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제사에 관하여

제사의 관하여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까지 일년에 열네댓번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 커 온 나로서는 제사에 대해 이렇다 할 반감도 호감도 가지지 않았었고 그저 지내야 할 것으로 따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제사에 대해서 알고 난 후부터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제사에 큰 의의를 두게 되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에 4군데의 제사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나의 제사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제사가 시작하는 시간에 문제가 있다. 아버지 말로써는 하루가 시작하는 제일 이른 시각인 12시를 기해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말 효심과 정성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 시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평소의 직장 생활을 하는 삼촌의 경우 제사에 한 번 참여하고 나면 그 다음날 회사일을 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제관들이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사 시간을 6시에서 9시 사이에 지냄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이다. 제물은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조상이 좋아했던 음식을 가지고 지낸다. 그러나 요즘 와서 제물의 값이 엄청 비싸고 이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이 든다. 또한 제사가 끝나고 친족끼리의 음복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제물을 요즘 입맛에 맞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마련함이 적당하다.   셋째, 제사의 과정 중에 우리 집의 경우는 합문을 하고 약 5분간 엎드려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말로는 이러는 동안에 조상께서 오셔서 밥을 7 숟가락 먹을 동안 그러는 것이라 하시는 데 추효보본의 관점에서는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는 이를 다음에 이어지는 묵념으로 대처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넷째, 우리집의 경우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경우에 축을 읊는 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었다. 따라서 축을 읊을 때는 한문으로 하기보다는 한글로 제사의 대상에 대해 알기 쉽게 읽는다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상을 상기 시키는 데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제사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서술해 보았다. 제사는 평상시 만나 볼 수 없는 친족들과 만남을 중개 해주고 조상에 대한 얘기를 함으로써 그분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제사를 준비함에 있어 그 정성과 효성을 볼 때 결코 금지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나 현대적 의미를 살펴 볼 때 그의 불합리한 점이나 모순점을 고쳐 나간다면 이 시대에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의 전통 문화로써 자리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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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관하여

제사의 관하여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까지 일년에 열네댓번 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 커 온 나로서는 제사에 대해 이렇다 할 반감도 호감도 가지지 않았었고 그저 지내야 할 것으로 따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제사에 대해서 알고 난 후부터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던 제사에 큰 의의를 두게 되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에 4군데의 제사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나의 제사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제사가 시작하는 시간에 문제가 있다. 아버지 말로써는 하루가 시작하는 제일 이른 시각인 12시를 기해서 제사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말 효심과 정성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 시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평소의 직장 생활을 하는 삼촌의 경우 제사에 한 번 참여하고 나면 그 다음날 회사일을 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제관들이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사 시간을 6시에서 9시 사이에 지냄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이다. 제물은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조상이 좋아했던 음식을 가지고 지낸다. 그러나 요즘 와서 제물의 값이 엄청 비싸고 이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과 힘이 든다. 또한 제사가 끝나고 친족끼리의 음복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제물을 요즘 입맛에 맞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마련함이 적당하다.   셋째, 제사의 과정 중에 우리 집의 경우는 합문을 하고 약 5분간 엎드려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말로는 이러는 동안에 조상께서 오셔서 밥을 7 숟가락 먹을 동안 그러는 것이라 하시는 데 추효보본의 관점에서는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는 이를 다음에 이어지는 묵념으로 대처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넷째, 우리집의 경우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경우에 축을 읊는 데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었다. 따라서 축을 읊을 때는 한문으로 하기보다는 한글로 제사의 대상에 대해 알기 쉽게 읽는다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상을 상기 시키는 데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서 제사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서술해 보았다. 제사는 평상시 만나 볼 수 없는 친족들과 만남을 중개 해주고 조상에 대한 얘기를 함으로써 그분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제사를 준비함에 있어 그 정성과 효성을 볼 때 결코 금지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나 현대적 의미를 살펴 볼 때 그의 불합리한 점이나 모순점을 고쳐 나간다면 이 시대에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의 전통 문화로써 자리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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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제 5장 백록동규도 *백록동규는 백록동 서원의 규칙이란 뜻이다. [그림설명]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오륜. @切問近思(절문근사, 절실한 것을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함) 이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주된 것은 삼강오륜이다.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博學(박학, 많은 것을 아는 것 5수레는 읽어야 함), 審問(심문, 찾아서 물어야 함), 愼思(신사, 신중하게 사색해야 함), 明辨(명변, 이치에 대한 분명한 변별력이 있어야 함) 篤行(독행,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나는 보건데 聖賢(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하는 뜻은 다 義理(의리, 존재의 문제, 천리와 같음)를 講明(강명, 말해서 밝힘, 즉 도덕으로 만들어 인간을 천지의 수준으로 올림, 이것은 성인이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음)하여 그 몸을 닦은 이수에 미루어 사람에게 까지 미치려 함이고 한갓 博覽(박람), 强記(강기)에 힘써 詞章(사장)으로 이름이나 날리고 祿利(녹리, 녹봉이나 이익)나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학문하는 사람은 이미 이와는 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성현들이 사람을 가리치던 법은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熟讀(숙독), 深思(심사, 깊이 생각함)하여 問辨(문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그 몸을 責(책, 꾸짖다)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하면 規투(규투?), 禁防(금방, 금하여 방지함)을 갖추는 것이야 어찌 남이 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근세에 학교에 구약이 있는데 그 학자0를 待(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또 그 법이 반드시 다 예사람의 뜻이 아니므로 이제 이 학당에는 거것을 실시하지 않고 특히 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大端(대단)을  취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문위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은 서로 함께 강명하고 준수(遵守)하여 몸에 실천하면 생각하는 것과 (思慮) 言行에 있어서 戒謹(계근), 恐懼(공구)1)할 바가 반드시 저 보다도 더 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禁防(금방)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으면 저 이른바 規約(규약)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제군은 잘 생각할 지어다.  제 6장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이장은 제 1장과 연관이 있다. 세계는 보편의 이치인 이일과 개별의 이치인 事理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은 性品과 形氣로 나뉘는 데 사물과 다르게(탁하며 더럽고 낮은 면이 있음) 인간의 形氣는 그자체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높은(粹 淸, 高) 면이 있다. 이를 분류(분간)해서 보면 形氣와 性으로 나누어 진다.  이때 性과 情은 하나로 통섭되어 있다. 임은정씨가 이르기를 이른바 심이 性情을 통한다는 것2)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남을 타서 나고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하는 데서 七情이 나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그 性情을 하나로 통일해서 모여들게 하는 것은 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면 性이되므로 이것은 心의 근본(體)이고 感情이 동해서 통하게 되면 情이 되므로 이것은 心의 운용(用)이다. 장자는 말한 ‘마음은 性情을 통회한다’는 것은 적당하다. 心은 性을 통함으로써 仁義禮智를 性이라 하고(性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인의예지다) 또 仁義之心이란 말도 있게 되는 것이며 心은 情을 통함으로 惻隱, 羞惡, 辭讓, 是非를 情이라하는 것이다(情은 이처럼 4端과 7情이 있는데 여기서는 4端만 말하고 있다). 心이 性을 통하지 못하면(心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가 깨끗하며 맑고 높지 아니할 때 통하지 못한다) 그 미발의 중3)을 이룰 수 없어서 性이 천착4)되기 쉽고 心이 情을 통하지 못하면(心이 情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그 중절(중간의 절도)의 화합을 이룰 수 없어서 情이 방탕해지기 쉽다. 학자는 이것을 알고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性을 기르고(性이 있는 그대로 광을 낼수 있게 하는 것) 그 情을 단속하기만 하면 학문하는 길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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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제 5장 백록동규도 *백록동규는 백록동 서원의 규칙이란 뜻이다. [그림설명]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오륜. @切問近思(절문근사, 절실한 것을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함) 이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주된 것은 삼강오륜이다.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博學(박학, 많은 것을 아는 것 5수레는 읽어야 함), 審問(심문, 찾아서 물어야 함), 愼思(신사, 신중하게 사색해야 함), 明辨(명변, 이치에 대한 분명한 변별력이 있어야 함) 篤行(독행,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나는 보건데 聖賢(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하는 뜻은 다 義理(의리, 존재의 문제, 천리와 같음)를 講明(강명, 말해서 밝힘, 즉 도덕으로 만들어 인간을 천지의 수준으로 올림, 이것은 성인이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음)하여 그 몸을 닦은 이수에 미루어 사람에게 까지 미치려 함이고 한갓 博覽(박람), 强記(강기)에 힘써 詞章(사장)으로 이름이나 날리고 祿利(녹리, 녹봉이나 이익)나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학문하는 사람은 이미 이와는 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성현들이 사람을 가리치던 법은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熟讀(숙독), 深思(심사, 깊이 생각함)하여 問辨(문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그 몸을 責(책, 꾸짖다)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하면 規투(규투?), 禁防(금방, 금하여 방지함)을 갖추는 것이야 어찌 남이 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근세에 학교에 구약이 있는데 그 학자0를 待(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또 그 법이 반드시 다 예사람의 뜻이 아니므로 이제 이 학당에는 거것을 실시하지 않고 특히 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大端(대단)을  취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문위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은 서로 함께 강명하고 준수(遵守)하여 몸에 실천하면 생각하는 것과 (思慮) 言行에 있어서 戒謹(계근), 恐懼(공구)1)할 바가 반드시 저 보다도 더 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禁防(금방)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으면 저 이른바 規約(규약)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제군은 잘 생각할 지어다.  제 6장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이장은 제 1장과 연관이 있다. 세계는 보편의 이치인 이일과 개별의 이치인 事理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은 性品과 形氣로 나뉘는 데 사물과 다르게(탁하며 더럽고 낮은 면이 있음) 인간의 形氣는 그자체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높은(粹 淸, 高) 면이 있다. 이를 분류(분간)해서 보면 形氣와 性으로 나누어 진다.  이때 性과 情은 하나로 통섭되어 있다. 임은정씨가 이르기를 이른바 심이 性情을 통한다는 것2)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남을 타서 나고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하는 데서 七情이 나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그 性情을 하나로 통일해서 모여들게 하는 것은 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면 性이되므로 이것은 心의 근본(體)이고 感情이 동해서 통하게 되면 情이 되므로 이것은 心의 운용(用)이다. 장자는 말한 ‘마음은 性情을 통회한다’는 것은 적당하다. 心은 性을 통함으로써 仁義禮智를 性이라 하고(性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인의예지다) 또 仁義之心이란 말도 있게 되는 것이며 心은 情을 통함으로 惻隱, 羞惡, 辭讓, 是非를 情이라하는 것이다(情은 이처럼 4端과 7情이 있는데 여기서는 4端만 말하고 있다). 心이 性을 통하지 못하면(心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가 깨끗하며 맑고 높지 아니할 때 통하지 못한다) 그 미발의 중3)을 이룰 수 없어서 性이 천착4)되기 쉽고 心이 情을 통하지 못하면(心이 情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그 중절(중간의 절도)의 화합을 이룰 수 없어서 情이 방탕해지기 쉽다. 학자는 이것을 알고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性을 기르고(性이 있는 그대로 광을 낼수 있게 하는 것) 그 情을 단속하기만 하면 학문하는 길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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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제 5장 백록동규도 *백록동규는 백록동 서원의 규칙이란 뜻이다. [그림설명]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오륜. @切問近思(절문근사, 절실한 것을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함) 이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주된 것은 삼강오륜이다.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博學(박학, 많은 것을 아는 것 5수레는 읽어야 함), 審問(심문, 찾아서 물어야 함), 愼思(신사, 신중하게 사색해야 함), 明辨(명변, 이치에 대한 분명한 변별력이 있어야 함) 篤行(독행,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나는 보건데 聖賢(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하는 뜻은 다 義理(의리, 존재의 문제, 천리와 같음)를 講明(강명, 말해서 밝힘, 즉 도덕으로 만들어 인간을 천지의 수준으로 올림, 이것은 성인이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음)하여 그 몸을 닦은 이수에 미루어 사람에게 까지 미치려 함이고 한갓 博覽(박람), 强記(강기)에 힘써 詞章(사장)으로 이름이나 날리고 祿利(녹리, 녹봉이나 이익)나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학문하는 사람은 이미 이와는 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성현들이 사람을 가리치던 법은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熟讀(숙독), 深思(심사, 깊이 생각함)하여 問辨(문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그 몸을 責(책, 꾸짖다)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하면 規투(규투?), 禁防(금방, 금하여 방지함)을 갖추는 것이야 어찌 남이 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근세에 학교에 구약이 있는데 그 학자0를 待(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또 그 법이 반드시 다 예사람의 뜻이 아니므로 이제 이 학당에는 거것을 실시하지 않고 특히 성현이 사람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大端(대단)을  취하여 오른쪽과 같이 조목조목 열거하여 문위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은 서로 함께 강명하고 준수(遵守)하여 몸에 실천하면 생각하는 것과 (思慮) 言行에 있어서 戒謹(계근), 恐懼(공구)1)할 바가 반드시 저 보다도 더 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禁防(금방)의 범위를 벗어남이 있으면 저 이른바 規約(규약)이란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요 생략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제군은 잘 생각할 지어다.  제 6장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이장은 제 1장과 연관이 있다. 세계는 보편의 이치인 이일과 개별의 이치인 事理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은 性品과 形氣로 나뉘는 데 사물과 다르게(탁하며 더럽고 낮은 면이 있음) 인간의 形氣는 그자체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높은(粹 淸, 高) 면이 있다. 이를 분류(분간)해서 보면 形氣와 性으로 나누어 진다.  이때 性과 情은 하나로 통섭되어 있다. 임은정씨가 이르기를 이른바 심이 性情을 통한다는 것2)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남을 타서 나고 그 빼어난 것에서 오성이 갖추어지고 오성이 동하는 데서 七情이 나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릇 그 性情을 하나로 통일해서 모여들게 하는 것은 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면 性이되므로 이것은 心의 근본(體)이고 感情이 동해서 통하게 되면 情이 되므로 이것은 心의 운용(用)이다. 장자는 말한 ‘마음은 性情을 통회한다’는 것은 적당하다. 心은 性을 통함으로써 仁義禮智를 性이라 하고(性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인의예지다) 또 仁義之心이란 말도 있게 되는 것이며 心은 情을 통함으로 惻隱, 羞惡, 辭讓, 是非를 情이라하는 것이다(情은 이처럼 4端과 7情이 있는데 여기서는 4端만 말하고 있다). 心이 性을 통하지 못하면(心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가 깨끗하며 맑고 높지 아니할 때 통하지 못한다) 그 미발의 중3)을 이룰 수 없어서 性이 천착4)되기 쉽고 心이 情을 통하지 못하면(心이 情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그 중절(중간의 절도)의 화합을 이룰 수 없어서 情이 방탕해지기 쉽다. 학자는 이것을 알고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性을 기르고(性이 있는 그대로 광을 낼수 있게 하는 것) 그 情을 단속하기만 하면 학문하는 길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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