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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제3절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1789~1918) 전 시기에 있어서 종교 및 사상의 투쟁은, 가인 아벨 두 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고,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 형의 인생관은 각자의 방향대로 성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성숙에 따라서 가인 아벨의 두 형의 세계가 이룩되어 갔으며, 사회의 구조도 이 두 인생관에 입각한 사회형태에로 정리되어가면서, 정치와 경제와 사상도 이상사회에로 전환될 수 있는 전단계에까지 진전하였다.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있은 후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가 바로 이러한 섭리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Ⅰ. 민주주의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본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이미 앞 장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가 나오게 된 외적인 경위였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굽이침 속에서, 어떠한 사상의 흐름을 타고 오늘의 민주주의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인 경위를 알아야 한다. 이미 후편 제4장 제7절 Ⅱ에서 논한 바와 같이, 기독왕국시대에 있어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의 왕국이 하나 되어 메시아왕국을 위한 군주사회를 이루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더라면, 그 때에 봉건시대는 끝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연장되어 정치사와 종교사와 경제사가 서로 분립된 노정을 따라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봉건시대에 있어 지방 제후에게 분산되어 있었던 정치권력은 십자군전쟁 이후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약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후들은 민족을 단위로 하는 통일국가를 세워 국왕 밑에 집중함으로써, 중앙집권에 의한 절대주의국가(전체주의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왕권신수설 등의 영향으로 왕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 전제군주시대였다. 이 시대가 오게 되는 원인을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첫째로, 시민계급이 국왕과 결합하여 봉건계급과 대항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경제적인 활동에 있어, 무역경제의 지배를 위하여 봉건제도를 벗어난 강력한 국가의 배경을 필요로 하였으며, 아울러 국민의 전체적인 복리를 위하여 강력한 국가의 보호와 감독에 의한 중상주의 경제정책이 요망된 데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대의 교황과 국왕이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사회는 완성되지 못하고, 교황을 중심한 그 사회는 도리어 사탄의 앞질러 이루어 나온 노정을 따라 사탄편 전제군주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제 가인형의 인생관을 중심한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인생관을 중심한 민주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고 있는 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전제군주사회의 귀추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치 중세 봉건사회가 히브리사상에도 헬라사상에도 한가지로 배치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이 함께 그것을 타파하여, 가인 아벨 두 형의 인생관에 입각한 두 형의 사회를 수립하였던 것처럼, 전제군주사회도 역시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민주주의에 의한 신앙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아벨형 인생관의 목적 달성에도 배치되는 사회였었고, 도 그 사회는 그 안에 의연히 남아있던 봉건제도가 무신론자와 유물론자들이 지도하는 시민 계급의 발전을 막고 있어서 가인형 인생관의 목적 달성에도 배치되는 사회였었기 때문에, 이 두 형의 인생관이 함께 이 사회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드디어 가인 아벨 두 형의 민주주의에 입각한 공산과 민주 두 형의 사회를 형성한 것이다. 1. 가인형의 민주주의 가인형의 민주주의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하여는 먼저 프랑스혁명에 관한 것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당시의 프랑스는 가인형의 인생관으로 말미암아,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흘러가던 계몽사상이 팽배한 시대에 있었다. 따라서 이렇듯 계몽사상에 붙들어 있던 시민계급은, 절대주의에 대한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절대주의사회 안에 아직도 깊이 뿌리박고 있는 구제도의 잔해를 타파하려는 생각이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시민들이 1789년 계몽사상의 큰 조류에 의하여, 절대주의사회의 봉건적 지배계급을 타파하는 동시에, 제3계급(시민)의 자유평등과 해방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일어난 혁명이 곧 프랑스혁명이었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인권선언’이 공표됨으로써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수립되었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가인형의 인생관을 세우기 위하여, 유물사상으로 흘러간 계몽사상이 절대주의사회를 타파하면서 출현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인형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의 주요인물들도 그러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사상가 디드로(Diderot. Denis 1713~1784)나 달랑베르(d’Alembert. Jean Le Rond 1717~1783)등도 무신론 또는 유물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 혁명의 경위론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개성의 자유와 평등보다도 전체주의에로 바뀌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가인형의 인생관은 계몽사상을 세워 프랑스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가인형의 민주주의를 이룩하였고, 이것이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인간 본성의 내적인 추구의 길을 완전히 막고 외적으로만 더욱 발전하여, 독일에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에서의 레닌주의로 체계화됨으로써, 마침내 공산주의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2. 아벨형의 민주주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인하여 실현된 민주주의와 그 발단부터가 다르다. 후자는 가인형 인생관의 소산인 무신론 및 유물론의 주창자들이, 절대주의 사회를 타파하는 것으로써 실현한 가인형의 민주주의였음에 반하여, 전자는 아벨형 인생관의 결실체인 영광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실현한 아벨형의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면 영국과 미국에서는 어떻게 하여 아벨형의 민주주의를 수립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전제주의와 국교를 강화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내의 타국 또는 신대륙으로 옮기었고, 일찌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적인 압박을 받던 일부의 청교도들이 국민맹약을 결의하고 국왕에 항거하였던 것이다(1640년).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의 핵심이었던 청교도들이 크롬웰(Cromwell, Oliver1599~1658)을 중심하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1642년). 그뿐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와 국교의 강화가 극심하여지자, 그의 사위로서 홀랜드총독으로 있었던 오렌지공 윌리암(Wiliam Ⅲ 1650~1702)은, 1688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신앙의 자유와 민권의 옹호를 위하여 영국에 상륙하여 무혈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윌리암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의회에서 상신한 ‘권리의 선언’을 승인하여 의회의 독립적인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이것이 영국헌법의 기본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 혁명은 무혈로 성공하였기 대문에 이것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영국에 있어서의 이 혁명은, 외적으로 보면 물론 시민계급이 귀족 승려 등 대지주계급으로부터 정치적인 자유와 행방을 얻으려고 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더 주요한 원인은 그러한 혁명을 통하여 내적인 신앙의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전제주의 왕정하에서 탄압을 받고 있던 청교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아가서 1776년에 독립국가를 수립함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영국과 미국에서 수립된 민주주의는 아벨형의 인생관을 중심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사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으로써 수립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아벨형의 민주주의라고 한다. 이렇게 되어 아벨형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세계를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Ⅱ. 삼권분립의 원리적 의의 3권분립사상은 절대주의의 정치체제로 인하여, 국가의 권력이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에 집중하는 것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계몽사상과의 중진이었던 몽케스키외(Montesquieu, 1689~1755)에 의하여 제창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프랑스혁명 때 ‘인권선언’의 선포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원래 이 3권분립은 하늘편에서 이루려 했던 이상사회의 구조로서, 복귀섭리의 전 노정이 그러하듯이, 이것 또한 사탄편에서 앞질러 비원리적인 원리형으로 먼저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사회의 구조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창조원리에서 밝힌 바와같이, 피조세계는 완성한 인간 하나의 구조를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완성한 인간들로써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도 역시, 완성한 인간 하나의 구조와 기능을 닮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체의 모든 기관이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의 모든 기관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하여 영위되어야 하며, 또 두뇌로부터의 모든 명령이 척수를 중심한 말초신경을 통하여 온 몸에 전달되는 것과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은 척수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와, 그를 중심한 말초신경에 해당되는 성도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에 빠짐없이 미쳐져야 한다. 그리고 인체에 있어서의 척수를 중심한 말초신경은 한 국가의 정당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정당에 해당한 구실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이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폐장과 심장과 위장이 말초신경을 통하여 전달되는 두뇌의 명령을 따라, 서로 상충이 없이 원만한 수수의 작용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 장기에 해당되는 이상사회의 입법 사법 행정의 세 장기에 해당되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서로 원리적인 수수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팔 다리가 두뇌의 명령을 따라, 인간의 생활목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잇는 것과 같이, 팔 다링 해당되는 경제기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상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체에 있어서 간장이 전신을 위하여 영양을 저축하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에 있어서도 항상 전체적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저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의 몸 전체가 두뇌와 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체들 사이에 자동적으로 횡적인 관계가 맺어져서, 불가분의 유기체를 이루고 잇는 것처럼, 이상사회도 모든 사회인들이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횡적인 관계를 맺게되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있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이 바로 자기를 해치는 결과로 돌아오기 때문에, 범죄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또 복귀섭리가 이 사회구조를 어떻게 복귀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서구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의 과정을 보면, 입법 행정의 3권과 정당의 기능을 통틀어 국왕 한 사람이 전담하여 오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변천하여 국왕이 3권을 장악하고, 교황을 중심한 교회가 정당과 같은 사명을 담당하던 시대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정치제도는 다시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으로 분립되었고, 정당이 뚜렷한 정치적인 사명을 가지게 되어, 민주주의 입헌정치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이상사회 제도의 형만은 갖추게 되었다. 이와같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치체제가 변천해 온 것은, 타락된 인간사회가 복귀섭리에 의하여 완성된 인간 하나의 구조와 기능을 닮은 이상사회로 복귀되어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어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체는 3권으로 분립되고 또 정당이 생겨남으로써, 드디어 인간 하나의 구조를 닮기에 이르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귀되지 않은 타락인간과 같은 것이어서, 창조본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곧 정당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것은 두뇌의 명령을 전달할 수 없게 된 척수와 그를 중심한 말초신경과같은 것이라 하겠다. 즉 헌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입법 사법 행정의 세 기관은 마치 신경계통이 끊어져 두뇌로부터 오는 명령에 감응할 수 없게 된 세 장기와 같이되어서, 그것들은 상호간에 질서와 조화를 잃어버리고 항상 대립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이상의 목적은, 예수님이 오셔서 타락인간 하나의 구조를 닮고 있는 현재의 정치체제에, 완전한 중추신경을 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그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제3절 정치와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1789~1918) 전 시기에 있어서 종교 및 사상의 투쟁은, 가인 아벨 두 형의 인생관을 수립하였고,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 형의 인생관은 각자의 방향대로 성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성숙에 따라서 가인 아벨의 두 형의 세계가 이룩되어 갔으며, 사회의 구조도 이 두 인생관에 입각한 사회형태에로 정리되어가면서, 정치와 경제와 사상도 이상사회에로 전환될 수 있는 전단계에까지 진전하였다.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있은 후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가 바로 이러한 섭리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Ⅰ. 민주주의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본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이미 앞 장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가 나오게 된 외적인 경위였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굽이침 속에서, 어떠한 사상의 흐름을 타고 오늘의 민주주의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인 경위를 알아야 한다. 이미 후편 제4장 제7절 Ⅱ에서 논한 바와 같이, 기독왕국시대에 있어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의 왕국이 하나 되어 메시아왕국을 위한 군주사회를 이루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더라면, 그 때에 봉건시대는 끝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연장되어 정치사와 종교사와 경제사가 서로 분립된 노정을 따라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봉건시대에 있어 지방 제후에게 분산되어 있었던 정치권력은 십자군전쟁 이후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약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후들은 민족을 단위로 하는 통일국가를 세워 국왕 밑에 집중함으로써, 중앙집권에 의한 절대주의국가(전체주의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왕권신수설 등의 영향으로 왕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 전제군주시대였다. 이 시대가 오게 되는 원인을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첫째로, 시민계급이 국왕과 결합하여 봉건계급과 대항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경제적인 활동에 있어, 무역경제의 지배를 위하여 봉건제도를 벗어난 강력한 국가의 배경을 필요로 하였으며, 아울러 국민의 전체적인 복리를 위하여 강력한 국가의 보호와 감독에 의한 중상주의 경제정책이 요망된 데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복귀섭리로 본 역사발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대의 교황과 국왕이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사회는 완성되지 못하고, 교황을 중심한 그 사회는 도리어 사탄의 앞질러 이루어 나온 노정을 따라 사탄편 전제군주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제 가인형의 인생관을 중심한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인생관을 중심한 민주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고 있는 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전제군주사회의 귀추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치 중세 봉건사회가 히브리사상에도 헬라사상에도 한가지로 배치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 두 사상이 함께 그것을 타파하여, 가인 아벨 두 형의 인생관에 입각한 두 형의 사회를 수립하였던 것처럼, 전제군주사회도 역시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민주주의에 의한 신앙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아벨형 인생관의 목적 달성에도 배치되는 사회였었고, 도 그 사회는 그 안에 의연히 남아있던 봉건제도가 무신론자와 유물론자들이 지도하는 시민 계급의 발전을 막고 있어서 가인형 인생관의 목적 달성에도 배치되는 사회였었기 때문에, 이 두 형의 인생관이 함께 이 사회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드디어 가인 아벨 두 형의 민주주의에 입각한 공산과 민주 두 형의 사회를 형성한 것이다. 1. 가인형의 민주주의 가인형의 민주주의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하여는 먼저 프랑스혁명에 관한 것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당시의 프랑스는 가인형의 인생관으로 말미암아,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흘러가던 계몽사상이 팽배한 시대에 있었다. 따라서 이렇듯 계몽사상에 붙들어 있던 시민계급은, 절대주의에 대한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절대주의사회 안에 아직도 깊이 뿌리박고 있는 구제도의 잔해를 타파하려는 생각이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시민들이 1789년 계몽사상의 큰 조류에 의하여, 절대주의사회의 봉건적 지배계급을 타파하는 동시에, 제3계급(시민)의 자유평등과 해방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일어난 혁명이 곧 프랑스혁명이었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인권선언’이 공표됨으로써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수립되었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가인형의 인생관을 세우기 위하여, 유물사상으로 흘러간 계몽사상이 절대주의사회를 타파하면서 출현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인형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의 주요인물들도 그러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사상가 디드로(Diderot. Denis 1713~1784)나 달랑베르(d’Alembert. Jean Le Rond 1717~1783)등도 무신론 또는 유물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 혁명의 경위론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개성의 자유와 평등보다도 전체주의에로 바뀌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가인형의 인생관은 계몽사상을 세워 프랑스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가인형의 민주주의를 이룩하였고, 이것이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인간 본성의 내적인 추구의 길을 완전히 막고 외적으로만 더욱 발전하여, 독일에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에서의 레닌주의로 체계화됨으로써, 마침내 공산주의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2. 아벨형의 민주주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인하여 실현된 민주주의와 그 발단부터가 다르다. 후자는 가인형 인생관의 소산인 무신론 및 유물론의 주창자들이, 절대주의 사회를 타파하는 것으로써 실현한 가인형의 민주주의였음에 반하여, 전자는 아벨형 인생관의 결실체인 영광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실현한 아벨형의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면 영국과 미국에서는 어떻게 하여 아벨형의 민주주의를 수립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전제주의와 국교를 강화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내의 타국 또는 신대륙으로 옮기었고, 일찌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적인 압박을 받던 일부의 청교도들이 국민맹약을 결의하고 국왕에 항거하였던 것이다(1640년).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의 핵심이었던 청교도들이 크롬웰(Cromwell, Oliver1599~1658)을 중심하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1642년). 그뿐 아니라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와 국교의 강화가 극심하여지자, 그의 사위로서 홀랜드총독으로 있었던 오렌지공 윌리암(Wiliam Ⅲ 1650~1702)은, 1688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신앙의 자유와 민권의 옹호를 위하여 영국에 상륙하여 무혈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윌리암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의회에서 상신한 ‘권리의 선언’을 승인하여 의회의 독립적인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이것이 영국헌법의 기본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 혁명은 무혈로 성공하였기 대문에 이것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영국에 있어서의 이 혁명은, 외적으로 보면 물론 시민계급이 귀족 승려 등 대지주계급으로부터 정치적인 자유와 행방을 얻으려고 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더 주요한 원인은 그러한 혁명을 통하여 내적인 신앙의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전제주의 왕정하에서 탄압을 받고 있던 청교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아가서 1776년에 독립국가를 수립함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영국과 미국에서 수립된 민주주의는 아벨형의 인생관을 중심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사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으로써 수립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아벨형의 민주주의라고 한다. 이렇게 되어 아벨형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세계를 형성하는데 이르렀다. Ⅱ. 삼권분립의 원리적 의의 3권분립사상은 절대주의의 정치체제로 인하여, 국가의 권력이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에 집중하는 것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계몽사상과의 중진이었던 몽케스키외(Montesquieu, 1689~1755)에 의하여 제창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프랑스혁명 때 ‘인권선언’의 선포로써 실현되었다. 그러나 원래 이 3권분립은 하늘편에서 이루려 했던 이상사회의 구조로서, 복귀섭리의 전 노정이 그러하듯이, 이것 또한 사탄편에서 앞질러 비원리적인 원리형으로 먼저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사회의 구조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창조원리에서 밝힌 바와같이, 피조세계는 완성한 인간 하나의 구조를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완성한 인간들로써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도 역시, 완성한 인간 하나의 구조와 기능을 닮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체의 모든 기관이 두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의 모든 기관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하여 영위되어야 하며, 또 두뇌로부터의 모든 명령이 척수를 중심한 말초신경을 통하여 온 몸에 전달되는 것과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은 척수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와, 그를 중심한 말초신경에 해당되는 성도들을 통하여 사회 전체에 빠짐없이 미쳐져야 한다. 그리고 인체에 있어서의 척수를 중심한 말초신경은 한 국가의 정당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상사회에 있어서의 정당에 해당한 구실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이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폐장과 심장과 위장이 말초신경을 통하여 전달되는 두뇌의 명령을 따라, 서로 상충이 없이 원만한 수수의 작용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 장기에 해당되는 이상사회의 입법 사법 행정의 세 장기에 해당되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서로 원리적인 수수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팔 다리가 두뇌의 명령을 따라, 인간의 생활목적을 위하여 활동하고 잇는 것과 같이, 팔 다링 해당되는 경제기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상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체에 있어서 간장이 전신을 위하여 영양을 저축하는 것과 같이, 이상사회에 있어서도 항상 전체적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저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의 몸 전체가 두뇌와 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체들 사이에 자동적으로 횡적인 관계가 맺어져서, 불가분의 유기체를 이루고 잇는 것처럼, 이상사회도 모든 사회인들이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횡적인 관계를 맺게되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있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이 바로 자기를 해치는 결과로 돌아오기 때문에, 범죄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또 복귀섭리가 이 사회구조를 어떻게 복귀하여 왔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서구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의 과정을 보면, 입법 행정의 3권과 정당의 기능을 통틀어 국왕 한 사람이 전담하여 오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변천하여 국왕이 3권을 장악하고, 교황을 중심한 교회가 정당과 같은 사명을 담당하던 시대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정치제도는 다시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으로 분립되었고, 정당이 뚜렷한 정치적인 사명을 가지게 되어, 민주주의 입헌정치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이상사회 제도의 형만은 갖추게 되었다. 이와같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치체제가 변천해 온 것은, 타락된 인간사회가 복귀섭리에 의하여 완성된 인간 하나의 구조와 기능을 닮은 이상사회로 복귀되어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어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체는 3권으로 분립되고 또 정당이 생겨남으로써, 드디어 인간 하나의 구조를 닮기에 이르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귀되지 않은 타락인간과 같은 것이어서, 창조본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곧 정당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것은 두뇌의 명령을 전달할 수 없게 된 척수와 그를 중심한 말초신경과같은 것이라 하겠다. 즉 헌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입법 사법 행정의 세 기관은 마치 신경계통이 끊어져 두뇌로부터 오는 명령에 감응할 수 없게 된 세 장기와 같이되어서, 그것들은 상호간에 질서와 조화를 잃어버리고 항상 대립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이상의 목적은, 예수님이 오셔서 타락인간 하나의 구조를 닮고 있는 현재의 정치체제에, 완전한 중추신경을 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그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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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제2절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789) 이 기간은 서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교운동이 성공한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의 140년 기간을 말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의하여 인간 본성의 내 외 양면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을 개척하게 된 근세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신학및 교리의 철학의 싸움을 면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후편에서 말해 온 바와 같이, 복귀섭리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개인에서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인 아벨 두 형의 분립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에 있어서도 이 타락세계는 가인형의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민주세계로 분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만 <실체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 땡도 가인형의 세계가 아벨형의 세계에 굴복함으로써만 재림 주님을 맞기 위한 세계적인 <실체기대>기 이루어져서, 하나의 세계를 복귀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가인 아벨 두 형의 세계가 이루어지려면, 그를 위한 두 형의 인생관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이 두 형의 인생관은 이 기간에 확립되었던 것이다. Ⅰ. 가인형의 인생관 인간 본성의 외적인 추구는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키어 인본주의를 낳았고, 인본주의를 뒷받침으로 하여 일어난 반중세적인 문예부흥운동은, 신에의 귀의와 종교적인 헌신을 가벼이 하고, 모든 것을 자연과 인간본위로 대치시켰다. 즉 신에 복종한 나머지, 자연이나 인간의 육신을 천하게 여겨 죄악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중세적인 인생관에서, 이성과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비판과 실증적인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높이는 인생관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자연과학의 발달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인하여, 인생에 대한 인식 사유의 방법론에 두 가지 형식을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근세철학의 2대조류를 이루게 되었으니, 하나는 연역법에 의한 이성론이요 또 하나는 귀납법에 의한 경험론이다. 프랑스의 데까르뜨(Descartes, Rene 1596~1650)를 원조로 하는 이성론은, 모든 진리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잇는 이성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역사성이나 전통을 타파하고 연역법을 근거로 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를 세우고, 이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비로소 외계를 긍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이나 세계나 자기까지도 부정하는 입장에 서려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베이컴(Bacon, Francis 1561~1626)을 원조로 하는 경험론은, 모든 진리는 경험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마치 백지와 같아서 새로운 진리를 체득하려면,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실험과 관찰에 의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을 떠나서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사상과, 경험에 토대로 둔 인간 중심의 현실주의사상은 한 가지로 신비와 공상을 배격하고, 인간생활을 합리화하며 현실화하여 자연과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예부흥은 인문주의로부터 흘러온 두 사조를 타고, 인간이 그의 내적인 성향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자하는 길을 막고, 외적인 성향만을 따라서 사탄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생관을 낳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인형의 인생관이었다. 이 가인형의 인생관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역사와 전통을 타파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이성적 또는 현실적으로만 판단하며, 불합리한 것이나 비현실적인 것을 철저히 배격하여, 이것이 바로 계몽사상이었다. 이와같이 경험론과 이성론을 주류로 하여 피어 오른 계몽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가인형의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는 허버트(Herbert, Edward 1583~1648)를 시조로 하여 초월신교(Deism)가 생겼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의 조화에 기초를 두고 발전한 신학에 대하여, 초월신교는 단순히 이 성을 기초로한 신학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들의 신관은 단순히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뜻에만 국한시키려 하고, 인간에게 있어 신의 계시나 기적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엽 독일의 헤겔(Hegel, Georg Friedrich Wilhelm 1770~1831)은 18세기 이후에 일어난 관념론 철학을 대성하였다. 그러나 이 헤겔 철학도,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그를 반대하는 헤겔 좌파의 파생을 가져 왔다. 그리하여 이들 헤겔 좌파는 헤겔의 논리를 뒤집어서, 오늘의 공산세계를 이룩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헤겔 좌파인 슈트라우스(Strauss, David Friedrich 1808~1874)는 ‘예수전’을 저술하여 성서에 나타난 기적은 후세의 날조라고 부정하였고, 포이에르바하(Feuerbach, Ludwig Andreas 1804~1872)는 그의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에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여건이 종교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그들의 학설은 유물론의 뒷받침이 되었다.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와 엥겔스(Engels, Friedrich 1820~1895)는 슈트라우스나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도 프랑스의 사회주의사상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창함으로써, 문예부흥 이후에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사조로 발전해 온 무신론과 유물론을 집대성하는데 이르렀다. 그 후에 가인형의 인생관은 더욱 성숙하여 오늘의 공산주의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Ⅱ. 아벨형의 인생관 우리는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에로의 역사의 흐름을, 신이나 종교로부터 인간간을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과정으로만 보기 쉽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세 사회인의 본성의 외적인 추구에 의하여 일어났던 가인형의 인생관에 입각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중세인들의 본성적인 추구는 이러한 외적인 것에만 멎어졌던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들의 본성의 내적인 추구가 히브리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철학과 종교는 창조본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우리는 아벨형의 인생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인형의 인생관은 중세인을 신과 신앙으로부터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지만, 이 아벨형의 인생형의 인생관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차적으로 신을 지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독일의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는 서로 대립하여 나왔던 경험론과 이성론을 흡수하여 새로이 비판철학을 세움으로써, 내 외 양면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아벨형의 인생관을 개척하였다. 즉 우리의 다양한 감각은 대상의 촉발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인식의 내용만 주어질 뿐이고 인식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인식이 성립되기 위하여는 다양한 그 내용(이것은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다)을 일정한 관계에 의하여 통일하는 형식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 형식은 바로 나의 주관이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능력 즉 나의 오성의 자발적인 작용에 의하여, 나의 주관적인 형식(이것은 선천적이며 초경험적이다)을 가지고 대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하한 감각을 통합하고 통일하는데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칸트는 대상으로 인하여 주관을 형성한다는 종래의 모사설을 뒤집어, 주관이 대상을 구성한다는 학설을 세우게 되었다. 칸트의 학설을 받아, 그의 제1후계자인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 1762~1814)를 비롯하여, 셸링(Schelling,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1775~1854) 헤겔등이 배출되었던 것인데, 특히 헤겔은 그의 변증법으로 철학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관념론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의 아벨형의 인생관을 형성하였다. 종교계에 있어서는, 당시의 사조인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있던 종교계의 경향을 반대하고,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여, 교리와 형식보다도 신비적 체험에 치중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첫째 경건주의(Pietism)로서, 이것은 독일의 스페너(Spener, Philp 1635~1705)를 중심하고 일어났던 것인데, 정통적 신앙을 따르려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고, 신비적인 체험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이 경건파의 운동이 영국에 파급되어 영국민의 생활속에 스며있던 종교심과 융합하여, 웨슬레(Wesiey) 형제를 중심한 메소디스트(Methodist)파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파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당시의 영국 교계에 크게 부흥의 기운을 일으켰었다. 또 영국에는 신비주의자 폭스(Fox, George 1624~1691)를 원조로 한 퀘이커(Quaker)파가 일어났다. 폭스는 그리스도는 신자의 영혼을 비치는 내적인 빛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내적 광명을 체휼하지 않으면 성서의 참 뜻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파는 미대륙에서도 많은 박해를 받으며 포교하였다. 다음으로 스웨덴보리(Swedenborg, Emanuel 1688~1772)는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영안이 열려서 영계의 많은 비밀을 발표하였다. 그의 발표는 오랫동안 신학계에서 무시를 당하여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영계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점차 그 가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아벨형의 인생관은 무르익어 오늘의 민주주의 세계를 이루어 놓게 된 것이다.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제2절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789) 이 기간은 서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교운동이 성공한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의 140년 기간을 말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의하여 인간 본성의 내 외 양면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을 개척하게 된 근세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신학및 교리의 철학의 싸움을 면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후편에서 말해 온 바와 같이, 복귀섭리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개인에서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인 아벨 두 형의 분립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에 있어서도 이 타락세계는 가인형의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민주세계로 분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만 <실체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 땡도 가인형의 세계가 아벨형의 세계에 굴복함으로써만 재림 주님을 맞기 위한 세계적인 <실체기대>기 이루어져서, 하나의 세계를 복귀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가인 아벨 두 형의 세계가 이루어지려면, 그를 위한 두 형의 인생관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이 두 형의 인생관은 이 기간에 확립되었던 것이다. Ⅰ. 가인형의 인생관 인간 본성의 외적인 추구는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키어 인본주의를 낳았고, 인본주의를 뒷받침으로 하여 일어난 반중세적인 문예부흥운동은, 신에의 귀의와 종교적인 헌신을 가벼이 하고, 모든 것을 자연과 인간본위로 대치시켰다. 즉 신에 복종한 나머지, 자연이나 인간의 육신을 천하게 여겨 죄악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중세적인 인생관에서, 이성과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비판과 실증적인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높이는 인생관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자연과학의 발달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인하여, 인생에 대한 인식 사유의 방법론에 두 가지 형식을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근세철학의 2대조류를 이루게 되었으니, 하나는 연역법에 의한 이성론이요 또 하나는 귀납법에 의한 경험론이다. 프랑스의 데까르뜨(Descartes, Rene 1596~1650)를 원조로 하는 이성론은, 모든 진리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잇는 이성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역사성이나 전통을 타파하고 연역법을 근거로 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를 세우고, 이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비로소 외계를 긍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이나 세계나 자기까지도 부정하는 입장에 서려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베이컴(Bacon, Francis 1561~1626)을 원조로 하는 경험론은, 모든 진리는 경험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마치 백지와 같아서 새로운 진리를 체득하려면,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실험과 관찰에 의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을 떠나서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사상과, 경험에 토대로 둔 인간 중심의 현실주의사상은 한 가지로 신비와 공상을 배격하고, 인간생활을 합리화하며 현실화하여 자연과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예부흥은 인문주의로부터 흘러온 두 사조를 타고, 인간이 그의 내적인 성향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자하는 길을 막고, 외적인 성향만을 따라서 사탄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생관을 낳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인형의 인생관이었다. 이 가인형의 인생관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역사와 전통을 타파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이성적 또는 현실적으로만 판단하며, 불합리한 것이나 비현실적인 것을 철저히 배격하여, 이것이 바로 계몽사상이었다. 이와같이 경험론과 이성론을 주류로 하여 피어 오른 계몽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가인형의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는 허버트(Herbert, Edward 1583~1648)를 시조로 하여 초월신교(Deism)가 생겼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의 조화에 기초를 두고 발전한 신학에 대하여, 초월신교는 단순히 이 성을 기초로한 신학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들의 신관은 단순히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뜻에만 국한시키려 하고, 인간에게 있어 신의 계시나 기적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엽 독일의 헤겔(Hegel, Georg Friedrich Wilhelm 1770~1831)은 18세기 이후에 일어난 관념론 철학을 대성하였다. 그러나 이 헤겔 철학도,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그를 반대하는 헤겔 좌파의 파생을 가져 왔다. 그리하여 이들 헤겔 좌파는 헤겔의 논리를 뒤집어서, 오늘의 공산세계를 이룩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헤겔 좌파인 슈트라우스(Strauss, David Friedrich 1808~1874)는 ‘예수전’을 저술하여 성서에 나타난 기적은 후세의 날조라고 부정하였고, 포이에르바하(Feuerbach, Ludwig Andreas 1804~1872)는 그의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에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여건이 종교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그들의 학설은 유물론의 뒷받침이 되었다.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와 엥겔스(Engels, Friedrich 1820~1895)는 슈트라우스나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도 프랑스의 사회주의사상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창함으로써, 문예부흥 이후에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사조로 발전해 온 무신론과 유물론을 집대성하는데 이르렀다. 그 후에 가인형의 인생관은 더욱 성숙하여 오늘의 공산주의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Ⅱ. 아벨형의 인생관 우리는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에로의 역사의 흐름을, 신이나 종교로부터 인간간을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과정으로만 보기 쉽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세 사회인의 본성의 외적인 추구에 의하여 일어났던 가인형의 인생관에 입각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중세인들의 본성적인 추구는 이러한 외적인 것에만 멎어졌던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들의 본성의 내적인 추구가 히브리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철학과 종교는 창조본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우리는 아벨형의 인생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인형의 인생관은 중세인을 신과 신앙으로부터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지만, 이 아벨형의 인생형의 인생관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차적으로 신을 지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독일의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는 서로 대립하여 나왔던 경험론과 이성론을 흡수하여 새로이 비판철학을 세움으로써, 내 외 양면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아벨형의 인생관을 개척하였다. 즉 우리의 다양한 감각은 대상의 촉발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인식의 내용만 주어질 뿐이고 인식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인식이 성립되기 위하여는 다양한 그 내용(이것은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다)을 일정한 관계에 의하여 통일하는 형식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 형식은 바로 나의 주관이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능력 즉 나의 오성의 자발적인 작용에 의하여, 나의 주관적인 형식(이것은 선천적이며 초경험적이다)을 가지고 대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하한 감각을 통합하고 통일하는데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칸트는 대상으로 인하여 주관을 형성한다는 종래의 모사설을 뒤집어, 주관이 대상을 구성한다는 학설을 세우게 되었다. 칸트의 학설을 받아, 그의 제1후계자인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 1762~1814)를 비롯하여, 셸링(Schelling,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1775~1854) 헤겔등이 배출되었던 것인데, 특히 헤겔은 그의 변증법으로 철학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관념론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의 아벨형의 인생관을 형성하였다. 종교계에 있어서는, 당시의 사조인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있던 종교계의 경향을 반대하고,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여, 교리와 형식보다도 신비적 체험에 치중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첫째 경건주의(Pietism)로서, 이것은 독일의 스페너(Spener, Philp 1635~1705)를 중심하고 일어났던 것인데, 정통적 신앙을 따르려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고, 신비적인 체험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이 경건파의 운동이 영국에 파급되어 영국민의 생활속에 스며있던 종교심과 융합하여, 웨슬레(Wesiey) 형제를 중심한 메소디스트(Methodist)파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파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당시의 영국 교계에 크게 부흥의 기운을 일으켰었다. 또 영국에는 신비주의자 폭스(Fox, George 1624~1691)를 원조로 한 퀘이커(Quaker)파가 일어났다. 폭스는 그리스도는 신자의 영혼을 비치는 내적인 빛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내적 광명을 체휼하지 않으면 성서의 참 뜻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파는 미대륙에서도 많은 박해를 받으며 포교하였다. 다음으로 스웨덴보리(Swedenborg, Emanuel 1688~1772)는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영안이 열려서 영계의 많은 비밀을 발표하였다. 그의 발표는 오랫동안 신학계에서 무시를 당하여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영계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점차 그 가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아벨형의 인생관은 무르익어 오늘의 민주주의 세계를 이루어 놓게 된 것이다.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제2절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1648~1789) 이 기간은 서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교운동이 성공한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의 140년 기간을 말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의하여 인간 본성의 내 외 양면의 욕망을 추구하는 길을 개척하게 된 근세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신학및 교리의 철학의 싸움을 면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후편에서 말해 온 바와 같이, 복귀섭리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개인에서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인 아벨 두 형의 분립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져 나오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에 있어서도 이 타락세계는 가인형의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민주세계로 분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만 <실체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 땡도 가인형의 세계가 아벨형의 세계에 굴복함으로써만 재림 주님을 맞기 위한 세계적인 <실체기대>기 이루어져서, 하나의 세계를 복귀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가인 아벨 두 형의 세계가 이루어지려면, 그를 위한 두 형의 인생관이 확립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이 두 형의 인생관은 이 기간에 확립되었던 것이다. Ⅰ. 가인형의 인생관 인간 본성의 외적인 추구는 헬라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키어 인본주의를 낳았고, 인본주의를 뒷받침으로 하여 일어난 반중세적인 문예부흥운동은, 신에의 귀의와 종교적인 헌신을 가벼이 하고, 모든 것을 자연과 인간본위로 대치시켰다. 즉 신에 복종한 나머지, 자연이나 인간의 육신을 천하게 여겨 죄악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중세적인 인생관에서, 이성과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비판과 실증적인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높이는 인생관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자연과학의 발달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인하여, 인생에 대한 인식 사유의 방법론에 두 가지 형식을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근세철학의 2대조류를 이루게 되었으니, 하나는 연역법에 의한 이성론이요 또 하나는 귀납법에 의한 경험론이다. 프랑스의 데까르뜨(Descartes, Rene 1596~1650)를 원조로 하는 이성론은, 모든 진리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잇는 이성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역사성이나 전통을 타파하고 연역법을 근거로 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를 세우고, 이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비로소 외계를 긍정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이나 세계나 자기까지도 부정하는 입장에 서려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베이컴(Bacon, Francis 1561~1626)을 원조로 하는 경험론은, 모든 진리는 경험에 의하여서만 탐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마치 백지와 같아서 새로운 진리를 체득하려면,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실험과 관찰에 의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을 떠나서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사상과, 경험에 토대로 둔 인간 중심의 현실주의사상은 한 가지로 신비와 공상을 배격하고, 인간생활을 합리화하며 현실화하여 자연과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예부흥은 인문주의로부터 흘러온 두 사조를 타고, 인간이 그의 내적인 성향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자하는 길을 막고, 외적인 성향만을 따라서 사탄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생관을 낳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가인형의 인생관이었다. 이 가인형의 인생관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역사와 전통을 타파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이성적 또는 현실적으로만 판단하며, 불합리한 것이나 비현실적인 것을 철저히 배격하여, 이것이 바로 계몽사상이었다. 이와같이 경험론과 이성론을 주류로 하여 피어 오른 계몽사상은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가인형의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는 허버트(Herbert, Edward 1583~1648)를 시조로 하여 초월신교(Deism)가 생겼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의 조화에 기초를 두고 발전한 신학에 대하여, 초월신교는 단순히 이 성을 기초로한 신학을 세우려한 것이다. 그들의 신관은 단순히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뜻에만 국한시키려 하고, 인간에게 있어 신의 계시나 기적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엽 독일의 헤겔(Hegel, Georg Friedrich Wilhelm 1770~1831)은 18세기 이후에 일어난 관념론 철학을 대성하였다. 그러나 이 헤겔 철학도,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무신론과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그를 반대하는 헤겔 좌파의 파생을 가져 왔다. 그리하여 이들 헤겔 좌파는 헤겔의 논리를 뒤집어서, 오늘의 공산세계를 이룩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헤겔 좌파인 슈트라우스(Strauss, David Friedrich 1808~1874)는 ‘예수전’을 저술하여 성서에 나타난 기적은 후세의 날조라고 부정하였고, 포이에르바하(Feuerbach, Ludwig Andreas 1804~1872)는 그의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에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여건이 종교 발생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그들의 학설은 유물론의 뒷받침이 되었다.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와 엥겔스(Engels, Friedrich 1820~1895)는 슈트라우스나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도 프랑스의 사회주의사상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창함으로써, 문예부흥 이후에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사조로 발전해 온 무신론과 유물론을 집대성하는데 이르렀다. 그 후에 가인형의 인생관은 더욱 성숙하여 오늘의 공산주의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Ⅱ. 아벨형의 인생관 우리는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에로의 역사의 흐름을, 신이나 종교로부터 인간간을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과정으로만 보기 쉽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세 사회인의 본성의 외적인 추구에 의하여 일어났던 가인형의 인생관에 입각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중세인들의 본성적인 추구는 이러한 외적인 것에만 멎어졌던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그들의 본성의 내적인 추구가 히브리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철학과 종교는 창조본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우리는 아벨형의 인생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인형의 인생관은 중세인을 신과 신앙으로부터 분리 혹은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지만, 이 아벨형의 인생형의 인생관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차적으로 신을 지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독일의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는 서로 대립하여 나왔던 경험론과 이성론을 흡수하여 새로이 비판철학을 세움으로써, 내 외 양면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아벨형의 인생관을 개척하였다. 즉 우리의 다양한 감각은 대상의 촉발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인식의 내용만 주어질 뿐이고 인식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인식이 성립되기 위하여는 다양한 그 내용(이것은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다)을 일정한 관계에 의하여 통일하는 형식이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 형식은 바로 나의 주관이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능력 즉 나의 오성의 자발적인 작용에 의하여, 나의 주관적인 형식(이것은 선천적이며 초경험적이다)을 가지고 대상으로부터 오는 다양하한 감각을 통합하고 통일하는데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칸트는 대상으로 인하여 주관을 형성한다는 종래의 모사설을 뒤집어, 주관이 대상을 구성한다는 학설을 세우게 되었다. 칸트의 학설을 받아, 그의 제1후계자인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 1762~1814)를 비롯하여, 셸링(Schelling,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1775~1854) 헤겔등이 배출되었던 것인데, 특히 헤겔은 그의 변증법으로 철학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관념론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의 아벨형의 인생관을 형성하였다. 종교계에 있어서는, 당시의 사조인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있던 종교계의 경향을 반대하고,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여, 교리와 형식보다도 신비적 체험에 치중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첫째 경건주의(Pietism)로서, 이것은 독일의 스페너(Spener, Philp 1635~1705)를 중심하고 일어났던 것인데, 정통적 신앙을 따르려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고, 신비적인 체험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이 경건파의 운동이 영국에 파급되어 영국민의 생활속에 스며있던 종교심과 융합하여, 웨슬레(Wesiey) 형제를 중심한 메소디스트(Methodist)파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파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당시의 영국 교계에 크게 부흥의 기운을 일으켰었다. 또 영국에는 신비주의자 폭스(Fox, George 1624~1691)를 원조로 한 퀘이커(Quaker)파가 일어났다. 폭스는 그리스도는 신자의 영혼을 비치는 내적인 빛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내적 광명을 체휼하지 않으면 성서의 참 뜻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파는 미대륙에서도 많은 박해를 받으며 포교하였다. 다음으로 스웨덴보리(Swedenborg, Emanuel 1688~1772)는 저명한 과학자이면서 영안이 열려서 영계의 많은 비밀을 발표하였다. 그의 발표는 오랫동안 신학계에서 무시를 당하여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영계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점차 그 가치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아벨형의 인생관은 무르익어 오늘의 민주주의 세계를 이루어 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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