳤음). 물론 교회법, 영성적 규범이나 지침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 근본정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영성생활의 본질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삶이다. 율법주의 자세는 Pelagianism을 추구하게 된다<Pelagius(+418)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은총과 구원에 대한 이설임. 원죄의 결과를 부정 내지 경시하면서 의화와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함. 은총을 그것을 쉽게 하는데 필요할 뿐이라고 함). ④영성은 경건한 자태(Pietismus)나 정적주의(Quietismus)가 아니다. 영성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밖으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영성은 무조건적 열심과 다르다. 더구나 빗나간 열심과 드르다. 그러므로 영성은 정체적일 수 없다. 영성생활은 보다 강한 생활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일치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삶은 자연히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Quietismus(靜寂)- 17C 블란서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설임. 그리스도교 완성이란 죄악과 싸우는 인간의 노력적 행위나 도덕성등의 외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도달하는 영혼의 정적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 상태에 도달한 이는 절제도, 성사생활도 필요없다>. ⑤영성은 물질이나 육을 배제하거나 벗어나 독립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제일의 가치로, 우선적 가치로 추구하는 것은 영성생활이 아니다. 영과 물질은 서로 배제하거나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고, 완전성에서 영이 물질보다 상위이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하위의 물질(물리적 측면)이 상위의 영(영성적 측면)에 종속될 때에 이루어진다. 인간은 영혼으로 대표되는 영과 육신(육체)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측면(물질)로이루어진 단일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만을 따라 가거나 그것을 먼저 추구하는 삶은 영성ㅇ적 삶이 아니다. 지나치게 현세적 재물이나 명예에 지착하고 있거나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이라면 올바른 영성생활이 아니다. 한편 육체와 물질을 거부하고 순수히 영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세상의 발전과 사회참여, 이웃사랑을 경시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신심주의이며 빗나간 영성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생활은 인간의 영과 육의 단일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이끄심인 영성이 상위적으로 모든 삶을 주관하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 영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고찰 3.1. 영성에 대당되는 의미들(영성에 관해 잘못 이해된 의미들) ①영성은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정서(감동, 감상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신비적 체험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을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에 이를 수 있고, 종교적 감동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에 있어 인격적 하느님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성생활에서 넓은 의미의 신비체험(세레, 기도, 감사로움 체험)이 필요하고, 좁은 의미의 신비체험<탈혼, 시현, 말씀(locution), 계시, 성흔, 공중부양 등 – 신흥종교가 이 점을 중시하며 강조함>이 있을 수 있다. 영성생활에서 정적측면이 무시될 수 없고, 오히려 중요요소이지만, 감정에만 호소되거나 예속되어서는 안된다(신흥종교들이 이런 경향이 있음). 지(知), 정(情), 의(義)의 조화가 필요하다(성령쇄신운동, 부흥회 등 이런 경우 주의를 요한다). ②영성생활을 어떤 영적 이상(理想)과 혼돈해선 안된다. 영성생활은 비현실적 영적관념으로 지배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영성인이다(루가6,46: 말씀따라 사는 사람 ; 갈라5,25 :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 혼돈할 경우 땅에 발을 디디고 뜬 구름잡으려는 격이 된다. 이원론적 영성으로 빗나갈 수 있다(육과 세상 경멸하는 영성). 구원(성화) = 은총 + 인간의 협력 : 기도, 성서읽고 묵상, 사랑실천, 복음선포. ③영성은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적 미덕(美德) 추구에 있지 않다. 윤리주의적 미덕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강요되는 의미없는 형식적 법이나 전통은 – 살아계신 하느님을 잃게하며, 소심하고 법칙준수로 자족자만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은 – 오늘의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을 형성한다(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잘 살았으나 그 근본정신(사랑)을 놓쳤음). 물론 교회법, 영성적 규범이나 지침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 근본정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영성생활의 본질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삶이다. 율법주의 자세는 Pelagianism을 추구하게 된다<Pelagius(+418)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은총과 구원에 대한 이설임. 원죄의 결과를 부정 내지 경시하면서 의화와 구원에 있어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함. 은총을 그것을 쉽게 하는데 필요할 뿐이라고 함). ④영성은 경건한 자태(Pietismus)나 정적주의(Quietismus)가 아니다. 영성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밖으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영성은 무조건적 열심과 다르다. 더구나 빗나간 열심과 드르다. 그러므로 영성은 정체적일 수 없다. 영성생활은 보다 강한 생활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일치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삶은 자연히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Quietismus(靜寂)- 17C 블란서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설임. 그리스도교 완성이란 죄악과 싸우는 인간의 노력적 행위나 도덕성등의 외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도달하는 영혼의 정적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 상태에 도달한 이는 절제도, 성사생활도 필요없다>. ⑤영성은 물질이나 육을 배제하거나 벗어나 독립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제일의 가치로, 우선적 가치로 추구하는 것은 영성생활이 아니다. 영과 물질은 서로 배제하거나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고, 완전성에서 영이 물질보다 상위이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하위의 물질(물리적 측면)이 상위의 영(영성적 측면)에 종속될 때에 이루어진다. 인간은 영혼으로 대표되는 영과 육신(육체)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측면(물질)로이루어진 단일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만을 따라 가거나 그것을 먼저 추구하는 삶은 영성ㅇ적 삶이 아니다. 지나치게 현세적 재물이나 명예에 지착하고 있거나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이라면 올바른 영성생활이 아니다. 한편 육체와 물질을 거부하고 순수히 영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세상의 발전과 사회참여, 이웃사랑을 경시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신심주의이며 빗나간 영성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생활은 인간의 영과 육의 단일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이끄심인 영성이 상위적으로 모든 삶을 주관하는 것이다.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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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종말적 측면과 육화적 측면
2.4. 영성의 종말적 측면과 육화적 측면 종말적 영성이란 말뜻 그대로 이 세상의 끝, 죽음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잘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며 대기하는 삶이다. 이 영성은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눈물의 골짜기로 보며, 인간의 본성이 원죄의 결과로 인해 하느님의은총과 대립을 이루게 되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꺠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본성을 억제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권한다. 여기에는 현세적 삶에서의 초월, 관상적 기도,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고행, 희생, 극기, 포기 등이 강조되고 따라서 개인적 신앙이 발전된다. 이러한 영성적 경향은 초세기 박해시대에 순교를 염원하고 대기하던 신자들과 그 공동체 안에 짙었으며 박해가 끝난 후에는 새로운 순교형태로서의 복음삼덕을 철저히 실천하던 은수자 및 수도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로 구원되고 성화된 세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려는 자세의 삶이다(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세계와 인간들 사이에 태어나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이 영성은 현세적 사물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자연이나 인간의 본성적 능력이 초자연적 질서에 의해 강화되고 거양되어 은총의 힘과 조화있게 합쳐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금지, 극기, 포기, 고행 등 부정적 측면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듯 소개하면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앞당겨 사는 이로서 그의 삶은 기쁨과 희망, 자발성과 용기, 자유와 사랑 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상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이면서 성화되도록 하고 인간생활의 모든 환경을 복음화시키며,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뜻안에서 질서있게 정리하는 노력, 즉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건설하고 확장하려는 역동성이 강조된다. 따라서 이 영성은 이웃 사랑의 실천, 복음선포, 봉사활동, 사회참여와 정의 실현의 추구 등 수평적으로 개방적인 삶을 통해 복음을 표현하려 한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이며 신앙생활의 본질인 사랑은 두 관계를 이룬다. 하나는 수직적 측면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이 것으로 이웃과의 관계이다. 종말적 영성이 수직적 측면에 더 치우친다면 육화적 영성은 수평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교회는 이 두 측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긴장하면서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한 측면이 우세를 나타내면서 영성생활에 불균형을 가져오곤 했음을 우리는 영성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종말적 영성, 즉 신앙생활의 수직적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 초자연주의 현상을 나타내면서 수직주의 또는 종말주의로 기울게 된다. 이웃에 대한 봉사나 사랑의실천없이 기도, 재계, 극기 등 개인적 수덕을 통해서 완벽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이 세상 현실이나 인간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보며 신앙생활을 그러한 분과의 수직적 관계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다. 한편 영성생활에 있어 수평적 관계가 너무 강조될 때 세속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께’라는 이웃과의 개방 및 봉사관계를 일방적으로 과장하는 경우이다. 여기에 흔히, 이웃에게 참된 봉사를 하기 위해 필히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과의 지속적이며 긴밀한 관계, 즉 기도와 묵상이 차차 소홀히 되고 사랑과 봉사의 근원이며 원동력인 참된그리스도인 정신이 차차 흐려지게된다. 그리고 흔히 사도적 애덕정신에서 시작된 활동이 박애주의적 및 사회사업적 성격으로 변해진다.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은 수직적 혹은 종말적 영성과 수평적 혹은 육화적 영성 중의 택일이 아니며 양 측면의 알맞은 조화와 균형의 모습이다.
영성의 종말적 측면과 육화적 측면
2.4. 영성의 종말적 측면과 육화적 측면 종말적 영성이란 말뜻 그대로 이 세상의 끝, 죽음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잘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며 대기하는 삶이다. 이 영성은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눈물의 골짜기로 보며, 인간의 본성이 원죄의 결과로 인해 하느님의은총과 대립을 이루게 되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꺠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본성을 억제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권한다. 여기에는 현세적 삶에서의 초월, 관상적 기도,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고행, 희생, 극기, 포기 등이 강조되고 따라서 개인적 신앙이 발전된다. 이러한 영성적 경향은 초세기 박해시대에 순교를 염원하고 대기하던 신자들과 그 공동체 안에 짙었으며 박해가 끝난 후에는 새로운 순교형태로서의 복음삼덕을 철저히 실천하던 은수자 및 수도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로 구원되고 성화된 세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려는 자세의 삶이다(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세계와 인간들 사이에 태어나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이 영성은 현세적 사물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자연이나 인간의 본성적 능력이 초자연적 질서에 의해 강화되고 거양되어 은총의 힘과 조화있게 합쳐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금지, 극기, 포기, 고행 등 부정적 측면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듯 소개하면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앞당겨 사는 이로서 그의 삶은 기쁨과 희망, 자발성과 용기, 자유와 사랑 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상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이면서 성화되도록 하고 인간생활의 모든 환경을 복음화시키며, 모든 사물을 하느님의 뜻안에서 질서있게 정리하는 노력, 즉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건설하고 확장하려는 역동성이 강조된다. 따라서 이 영성은 이웃 사랑의 실천, 복음선포, 봉사활동, 사회참여와 정의 실현의 추구 등 수평적으로 개방적인 삶을 통해 복음을 표현하려 한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이며 신앙생활의 본질인 사랑은 두 관계를 이룬다. 하나는 수직적 측면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이 것으로 이웃과의 관계이다. 종말적 영성이 수직적 측면에 더 치우친다면 육화적 영성은 수평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교회는 이 두 측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긴장하면서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한 측면이 우세를 나타내면서 영성생활에 불균형을 가져오곤 했음을 우리는 영성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종말적 영성, 즉 신앙생활의 수직적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 초자연주의 현상을 나타내면서 수직주의 또는 종말주의로 기울게 된다. 이웃에 대한 봉사나 사랑의실천없이 기도, 재계, 극기 등 개인적 수덕을 통해서 완벽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이 세상 현실이나 인간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보며 신앙생활을 그러한 분과의 수직적 관계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다. 한편 영성생활에 있어 수평적 관계가 너무 강조될 때 세속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께’라는 이웃과의 개방 및 봉사관계를 일방적으로 과장하는 경우이다. 여기에 흔히, 이웃에게 참된 봉사를 하기 위해 필히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과의 지속적이며 긴밀한 관계, 즉 기도와 묵상이 차차 소홀히 되고 사랑과 봉사의 근원이며 원동력인 참된그리스도인 정신이 차차 흐려지게된다. 그리고 흔히 사도적 애덕정신에서 시작된 활동이 박애주의적 및 사회사업적 성격으로 변해진다.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은 수직적 혹은 종말적 영성과 수평적 혹은 육화적 영성 중의 택일이 아니며 양 측면의 알맞은 조화와 균형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