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부활섭리

   제2절 부활섭리       Ⅰ. 부활섭리는 어떻게 하시는가 ?  부활은 타락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는 과정 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부활섭리는 곧 복귀섭리를 의미한다. 복귀섭리는 곧 재창조섭리이므로, 부활섭리는 또한 재창조섭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부활섭리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섭리하시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부활섭리역사에 있어서, 그 사명 적인 책임을 맡았던 인물들이 비록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늘 뜻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타락인간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터전을 넓혀 왔던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인간들은 역사가 흐를수록 그 이전의 선지선열들이 쌓아올린 심정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섭리는 이러한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이루어 지게 된다.  둘째로 창조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완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섭리를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타락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창조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하여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복귀섭리에 의한 영인체의 부활도 역시 지상의 육신생활을 중심하고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넷째로 인간은 창조원리를 따라, 성장기간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대한 부활섭리도 그 섭리기간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야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Ⅱ. 지상인에 대한 부활섭리     1.부활기대섭리  하나니은 아담가정에서부터 부활섭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뜻을 받들고 나선 인물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그 섭리는 연장되어 나오다가 2,000년 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찾아 세움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000년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시대에 들어 부활섭리를 하실 수 있는 그 기대를 조성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2. 소생 부활섭리  부활섭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아브라함 때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2,000년 기간은 소생부활섭리를 해 나오셨다. 따라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소생 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생 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구약 율법의 말씀을 인간이 믿고 행함으로써,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행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 소생부활을 함으로써 영형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영형체를 이룬 인간들이 육신을 벗으면, 그 영인체는 영형체급의 영계에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3. 장성부활섭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섭리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림기까지 연장되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연장된 2,000년기간은 영적 구원에 의하여 장성부활섭리를 해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장성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신약의 말씀을 인간이 믿음으로써,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신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서 장성 부활을 함으로써 생명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상에서 생명체급의 영인체를 이룬 인간들은, 육신을 벗은 후에 생명체급 영계인 낙원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4. 완성 부활섭리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영육 아울러 부활하여서, 부활섭리를 완성하는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라고 한다. 이 새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완성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재림주님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새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다(전편 제3장 제5절 Ⅰ). 그러므로 완성부활섭리는 신.구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시는 새 말씀(이 말씀은 성약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을 인간들이 믿고 또 주님을 직접 모심으로써,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시의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재림주님을 믿고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 육 아울러 완전히 부활되어 그의 영인체는 생령체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생령체를 완성한 인간들이 생활하는 곳을 지상천국이라 한다. 그리고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들이 육신을 벗으면, 생령체의 영인으로서 생령체급의 영계인 천상천국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5. 천국과 낙원  이제까지의 기독교 신도들은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낙원과 천국을 혼동해 왔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지상에 강림하셨던 목적이 완성되었더면, 그 때에 이미 지상천국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들이 육신을 벗고 생령체를 완성한 영인체로서 영계에 갔다면, 천상천국도 그 때에 이루어 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생령체를 완성함 인간은 나타나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생령체의 영인들이 생활하도록 창조된 천상천국에 들어간 영인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천국은 아직도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 주민이 되어야 할 인간들을 중심삼고 보면, 아직 천상천국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던가 ? 그것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던 본래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끝내 믿어 주지 않았던 그 가운데서, 자신을 믿어준 오직 한 사람이 였으며 십자가의 동반자였던 강도에게, 예수님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23장 43절). 결국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소망적인 과정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셨지만, 이 뜻을 못 이루고 떠나서는 십자가의 죽음길에 임해서는, 실상 낙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이된 사실을 표명하셨던 것이다.   낙원은 이렇듯 지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체급의 영인 체를 이루어 가지고, 육신을 벗고 간 영인들이 천국 문이 열릴 때까지 머물러 있는 영계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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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의

   Ⅲ. 부활의 의의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들 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며,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대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덜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 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또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Ⅳ.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으로 중생할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처지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뒤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들어와 사는 집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 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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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의

   Ⅲ. 부활의 의의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들 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며,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대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덜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 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또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Ⅳ.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으로 중생할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처지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뒤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들어와 사는 집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 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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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의

   Ⅲ. 부활의 의의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들 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며,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대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덜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 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또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Ⅳ.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으로 중생할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처지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뒤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들어와 사는 집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 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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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론

          제5장 부활론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버린 모든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처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1절 부활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Ⅰ.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 개념  누가복음 9장 603절의 기록을 보면,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장사를 치루어야 할 그 제자의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삶’은 그 육신이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그 죽은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현재 그 육신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가 ?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버린 자리, 즉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삶’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서 그의 뜻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 권을 벗어나서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으로 보아 죽은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3장 1절에 기록된 바, 비신앙적인 세례교회의 신도들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반면에 이미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인가니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 체가 영계의 천상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장 25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사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고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영인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계속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후일 그가 죽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 속에서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성구에 보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 있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7장 33절의 말씀도,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은, 비록 그 육신이 활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은 자요, 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육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보면, 설혹 그 육신은 흙 속에 묻혀 썩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Ⅱ. 타락으로 인한 죽음  우리는 위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 중 어느 것이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죽음일 것인가 ?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어도, 노쇠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930세에 죽어 그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락 때문에 온 죽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원리에 의하면, 육신은 영인체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는 것 같이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생물체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이 창조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육신이라고 해서 영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쓴 채로 영존 한다면, 영인체의 가 곳인 무형세계는 당초부터 창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무형세계는 타락한 인간의 영인체가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그 영인체가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인간이 육적인 생명에 강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원래 육신을 벗은 후에는 보다 아름답고 영원한 무형세계에가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타락으로 인하여 알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육신생활과 무형세계에 있어서의 영인생활은, 애벌레와 나비의 생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애벌레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마치 인간이 육신생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듯이, 그도 역시 허물 속에 삶에 애착을 느끼어 벗고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벌레가 일단 나비가 된 후에는 향기로운 꽃과 단 꿀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인과 영인과의 관계는 바로 이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죽음 중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탄 주관군내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곧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성서를 중심하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곧 인간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초래된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그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따먹은 그 날을 기해서 정녕 죽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아담과 해와는 오늘날의 우리들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상에서 육신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손을 번식하여, 마침내 오늘의 타락한 인류사회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그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주관권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서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요한 1서 3장 14절에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뜻으로서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고 하였고, 또 로마서 8장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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