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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동학의 창도와 인본주의적 인간관
Ⅱ. 東學의 唱導와 人本主義的 人間觀 1. 水雲의 生涯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本名은 濟宣이고 호는 水雲이다. 관변기록에는 兒名이 福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濟愚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고친 이름이다. 아버지 근암 최옥은 경상도 일대에서는 문장과 도덕으로 손꼽히는 학자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향반으로 빈 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씩이나 아내를 여의고 동생 최규의 아들 제환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하였다. 그 뒤 60세가 넘어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과부 한씨를 맞아 아들을 얻게 되었다. 이 아들이 곧 수운이다. 그는 서자(庶子)로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인 최진립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출전하여 많은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성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고, 1699년에는 경주에 사당이 세워졌다. 최제우는 여덟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에 소양이 깊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학동 시절의 자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얼굴은 관옥이고 풍채는 두목이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드라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그러나 그가 서출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총명과 재기가 있으나 세상이 인정을 해주지 않음을 한탄한다.2) 최제우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부터 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지게 되었다. 서출이라 벼슬길을 바라볼 수도 없고, 물려받은 가산도 없었다. 농사에는 뜻이 없었기에 가업과 처자를 돌보지 않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 동안 장사도 하고, 의술, 복술(卜術)등 잡술에도 손을 댔으나,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10년간 팔도 이곳 저곳을 방랑하고 다시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세상 인심도 살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그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팔도강산 다밝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無可奈라 할길없네 우습다 세상사람 不顧天命 아닐는가” <몽중노소문답가> 이 시에서 세상 인심과 풍속이 각박해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천명을 알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나이 36세가 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859년 10월 가족을 데리고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개월 정도 지난 1860년 4월 5일에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다. 종교체험에 대한 수운의 표현을 보면, 감각적으로는 ①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고 ②마음이 섬찟해지며 몸이 떨렸으며 ③질병에 걸린 듯한 상태도 나타났으며 ④밖으로부터 말씀이 들려 오는가 하면 안으로부터 가르침이 내렸다. ⑤그리고 생전 못 본 물형의 부도(符圖)도 뚜렷이 보였으며 ⑥영기(靈氣)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느낌도 받았다. 심적인 현상으로는 ①무섭고도 두려웠으며 ②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으며 ③‘한울님’의 실체감이 너무나 생생했고 ④지금까지 문제로 삼았던 과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어 미래가 열리는 무한함을 느꼈다. ⑤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전도되어 충만함과 환희감이 고조되었으며 ⑥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강압적으로 내리는가 하면 ⑦새 역사 창조 의욕이 넘쳐흘렀다. 또한, 신비적 체험의 궁극적인 경지는 ①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나 ②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한울님 마음이 곧 대신사의 마음이 되었다)의 신인합일(神人合一)에 도달했다.3) 최제우의 포교는 道를 얻고 바로 시작하지 않고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포교를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관헌에서도 알게 되었다. 관에서는 포교를 중단하라는 엄한 경고가 내려졌다. 이 경고 때문에 그는 11월에 제자 최중희만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남원으로 갔다. 여기서 서공서라는 사람을 만나 입적 시킨 후 이 사람의 후원으로 교룡산성 내 은적암에 들어갔다. 그는 은적암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敎訓歌, 論學文, 道修歌, 勸學歌”를 저술했다. 수운은 1862년 3월에 경주로 돌아왔다. 다시 사람들이 모였고, 이것을 안 관은 논의 끝에 수운을 체포했다. 이것은 1861년 10월과 같은 위협적 경고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위험스러웠기 때문에 東學을 못하게 하려는 탄압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석방 압력으로 관은 폭동의 위협을 느끼고 무죄로 석방시켰다.4) 신도가 늘어나자 신도들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명지에 접소를 두고 접소에 접주를 두어 그 지방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接主制”라고 하는 것인데, 東學으로서는 가장 처음의 교회 제도다. 최제우는 포교와 더불어 신도의 교화와 결속에 힘을 썼다. 많은 신도들 가운데는 빠른 시일에 세상이 변하고, 자신이 잘사는 세상을 기대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탈하려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참된 믿음의 태도와 목적을 역설하였다. 한편 최시형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8월에는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그리고 12월 10일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되어 과천까지 압송되었다가 대구로 내려가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4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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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 사회 경제적 상황, 사상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 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 계급의 증대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과거제도 외에 신분 상승의 길은 극히 드물었고, 이런 신분 상승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공명첩이나, 납속책, 호적 위조, 족보 매매 및 위조, 홍패 위조로 양인이나 노비가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이로 인해 과거 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에게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중 하나는 토지 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많았다. 본래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실시되던 양전은 양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토지 경계가 불분명해 졌고, 진전과 기전이 혼동되어 총 전결수는 증가하였는데도 오히려 실결수는 감소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궁방전과 둔전의 증가로 민전이 감소되었다. 그나마도 거의 부농층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반 농민은 영세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군포의 경우, 마을 단위로 총액제가 시행되고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양인 비율이 감소하는 시대 상황에서 1인당 부담해야 할양이 늘어났다. 환곡은 삼정 중에서 폐해가 가장 켰다. 환곡은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핑계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리대로 운영됨으로써 빈민의 부담을 가중케 할뿐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 고질적인 것은 지방 행정의 말단 관리자들인 아전 및 이서(吏胥)의 지방민에 대한 수탈이다. 이들은 지방 토착민으로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 부패가 더 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1) 3. 사상적 상황 이 시대에 재래 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면서 지금까지의 유학은 한편으로 사장(詞章)위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과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때어서 그 원래의 經世의 學으로서 실효를 거두기에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상차별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그 명맥만을 유지할 뿐 유학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은 되지 못했다. 도교는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높은 선비들의 피난처와 담소처로 이용될 뿐, 사상적 부재 현상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지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학(天主敎)은 지배층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기 의식 조장에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 도전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위기도 시사하고 있다. 온 민중은 다방면의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정치·경제·사회·사상적 상황이 어수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필요했으나 충분히 제공 해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하며 東學을 창도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시대적 배경 – 사회 경제적 상황, 사상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 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 계급의 증대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과거제도 외에 신분 상승의 길은 극히 드물었고, 이런 신분 상승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공명첩이나, 납속책, 호적 위조, 족보 매매 및 위조, 홍패 위조로 양인이나 노비가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이로 인해 과거 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에게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중 하나는 토지 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많았다. 본래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실시되던 양전은 양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토지 경계가 불분명해 졌고, 진전과 기전이 혼동되어 총 전결수는 증가하였는데도 오히려 실결수는 감소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궁방전과 둔전의 증가로 민전이 감소되었다. 그나마도 거의 부농층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반 농민은 영세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군포의 경우, 마을 단위로 총액제가 시행되고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양인 비율이 감소하는 시대 상황에서 1인당 부담해야 할양이 늘어났다. 환곡은 삼정 중에서 폐해가 가장 켰다. 환곡은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핑계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리대로 운영됨으로써 빈민의 부담을 가중케 할뿐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 고질적인 것은 지방 행정의 말단 관리자들인 아전 및 이서(吏胥)의 지방민에 대한 수탈이다. 이들은 지방 토착민으로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 부패가 더 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1) 3. 사상적 상황 이 시대에 재래 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면서 지금까지의 유학은 한편으로 사장(詞章)위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과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때어서 그 원래의 經世의 學으로서 실효를 거두기에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상차별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그 명맥만을 유지할 뿐 유학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은 되지 못했다. 도교는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높은 선비들의 피난처와 담소처로 이용될 뿐, 사상적 부재 현상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지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학(天主敎)은 지배층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기 의식 조장에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 도전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위기도 시사하고 있다. 온 민중은 다방면의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정치·경제·사회·사상적 상황이 어수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필요했으나 충분히 제공 해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하며 東學을 창도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시대적 배경 – 사회 경제적 상황, 사상적 상황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 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 계급의 증대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과거제도 외에 신분 상승의 길은 극히 드물었고, 이런 신분 상승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공명첩이나, 납속책, 호적 위조, 족보 매매 및 위조, 홍패 위조로 양인이나 노비가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이로 인해 과거 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에게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중 하나는 토지 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많았다. 본래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실시되던 양전은 양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토지 경계가 불분명해 졌고, 진전과 기전이 혼동되어 총 전결수는 증가하였는데도 오히려 실결수는 감소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궁방전과 둔전의 증가로 민전이 감소되었다. 그나마도 거의 부농층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반 농민은 영세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군포의 경우, 마을 단위로 총액제가 시행되고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양인 비율이 감소하는 시대 상황에서 1인당 부담해야 할양이 늘어났다. 환곡은 삼정 중에서 폐해가 가장 켰다. 환곡은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핑계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리대로 운영됨으로써 빈민의 부담을 가중케 할뿐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 고질적인 것은 지방 행정의 말단 관리자들인 아전 및 이서(吏胥)의 지방민에 대한 수탈이다. 이들은 지방 토착민으로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 부패가 더 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1) 3. 사상적 상황 이 시대에 재래 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면서 지금까지의 유학은 한편으로 사장(詞章)위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과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때어서 그 원래의 經世의 學으로서 실효를 거두기에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상차별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그 명맥만을 유지할 뿐 유학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은 되지 못했다. 도교는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높은 선비들의 피난처와 담소처로 이용될 뿐, 사상적 부재 현상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지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학(天主敎)은 지배층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기 의식 조장에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 도전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위기도 시사하고 있다. 온 민중은 다방면의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정치·경제·사회·사상적 상황이 어수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필요했으나 충분히 제공 해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하며 東學을 창도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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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 정치적 상황
Ⅰ. 시대적 배경1) 1. 정치적 상황 19세기초에 속하는 1801년(순조 원년)부터 1863년(고종 원년)까지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정치·경제·사회·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조선왕조의 정치는 대단히 차별적인 계급 제도로 조직되어 있었기에 어떤 특권층에게만 관직에 오를 기회가 열려 있었다. 이러한 신분은 과거를 통해서만 넘을 수 있었고, 기존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들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이때는 세도정치라는 변태적 정치가 시행된 때였기에 조선왕조의 19세기 정치는 주로 내정의 발전과 개혁보다는 외척이 주축이된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정치가 움직여졌으며, 정권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양반은 입신 출세의 길이 차단되어 자연스럽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인사 행정이었다. 관직의 수요와는 관계없이 많은 명목으로 과거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당쟁을 유발시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직에만 진출하려는 출세 지향적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권·권력·혈연에 의하여 과거의 급락과 관리 인선이 결정되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결국 관직은 치부의 수단으로 타락했고, 백성은 재산을 강제로 수탈당해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고, 정부에 대한 불만만 쌓여 갔다. 이런 불만은 홍경래의 난(1811)과 같은 농민 봉기와, 괘서로 나타났다. 대외적으로는 구미 열강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1854년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켰고, 1860년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프랑스·러시아가 북경을 함락시켰다. 이런 상황은 조선에도 나타났다. 예컨대, 1816년에 충청도 바닷가에 영국 군함의 출현, 1832년 영국 상선이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고, 1840년에 제주도 남쪽에 영국 배가 정박하여 민가를 급습하는 등, 여러 차례 여러 곳에 나타나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2) 이런 상황에서 일반 백성은 정치적 모순과 비리 속에서 政府 不在 現狀을 체험했고, 정치적 소외 현상은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