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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보관물: 2002년 5월월
신병체험과 성무과정
제4장 성무과정 무속의 실태에서 중,북부 지역에서는 강신무, 호남,영남,제주도의 남부지역에서는 세습무가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자는 신의 영역을 위주로 하는 무이고, 후자는 세습적 사제권을 위주로하는 무이다. “이 두 개의 각기 다른 무가 어떻게 해서 무당이 되는가”하는 그 성무의 과정을 이 장에서는 살펴보게 될 것이다. 제 1 절 강신무의 신병체험과 성무과정 영력을 소지한 강신영감무는성무초기에 반드시 신병1)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같은 신병의 체험은 무가 영력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무가 될 사람에게 신이 내리면 정신이상증세가 오고 신체상에도 이상질환증세가 나타나 장기간 극심한 고통을 겪게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증세가 민간에서 의학치료가 불가능하여 강신한 신을 받아서 무가되어야만 완치된다는데에 다음과 같은 문제성이 따르게 된다. 신병이 병인 것은 틀림없으나 신에 의한 이상증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신 이상증세가 와서 이 병은 정신병적인 것 이지만 신을 전제로 해서 발병하는 것이라 믿는데에 또 다른 특수 이상증세로 등장하여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신무가 되자면 반드시 이와같은 신병의 과정을 거쳐야하고 또 이 신병은 무가되어 강신한 신을 섬겨야만 완치된다는데에 종교상의 문제가 따르지 않을 수 없게된다. 이와같이 신병이 병증세로 나타나면서도 종교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병은 과연 신에 의한 종교적 현상인가, 아니면 신과는 무관한 정신이상증세인가? 그렇다면 무에게 강신되어 무가 신앙하고 있는 신의 존재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복합적 다양성을 띈 신병현상은 어느한 측면에선의 그 의미분석이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민속학적 견지에서 먼저 민속지적 조사자료를 통해 신병의 증상을 살펴본 다음 무가 생활하고 있는 문화적환경에 비중을 두어 신병의 본질과 그 발생원인을 검토하되 심리적 종교적 양면성도 동시에 고찰하고자 한다. 1. 강신 신병의 한계와 분포 한국의 무를 현재의 공시적 입장에서 무의 기능에 기준을 두어 분류할 경우, 강신영감무계류와 세습사제계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영력을 소지하여 신과 통교할 수 잇는 기능이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영력과는 무관하게 혈통적 세습 사제권에 의해 의례의 거행에만 치중한다. 이와같은 양자의 무계류중 강신 신병은 오직 전자의 강신영감무계류에 한하여 성무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치게 된다. 따라서 강신으로 인한 이런 신병은 강신영감무가 영력을 소지할 수 있는 영력의 motive가 되는 동시에 ecstasy의 원천이 된다. 그리하여 신병은 세습사제무계류를 제외한 강신영감무계류, 즉 무당, 박수, 선무당류(類), 명두, 태주 등의 점쟁이류가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외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독경자(讀經者), 즉 경꾼, 경쟁이 류의 무경계류에서도 강신 초기에 신병을 체험하게 된다. 즉 독경자도 당초(무에 잡히게되는 초기)에 독경의식을 인위적으로 학습하는 것과 강신으로 인해 신병을 체험하고 나서 神意에 따라 후에 독경의식을 학습하게 되는 이중의 계기로 구분된다. 강신으로 인한 신병의 분포는 현재 강신영감무와 독경자가 존재하는 전국의 전지역이 된다. 이와 같이 강신에 의한 신병자가 지금도 전국에서 속출되고 있지만 이중에서도 세습사제무가 분포된 호남, 영남, 제주 지역에서는 강신영감무와 세습사제무가 공존하여 잇는한 삼개지역은 신병현상이 존재하면서도 세습사제무에게는 신병이 무관한 것으로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남,여성별상으로 나타나는 신병의 범위를 보면 女巫가 거의 지배적이며, 男巫는 극소하다. 이것은 무가 대부분 여성이며, 특히 강신영감무의 대부분은 여무이고, 남무의 경우는 박수류로 일컬어 지는 것으로 극히 드물다는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강신영감계류에서 여무가 지배적인 수를 차지하고 이에 따라 남성보다도 여성에게 강신의 신병이 많은 원인은 한국 무계의 분화 변천이라는 책 83쪽에 잘 나와 있으니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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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3.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원형은 만물의 근원을 신으로 보는 입장인데, 원본은 그러한 사고의 근원을 더 분석해 들어가는 견해이다. 즉 무엇이 신의 전능한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찾아가는 사고다. 그래서 원본은 원형이전의 보다 선행되는 존재의 근원문제가 된다. 즉 원본의 본이란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이전에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버선 뽄, 옷의 스타일, 타입이전의 옷의 패턴을 본이라 할 수 있다. 즉 원형에 선행되는 사고근원이 원본이다. 존재의 원본은 카오스의 미분성이라고 했다. 신(神)도 카오스의 미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원본사고는 무속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현상학적 입장에서 볼 때 영원은 시간과 공간밖에 있는 카오스의 것이고 현실을 영원으로 바꾸어 순환지속시켜 나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앞으로) 무속현장의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인간존재와 원본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덧붙혀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인간사고나 무속에서 인간의 눈앞에 형체를 나타내어 ‘있는 것’, 형체는 없지만 인간의 ‘관념’속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존재’라는 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무속의 존재문제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 이렇게 지금까지 서로 다른 의미인 원형과 원본의 개념을 얘기해 온 것은 앞으로 원형이라는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는 원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요약, 평가> 무엇이 무속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무속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거창한 시작과는 달리, 제1절은 허탈한 결론에 이른다. 제1절의 내용은 쉽게 말해 무속 행위의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말로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원형’이라는 개념을 써왔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으니 ‘원본’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쓰겠다는 것이다. 원본사고란 신과의 관계에서 무속의 형태(type)를 찾는 원형사고와는 달리,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무속의 本(pattern)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神을 무속사고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신에 의한 원형사고는 이미 도그마화된 思考로서 일정한 규격이 없는 다양한 형태의 무속현장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속에서의 神은 영원존재이면서도 人體와 같은 形象으로 이해되기에 신을 배제한다. 즉 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고를 무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속에서는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받고, 순환성을 통해 존재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감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속의 祭儀 目的은 인간존재의 영구지속(永久持續), 즉 이생에 살때 편히 잘먹고 잘살고 죽어서도 영생하게 해달라는 인간의 소박한 원의라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流出)설, 신학에서의 여러 이론(Apocatastasis, Recapitulatio)들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무속에서의 이러한 사고는 아주 단순한 걸음마식의 사고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극히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원의(願意)의 실현, 현실화가 바로 무속의 여러 현상들이고,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정형화된 틀에 끼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도그마에 얽매여 ‘현실’과 ‘삶’에 유리된 이론(신학)들을 전개하는 것보다 무속의 사고는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그래서 많은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이러한 무속의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무속의 사고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속의 사고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접합점은 어디에서 찾고, 어느정도까지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하겠다.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3.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원형은 만물의 근원을 신으로 보는 입장인데, 원본은 그러한 사고의 근원을 더 분석해 들어가는 견해이다. 즉 무엇이 신의 전능한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찾아가는 사고다. 그래서 원본은 원형이전의 보다 선행되는 존재의 근원문제가 된다. 즉 원본의 본이란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이전에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버선 뽄, 옷의 스타일, 타입이전의 옷의 패턴을 본이라 할 수 있다. 즉 원형에 선행되는 사고근원이 원본이다. 존재의 원본은 카오스의 미분성이라고 했다. 신(神)도 카오스의 미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원본사고는 무속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현상학적 입장에서 볼 때 영원은 시간과 공간밖에 있는 카오스의 것이고 현실을 영원으로 바꾸어 순환지속시켜 나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앞으로) 무속현장의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인간존재와 원본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덧붙혀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인간사고나 무속에서 인간의 눈앞에 형체를 나타내어 ‘있는 것’, 형체는 없지만 인간의 ‘관념’속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존재’라는 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무속의 존재문제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 이렇게 지금까지 서로 다른 의미인 원형과 원본의 개념을 얘기해 온 것은 앞으로 원형이라는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는 원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요약, 평가> 무엇이 무속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무속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거창한 시작과는 달리, 제1절은 허탈한 결론에 이른다. 제1절의 내용은 쉽게 말해 무속 행위의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말로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원형’이라는 개념을 써왔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으니 ‘원본’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쓰겠다는 것이다. 원본사고란 신과의 관계에서 무속의 형태(type)를 찾는 원형사고와는 달리,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무속의 本(pattern)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神을 무속사고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신에 의한 원형사고는 이미 도그마화된 思考로서 일정한 규격이 없는 다양한 형태의 무속현장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속에서의 神은 영원존재이면서도 人體와 같은 形象으로 이해되기에 신을 배제한다. 즉 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고를 무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속에서는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받고, 순환성을 통해 존재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감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속의 祭儀 目的은 인간존재의 영구지속(永久持續), 즉 이생에 살때 편히 잘먹고 잘살고 죽어서도 영생하게 해달라는 인간의 소박한 원의라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流出)설, 신학에서의 여러 이론(Apocatastasis, Recapitulatio)들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무속에서의 이러한 사고는 아주 단순한 걸음마식의 사고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극히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원의(願意)의 실현, 현실화가 바로 무속의 여러 현상들이고,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정형화된 틀에 끼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도그마에 얽매여 ‘현실’과 ‘삶’에 유리된 이론(신학)들을 전개하는 것보다 무속의 사고는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그래서 많은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이러한 무속의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무속의 사고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속의 사고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접합점은 어디에서 찾고, 어느정도까지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하겠다.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3.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원형은 만물의 근원을 신으로 보는 입장인데, 원본은 그러한 사고의 근원을 더 분석해 들어가는 견해이다. 즉 무엇이 신의 전능한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찾아가는 사고다. 그래서 원본은 원형이전의 보다 선행되는 존재의 근원문제가 된다. 즉 원본의 본이란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이전에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버선 뽄, 옷의 스타일, 타입이전의 옷의 패턴을 본이라 할 수 있다. 즉 원형에 선행되는 사고근원이 원본이다. 존재의 원본은 카오스의 미분성이라고 했다. 신(神)도 카오스의 미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원본사고는 무속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현상학적 입장에서 볼 때 영원은 시간과 공간밖에 있는 카오스의 것이고 현실을 영원으로 바꾸어 순환지속시켜 나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앞으로) 무속현장의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인간존재와 원본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덧붙혀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인간사고나 무속에서 인간의 눈앞에 형체를 나타내어 ‘있는 것’, 형체는 없지만 인간의 ‘관념’속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존재’라는 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무속의 존재문제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 이렇게 지금까지 서로 다른 의미인 원형과 원본의 개념을 얘기해 온 것은 앞으로 원형이라는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는 원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요약, 평가> 무엇이 무속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무속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거창한 시작과는 달리, 제1절은 허탈한 결론에 이른다. 제1절의 내용은 쉽게 말해 무속 행위의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말로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원형’이라는 개념을 써왔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으니 ‘원본’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쓰겠다는 것이다. 원본사고란 신과의 관계에서 무속의 형태(type)를 찾는 원형사고와는 달리,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무속의 本(pattern)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神을 무속사고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신에 의한 원형사고는 이미 도그마화된 思考로서 일정한 규격이 없는 다양한 형태의 무속현장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속에서의 神은 영원존재이면서도 人體와 같은 形象으로 이해되기에 신을 배제한다. 즉 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고를 무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속에서는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받고, 순환성을 통해 존재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감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속의 祭儀 目的은 인간존재의 영구지속(永久持續), 즉 이생에 살때 편히 잘먹고 잘살고 죽어서도 영생하게 해달라는 인간의 소박한 원의라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流出)설, 신학에서의 여러 이론(Apocatastasis, Recapitulatio)들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무속에서의 이러한 사고는 아주 단순한 걸음마식의 사고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극히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원의(願意)의 실현, 현실화가 바로 무속의 여러 현상들이고,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정형화된 틀에 끼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도그마에 얽매여 ‘현실’과 ‘삶’에 유리된 이론(신학)들을 전개하는 것보다 무속의 사고는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그래서 많은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이러한 무속의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무속의 사고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속의 사고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접합점은 어디에서 찾고, 어느정도까지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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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의 원형
제3장 무속(巫俗)의 원형(原型) 무속의 원형 문제는 무엇이 무속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즉 무속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일이다. 즉 무속의 本來思考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속의 배후에 잠재된 그 원형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무엇보다 祭儀가 드러내는 제의현장에 주목하고 그 제의가 성취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주시하여 무속의 본래사고를 찾아보고자 한다. 제1절 ‘원형’(原型, arche type)과 ‘원본’(原本, arche pattern)의 개념 1. ‘원형’(原型)이라는 개념 – 학설 및 문제점 원형(archetype)이란 용어가 지금까지 한국학계에서 자주 거론되어 왔지만, 그 개념이 너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그 개념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어원상으로 ‘원형’이라는 용어는 희랍어 Αρχέ(principium, original) + Τυπος(typos, type)의 합성어의 譯語이다. 1.1. 학자 및 학설 # Paul Foulquie(뽈 훌끼에) : 인간의 경험이 archetype의 복사. # Goblot(고브롯) : archetype의 시원이 플라톤의 Idea. # C. Jung : 영원히 변치않는 의미의 核인 무의식의 구조. # M. Eliade : 모범적 모형. 그래서 제의는 신에 의해 이루어진 천지창조 행위를 모방하는 것, 즉 신화나 제의의 원형을 신의 행동 그 자체로 보는 이론이다. 이중 한국학계에서는 엘리아드의 이론이 주로 사용됨. 1.2. M. Eliade의 개념 사용의 문제점 한국이나 동양신화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이런 곳에서는 신에 의한 천지창조(天地創造) 신화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스스로 열려 우주가 생성되는 천지개벽(天地開闢) 신화이다. 바로 엘리아드의 이론은 한국실정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이 이론은 신화와 제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조사를 통해서 얻어진 자료가 아니고 대부분 인위적으로 서양의 조직화된 종교 경전들의 이차적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원형이론은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여러 자료(동양, 인도)를 기반으로 유도해 낸것이면서도 스스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말해 조직화된 종교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도그마가 加해지기 이전의 자연종교현상이나 신화에다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다면 많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2. 원본의 개념, 무속의 원본사고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무속현장으로부터 무속의 의미를 찾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기에, 위의 학자들 개념의 사용을 일단 보류하고, 무속현장에 깔려있는 존재 근원에 대한 원질사고(原質思考), 즉 존재에 대한 ‘원본’사고를 찾아 보겠다. 즉 인간존재의 영구지속을 위해 무속의 제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무엇이 그 존재의 기준이 되느냐, 즉 무엇이 존재의 지속과 단절, 유․무의 기준이 되느냐의 질문이다. 예컨대 무속에서 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자. 무속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저승으로 돌아간다고 믿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즉 무속에서는 “인간(의 존재)은 유형(有形)의 육체와 무형(無形)의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는 멸(滅)해도 영혼은 불멸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영혼이 있기에 영원하다.” 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기준은 시간성, 공간성이다. 즉 영원이란 공간과 시간밖에 있는 것이기에 무속사고는 시간과 공간 밖의, 시간도 공간도 없는 상태의 영원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굿을 할 때는 언제나 먼저 현실의 공간과 시간을 단절 금지시키는 금기(禁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공적(無空的) 무시적(無時的) 차원을 카오스(chaos)라 한다. 즉 존재의 생명이 없는 영원계가 카오스이고, 그래서 이것이 존재의 무한시발(無限始發) 근원이 된다. 즉 영혼이 불멸한 것도 육체의 조건을 벗어나 무시간 무공간의 카오스 상태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속사고란 유형존재의 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보는 사고다. 이 “카오스의 영원으로부터 존재를 보는 사고”, 이것이 무속사고의 “원본”이 된다. 즉 일정한 사고의 “本”(Pattern)이다. 즉 무속에서는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받고, 순환성을 통해 존재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감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이 순환성은 공간도 시간도 분화되지 않은 카오스의 상태, 즉 카오스의 미분성(未分性)에 근거한다. 그래서 카오스의 미분성이 무속사고의 원본이 되고 이 원본 사고가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제의인 굿이라 생각된다. (→저자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말,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속의 현실떄문이라 생각)